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희진, ‘남성 페미니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8409.html
뒷북. 진작에 읽었으나 도무지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공감과 비판적 의견이 교차하는 글이라 내 의견을 적어보고 싶었다. 일단 이 글이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 두 가지 유형의 남성 페미니스트를 정리했기에 나도 그 기준에 맞춰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도 상관없을 것이다.(각자 자신과 제 주변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유형으로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이들과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경우를 든다. 이 글의 주요 비판대상은 후자인 ‘남성 페미니스트’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천과 선언 중에서 ‘선언’에 방점이 찍힌 남성들이다.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실천하는 남성 페미니스트와 선언하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구별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면이 있으나, 현실적으로 그 구별 방식에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열거한 남성들의 특징이 딱히 페미니스트 남성의 유형인지는 의문이다.
“결혼 제도가 국가의 복지 정책을 대신하고 있다며 비혼을 고수하는 남성”을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예로 들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 많다. 비혼을 고수하는 남성이 똑같이 비혼을 고수하는 여성’만’ 만나지는 않는다. 비혼을 고수하는 남성과 연애하다가 여성이 결혼을 원하는 경우, 이 여성에게 남성의 ‘비혼주의’는 어떤 작용을 할까. 감정 착취, 희망 고문… 등등. 여성주의 실천과 무관하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많은 여성들과 내 인생 즐기며’ 지내고 싶어 비혼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다. 이 글에서 비판하는 “상대방의 자원(돈, 지식, 섹스, 보살핌…)을 착취”하고 “분업(‘양다리’)을 하는 남성”이면서 비혼을 ‘실천’하는 남성의 경우는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양다리만 하나? 문어다리, 오징어 다리로 상대의 동의 없는 멀티연애(속이기)를 ‘자유’라고 주장하기도 하지)
“ ‘작은’ 실천이지만 집에서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성”들도 가까이에서 알고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여성주의적 실천’과 무관한 ‘나의 위생’을 위한 선택이라고 한다. 나랑 같이 사는 남자도 앉아서 소변 보는 남성이다. 그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하지만 정작 이 ‘앉아서 소변 보는’ 습관을 두고 여성주의적 실천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변기와 욕실을 깨끗이 쓰고 싶을 뿐이다. 내가 아는 또 다른 남성도 직접 청소를 하고 살다 보면 앉아서 소변을 볼 ‘필요’를 느낀다고 했다. 다만 ‘서서’ 소변을 보지 않으면 마치 남자의 자존심이라도 구겨지는 듯 생각하는 사람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비판할 수는 있겠다.
이제 이 글에서 비판하는 “‘불성실한 루저’인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로 포장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 “‘빈대’를 연대라고 주장하면서, 가부장제 연애 시장의 ‘틈새’를 파고든다.” 내 안에서 말이 뱅뱅 돌면서 잘 정리하지 못한 언어가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15년 전에 내 돈 100만원 ‘빌려간(갚지 않은)’ 인간에게 정확히 해당되는 말)
하지만 이런 인간들이 딱히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의하는 남자들에게서 벌어지는 일일까.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남자를 현실에서 뼈와 살이 있는 생명체로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페미니스트’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들은 소위 ‘자유로운 영혼’이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여성에게 벌이는 착취는 ‘성실하고 전통적인’ 남성들을 능가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자유로운 영혼들은 관계에 대한 무책임과 불성실함을 ‘자유’로 포장하는데 선수들이다. 여성의 지성을 ‘칭찬’할 줄도 알며 교양 있게 예술을 즐기고 정치적으로 약간의 진보적 위치를 가지면서 정치와 문화에서 꽤 ‘트인’ 사람 노릇을 한다. ‘너무’ 자유로워서 여성의 계급 투쟁에는 관심 없지만 ‘성해방’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이들의 성해방의 개념은 ‘나와 자유롭게 섹스하기’에서 머물곤 한다. 성매매와 성관계도 구별하지 ‘않고’,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자유롭게’ 하려 하며, 성적 대상화를 종종 ‘여성의 성해방’으로 둔갑시킨다. 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