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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익숙한 것들을 뒤로 하고, 다시금 사유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게시판에서 나는 ‘독일’ 이야기를 하게 될 테지만, ‘독일’을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사회민주주의의 낙원도, 경제강국이라는 유토피아도, 그리고 ‘선진국의 문물을 배우고 전하는 유학생’도 이 공간엔 없다. 대신 (독일)사회의 ‘반대편’에 놓인 잡다한 것들을 다루는 사전, 기사, 보고서 등의 인용문들이 이 공간을 채우게 될 것이다. 사회의 풍경은 이 반사회적인 - 각각 asozial, unsozial, kontrasozial에 해당하는 - 것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베를린 유학생.

출판 시장에서 2030 남성이 사라졌다

지금은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몇 주 전 문재인과 민주당은 꽤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이 위기를 촉발했다. <빙하는 움직인다>(창비),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이다. 새누리당은 이 책을 근거로, 참여 정부가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앞서 북한에 의견을 구했고, 그에 따라 기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을 정조준했다. 내게 이 논쟁 자체는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몇 주 지나서 전혀 생뚱맞은 맥락에서 이 책이 언급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세대 간, 성별 간 “독서의 양극화 경향”을 다룬 <주간경향> 기사 “독서의 양극화 ‘문해격차’ 커진다”였다. 10월 내내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였던 이 책의 주요 소비자들이 누구였을까?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상주하는 ‘정덕(정치 덕후)’들이나 볼 것 같았던 이 책을 가장 많이 구매한 계층은 “20대 여성(22.3%)”이었다. 50대 남성 (13.3%), 3-40대 남성(각 11.7%)들은 20대 여성보다 꽤 큰 차이로 뒤를 이었다. 20대 남성은?

이 기사에서 인용한 한 출판사 관계자의 말을 따르면 “출판 시장에 2030 남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들은 “워낙 책을 읽지 않는다.” 이 현저한 비율 차가 <빙하는 움직인다>에만 한정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젊은 남성들의 저조한 독서량은 매우 새로운 경향이라고 한다. 2002년만 하더라도 20대 남성은 월평균 독서량이 20대 여성과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계층이었다. 그런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출판시장의 ‘없는 존재’로 불리고 있다. 물론 아무리 국내 최대 규모라 해도, 인터넷 서점 한 곳의 판매량 통계만으로 특정 세대, 특정 성별의 독서량 자체의 결론을 곧장 도출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문화관광부에서 발행한 설문 통계 자료 <2015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연령별 남녀 통계가 집계되진 않았지만) 전체 성인남녀의 독서량이나 권수는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초중고의 경우 남학생과 여학생 간의 독서율과 독서습관(및 독서 교육 참여)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보이지만, 이 차이가 성인기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을 중심으로 출판시장의 동향을 관찰하는 마케터들,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최근 들어 “책 읽는 젊은 여성, 책 안 읽는 젊은 남성”이라는 언급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지성’과 ‘젠더’를 둘러싼 담론의 내용과 형태가 변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SNS를 포함한 각종 매체, 대학생들의 조별과제 사례, 중고생 과외 교사들의 경험담, 학교 현장에서 독서활동을 지도하는 교사들의 기고문들, 인문사회분야 강의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강사들의 푸념, 심지어 소개팅 경험담에 이르기까지 “젊은 남자(남학생)들이 무식하다/책을 읽지 않는다/고집이 세다, 여자들이 책을 읽는다/더 똑똑하다.”는 담론은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빈번하게 언급되곤 한다. 젊은 여성들의 소비가 출판의 트렌드를 결정하고 있다는 출판관계자들의 발언은 최근의 이런 담론 변화에 담긴 통념을 확인시킨다. 실제 남녀 간의 독서격차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해도, 성차와 지성을 둘러싼 담론의 이동이 진행 중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이런 현상을 현재 한국사회의 어떤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 징후라 생각한다. 그 변화는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진보적이고, 여성 해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상당히 위험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books

최근 젊은 여성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독서율과 넓은 주제의 폭, 특히 페미니즘 도서의 호황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굳어진 불안정한 노동사회와 여성의 높은 교육수준이 결합한 현재의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성에서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구조는 생산과 재생산 영역 모두에서 여성의 경제 참여(맞벌이 혹은 독신 여성노동)를 요구하고 있지만 성과 성차, 성별을 둘러싼 담론은 여전히 이전 시대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독서와 공부는 새로 사회에 진입해서 살아가야 할 여성들에게 필수 요건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성공하기 위해, 차별적 사회를 극복하거나 최소한 생존하기 위해 젊은 여성들은 책을 들고, 언어를 익히고, 지금 세상을 읽고,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이것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젊은 층에서 여성의 투표율이 남성의 투표율을 따라잡은 지 꽤 되었고, 각종 정치적 운동에서도 주도층의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의 성비가 높아지고 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보여주었듯 현재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운동의 실험을 주도하는 주체도 여성들이다. “어린 여학생이 대단하네!” 같은 말들은 이제 촌스러운 것을 넘어 금기어처럼 받아들여진다. SNS 등에서 터져 나오는 “남자들이 ‘무식해서’ 말이 안 통한다, 답답하다”는 비명은 실제 남성들이 정말 아둔해지고 있는지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해도, 여성의 지적 수준과 지적 활동에 관한 동기부여 수준이 올라가면서 남녀의 지성에 대한 평가에서 격차의 보정, 혹은 역전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은 여성의 해방과 가부장제의 철폐, 혹은 최소한 지금보다 더 평등한 사회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한편으론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독서 경향이든, 정치적 경향이든 여성만이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이 상황을 “여성은 미래를 향하고 있는데, 남성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 책 읽기를 소홀히 한다는 젊은 남성들 역시 자신들의 미래를 향하고 있다. 책을 읽는 젊은 여성에게서 진보의 가능성을 보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책을 읽지 않는 젊은 남성들에게서 미래의 무언가를 읽어내야 한다. 다음 시대는 이 둘이 빚어낸 어떤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미래는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국보다 먼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교육 평등에 도달한 서구사회의 현재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얼마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서구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여성의 지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미래의 뒷면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왜 브렉시트에 찬성하고, 트럼프를 뽑았나?

사실 이 ‘뒷면’이 문제다. 이 뒷면은 결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하지 않다. 아니,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우리가 이제 이 ‘뒷면’이 더 이상 ‘뒷면’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육수준이 올라가고, 생산영역이 지식기반 경제로 재편되면서 20세기 내내 노동시장과 재생산(주로 가족)분야는 물론 한 사회의 정치적 구성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주도층이었던 계층의 지위가 이전보다 낮아진다. 남성-백인-노동계급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현재 서구 각국에서 극우 정치의 핵심지지 세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드주의 시대에 진보 혹은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상징세력이었던 이들이 어느새 극우세력의 텃밭이 되었다. 각국의 여론조사에서 “만일 백인 남성들만 투표한다면?”이라는 질문의 결과는 상당히 무시무시한데, 몇몇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의 국민전선(FN)은 집권이 가능하다. 독일의 독일대안당(AfD)을 비롯한 각국의 우익 포퓰리스트 당의 지지율 역시 매우 높게 나온다. 브렉시트(Brexit)는? 우리는 투표함이 열리기 전에 이미 결과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는 지도상의 모든 주를 빨갛게 물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서구의 ‘정치적 우익’들은 ‘유럽연합 대신 국민주권’, ‘외국인 혐오와 민족주의’ 같은 전통적인 우익의 구호만 외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더불어 이들의 정치 의제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젠더 평등과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비판 혹은 혐오다.

독일의 젠더이론/정치철학 연구자인 에바 폰 레데커(Eva von Redecker)는 지난여름에 나온 198호에 독일 우익 정치와 그들의 사회적 담론 속의 ‘반젠더주의Anti-Genderismus’ 경향을 분석한 글 “반젠더주의와 우익헤게모니”를 기고했다. 젠더주의(Genderismus)라는 말은 좀 생소하게 들리는데, 이 단어는 페미니스트들이 내 건 말이 아니라 반젠더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조어라고 한다. 이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한 이들은 네오나치였다. 전통적인 미소지니(여성혐오/여성차별)나 보수주의와는 달리 이 반젠더주의 담론은 여성 일반이나, 혹은 자유롭고 강한 여성들 자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들이 공격하는 것은 소위 ‘젠더 이데올로기’나 ‘젠더 메인스트리밍’이다.

“(반젠더주의에서는) 엘리트 학자들이나 정책결정자들의 모호한 음모가 타겟이 된다. 이것은 심지어 반젠더주의가 페미니즘과도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차이에 대한 존중, 모성에 대한 강한 강조,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와 그 이외 지역을 구분짓는 어떤 성취로 여겨지는 한에선 말이다. 하지만 이런 ‘페미니즘’은 결코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이나, 페미니즘 이론과 공명할 수 없다. 단지 반동적인 이들의 입장을 계속해서 자기-합리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von Redecker, 2016

말하자면 이들이 공격하는 것은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실(그건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이나, 한국식의 ‘착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그건 괜찮다. 오늘날 서구에서 페미니즘을 비판하거나 종교적 신념 또는 자연의 순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녀 차별 자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대신 외래어인 ‘젠더’(독일어에서도 Gender는 보통 번역되지 않은 채 쓰인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논의나 입안된 온갖 종류의 ‘이상한 정책들’, ‘비성상적 담론들’이 이들의 표적이 된다. 이를테면 독일어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표현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논의나, 법적이거나 공식적인 문서에서 성별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것을 독일어라는 언어를 훼손하는 것(독일어는 문법과 단어 모두에서 영어보다 훨씬 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표현이 발달한 언어다. 그리고 통상 남성은 ‘인간일반’과 동치된다)으로 비난하거나, 젠더정치의 이름 아래서 동성혼과 동성부부의 아동 입양을 정체화하거나, 학교에서 실시하는 진보적인 성평등, 성지향 중립적인 교육을 집요하게 문제 삼는 식이다. “교육에서 이념을 추방하자” 지난 9월 베를린 주 선거에서 우익 독일대안당(AFD)이 내걸었던 구호였다. 여기서 이념은 주로 ‘젠더 이념’을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논의(반젠더주의)가 대부분 학문 영역에서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젠더주의자들의 상상 속에서 (나쁜) 페미니스트들이나 ‘젠더주의자’들은 일종의 음모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사회의 정상적인 (때로는 신이 부여한) 질서 자체를 파괴하고, 언어를 파괴하기 위해 각종의 젠더 이론을 들고 와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정치권에 로비하는 사람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이나 퀴어 이론가들의 논의의 어떤 문구들은 과장되게 주목받아 (이들의 음모를 증명하는) ‘팩트’의 이름으로 돌아다니고, 상세한 사회적 맥락을 담은 논의들은 그냥 무시되거나 엘리트주의로 치부된다. 이들은 단지 인터넷 세계에서 댓글을 다는 것을 넘어서 젠더 연구 분야의 학자들이나,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들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한쪽으론 반지성주의가, 다른 쪽으론 과잉지성주의(이를테면 자신들의 ’팩트’에 대한 사랑)가 이 반젠더주의 논의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나 때로 폭력적인 행위에 직접 가담하는 사람들 자체는 적지만, 문제는 이런 주장이 현실 정치세력들과 연결되어 더 크게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반젠더주의는 기본적으로 공포와 방어 메커니즘에서 나온 담론으로서 다양한 형태의 외국인 혐오와 같은 논리적, 물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외국인을 혐오하는 그 사람들이 사회의 ‘젠더 메인스트리밍’이나 ‘젠더화(genderization, 역시 신조어)’에도 반대한다. 백인 남성들은 밖으로 외국인들을 쫓아내고, 안에서 ‘젠더주의자’들의 음모와 맞서 싸워 줄 우익정당에 표를 던지거나, 이 정치활동에 참여한다. 반젠더주의자들이 다 남성인 것은 아니지만(퀴어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보수적인 이성애자 여성들도 있다) 이런 담론의 주류 생산자들은 백인 남성들이고, 주로 호응하는 부류 역시 비엘리트 백인 남성 계층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태의 여성/소수자 혐오와 이민자 혐오는 오늘날 우익 정치 안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서로를 키우고 있다.

hate

다른 한편에서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은 최근 페미니즘 담론의 위기를 관찰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난민들이 쇄도하는 곳곳에서 ‘문화적 차이’가 문제로 떠오르고, 무엇보다 지난 새해 첫날 각 대도시에서 난민/이민자들 일부가 주도해서 벌인 대규모의 성추행 사건 이후, 페미니즘과 외국인 혐오 담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부르카를 둘러싼 논쟁 등에서 이 모호함은 계속 증폭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남성들이나 보수진영, 혹은 페미니즘 일각에서도 ‘페미니즘’을 ‘이슬람 가부장주의’에 반대되는 ‘서구적 가치’로 내세우는 데 기인한다.

엘자 쾨스터(Elsa Koester)는 지난 8월 부르카와 부르키니(수영복, 얼굴을 가리는 복장이 아니다) 논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 지에 기고한 칼럼 “부르카 논쟁을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에서 부르카와 페미니즘 담론 속에 있는 남성들의 담론들을 구분할 것을 지적했다. 그때는 마침 프랑스의 해변가에서 남성 경찰들이 한 무슬림 여성의 부르키니를 강제로 벗기는 사진이 논란이 되었을 때였다. 쾨스터는 부르카를 둘러싼 논의가 여성 해방을 위한 논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남성 가부장주의자들 사이의 영역 다툼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서구사회에서도 여성들은 언제나 남성의 시선 아래에서 옷차림과 외모에 신경 쓰고 살아가야만 한다. 다만 ‘정숙함’에서 ‘자유로움’으로 몸 가치의 척도가 조금 이동했을 뿐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몸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통제하는 권력관계 자체는 절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부르카는 서구 남성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선 권력에 대한 완전한 거부다. 부르카를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는 자기 문화권의 여성을 통제하려는 이슬람 가부장주의와 자신들의 시선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페미니즘과 서구적 가치의 이름으로 부르카를 비난하고, 무슬림을 욕하는 백인 남성들의 가부장제 사이의 다툼을 본다. 여기에 무슬림과 백인 등 모든 여성의 해방을 위한 진지한 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삐 풀린 혐오’가 우리의 미래인가?

현재 서구 사회의 어떤 경향은 미래의 한국사회를 그려보는데도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착한’ 페미니즘과 ‘과격한’, ‘나쁜’ 페미니즘을 구분하고, 사실상 아주 낮은 수준의 양성평등 논의가 아닌 이상 페미니즘적 주장 일반을 후자와 동일시하며 각종 행동에 나서는 남성들을 특히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 지겹도록 보고 있다. 그들은 반론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사실 토론하지 않는다. “메갈은 반사회적 집단이다” 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며, 여성가족부의 음모를 파헤치고, 메갈/워마드를 몰래, 혹은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징치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다. 최근 페미니즘이 주도하고 있는 젊은 세대 내부의 사회 담론에서 나오는 “남자들은 말이 안 통한다”나 “무식하다”라는 말에 극도의 분노와 ‘차별감’을 표시하지만, 말이 되는 논의를 내놓는 대신 자신들만의 ‘팩트’를 내세운다. 나름대로 이런 이들의 분노와 차별감을 대변해주는 지식을 생산하는 일군의 논자들(나무위키로부터 박XX까지)이 이들의 ‘근거’ 역할을 한다. 여성혐오가 ‘위에서 아래로’의 형태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의 형태로, 지배적 담론에 저항하는 ‘대항담론’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사회에서 비엘리트 백인 남성 계층에게서 새로운 형태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외국인 혐오와 여성/소수자 혐오의 결합, 그리고 우익 정치의 확장은 한편으로는 여성해방이 이룬 성과의 ‘뒷면’이기도 하다. 그것을 단지 더 나은 진보적 사회로 향하는 길목에서 겪는 진통이라 하기에는, 그런 식의 역사발전론을 믿기에는 최근의 백래쉬(backlash)는 굉장히 격렬하다. 이것이 단지 경제적으로 위기에 몰린 비엘리트 백인 남성들의 방어적 정치 행위일까? 혹은 그저 무식한 사람들이 벌이는 교양 없는 비행(非行)일까? 사태를 이렇게 보는 것은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남성들보다 교육수준이 낮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존재는 아니었다. 남성들도 저학력이 곧장 이들의 정치적 위험성의 모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낳은 경제적 박탈감으로 우익 이념을 모두 해명하는 것도 어떤 것들을 묻지 않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어떤 것 중에는 분명 성차의 문제가 있다.

서구사회든, 한국사회든 가부장제가 끝나지 않은 이상, 여전히 사회주도계층은 남성 이성애자들이다. 경제의 형태가 바뀌고, 여성들의 경제활동과 지성의 수준이 올라가게 되면서 남성 계층에서 먼저 권위를 상실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말빨이 딸리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가부장제 아래에서 이들은 여전히 지배적 성의 일원이다. 더이상 여성들보다 똑똑하거나 잘난 것이 불가능해지거나, 여성이라는 성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던 각종의 ‘미소지니’적 행위들이 ‘여혐’의 이름을 얻고 비난받아 더 이상 효용이 없어진다 해도 남성들은 지배적 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아예 잘나 보이기를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담론 상에서) 여성해방이 진전된 사회 주류에서 못난 것으로 취급받는 이념과 실천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잘난 여자들’, 그리고 이들이 옹호하는 자유주의, 세계주의, 여성주의적 가치나 정책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 독일의 와 가진 인터뷰 “트럼프는 고삐풀린 분노를 풀어놓고 있다”에서 트럼프 현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트럼프가 풀어놓고 있는 것, 그것은 고삐 풀린 혐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최근 보고 있듯 타인의 동의에 신경 쓰지 않는 성적 행동이기도 하죠. 우리가 언제 부터 여자들에게 그들을 만져도 되는지 어떤지를 물어봤냐, 혹은 왜 그래야 하냐? 트럼프가 실제로 이렇게 말하진 않지만, 이런 질문이 정확히 그가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행동은 사람들을, 그들의 분노를, 그리고 그들의 혐오를 풀어놓습니다. 이 사람들은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고, 중산층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억압받고 있거나 검열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파들이나 페미니스트들, 민권과 평등을 위한 운동에 의해서, 그리고 흑인이 국가를 대표하는 것을 허락한 오바마 정부에 의해서요.”

반젠더리즘같은 이상한 대항담론이나 트럼프나 그 지지자들의 혐오 발언들은 이런 점에서 잘난 것들을 겨냥한 열패감의 분출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아래에서 자신을 위협한다고 믿는, 그리고 주류 엘리트들이 자신들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존재들, 즉 외국인들과 성소수자들을 향해 원한감정(ressentiment)을 투사한다. 투표 분석 결과를 보면서 여성들도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반 투표층과 적극 지지층, 혹은 한 정치 세력의 담론을 주로 주조하는 세력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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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의 독서와 담론의 세계가 필요하다

대학진학률은 높지만, 정치참여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에서는 우익정치의 주요 행위 그룹으로 ‘대졸 미만 남성 노동계급’을 꼽는 식으로 우익정치를 논하는 서구의 방식이 그다지 유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도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고소득의 백인 남성들을 아우르고 있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 소지 여부를 떠나서 남녀 간에 사회적, 정치적 교양 수준에서의 격차가 담론장에서 유의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지성을 둘러싼 담론으로부터 이런 식의 미래적 형태(?)의 남성 우익정치가 대두할 가능성이 낮지는 않다.

시사인의 표제를 빌려 말하자면, 한국의 ‘분노한 남자들‘이 분출하는 사회적인 ‘열패감’이 아직 정치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뜬금없이 진보정당인 정의당에서 (반 메갈리아의 형태를 띄고있긴 하지만 사실은) 반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남성들이 결집했던 것은 한편으론 (일각의 주장처럼) 여혐이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진보적인 담론세계에서 먼저 여성주의가 주류 담론이 되면서 내부의 남성 일각이 이런 방식의 공격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지금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긴 했지만, 페미니즘이 ’책 읽는 여성‘들과 함께 주류 담론장에서 자리를 잡아가면 갈수록 이 문제가 보수 진보를 가르는 주요한 의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어떤 남성들은 정치에서도 기꺼이 ‘진보’를 이탈하고, 새로운 우익적 남성 동맹을 맺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보수적이고 성차별적인 한국사회에서 이들을 정치적으로 동력화할 만한 주장을 내놓는 엘리트들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주민이 늘어나고 외국인과 이민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면 민주화나 경제성장을 둘러싼 이전 시대의 진보-보수와는 다른 전선이 앞으로의 정치적 갈등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남성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결코 쉽게 넘기거나, 그냥 놀림감으로 삼거나, 혹은 거기서 단지 여성해방의 희망을 볼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사회를 위험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책을 읽지 않으면 사회를 위험하게 만든다. 남성이 여전히 가부장사회의 지배적 성이기 때문이고, 그 지배를 결코 그냥 포기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젊은 세대의 남성들이 정말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으로 책을 적게 읽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공통의 독서와 담론 세계에서 이탈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다. 책을 읽는 것은 단지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니다. 진공 상태에서 책을 골라서 읽는 고독한 독서가는 없다. 우리는 책을 둘러싼  각종의 사회적 배치 속에서 책을 고르고, 읽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독서는 그런 점에서 곧 사회적 소통행위다. 정치적 주체를 빚어내는 데 있어 독서가 사회경제적 요소들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책을 읽고, 읽히고, 대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교양에서 핵심 요소다. 독서로부터의 이탈을 막아야 한다.

*이 글은 <청어람 매거진>에 기고한 글입니다. 


댓글 '1'

ehemaliger Berliner

2019.02.07 00:30:40

늦게서야 보았네요. 좋은 글입니다. 김영민 철학자도 동일한 지적을 한 것이 어언 오랫적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기실 지금도 그렇지만 인문학 강연과 모임을 채우는 것의 태반은 여성들이죠. 작금의 백래쉬도 동일한 맥락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건필하시고 계속 열공하시고 차후에 한국서도 큰 기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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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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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캐슬의 조(파)국씨 가문이 해온 일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별다른 불법행위는 찾을 수 없는 민중에 대한 범죄행위”다. 법과 규칙의 논리를 넘어 ‘계급’을 이 파국 속에서 발견할 때에야 정부여당과 그 주변의 리버럴 엘리트들은 이 “범죄행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아주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런 형태의 ‘파국’과 ‘분노’야 말로 리버럴 엘리트들이 가장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파)국 가문이 부와 학력을 세습하는 동안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은 불공정했고, 결과는 부정의...

[서평] 민중이 사라진 시대,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file

  • 김강
  • 2019-01-30
  • 조회 수 211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이상철 외 공저, 분도출판사 펴냄, 2018년 작년 한 해 이런 저런 경로로 등단한 신인 소설가들 중 가장 큰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의 장류진(張琉珍) 작가였다. 창비에서 온라인으로 그의 소설을 공개하자마자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들 상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난 그의 단편은 (웹상에서의 평가에 따르면) 하이퍼-리얼리즘 자본주의 비판 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짧은 분량 안에서도 판교 테크노벨리의 IT기업 및 재벌 대기업의 사내문화와 직장갑질...

목적지가 고작 청와대인가 file [6]

  • 김강
  • 2016-11-15
  • 조회 수 18530

왜 좌파들이 지금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차벽을 넘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 갈아치우는 게 가장 큰 목적인 것마냥. 자본주의의 지배를 끝장은 못내더라도 적어도 의문에 붙이자고 좌파하는 거지 민주당으로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지금까지 좌파했나.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100만명이 나왔는데, 거기 1/10 채우자고 우리가 좌파하는 건가. 이 판은 좌파의 판이 아니지 않은가. 퇴진도, 탄핵도, 하야도 좌파가 주도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재벌들이 줄줄이 엮여 있는, 국민연금과 삼성이...

‘책 안 읽는 남자들’ 담론과 내일의 극우정치 file [1]

  • 김강
  • 2016-11-10
  • 조회 수 4622

출판 시장에서 2030 남성이 사라졌다지금은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몇 주 전 문재인과 민주당은 꽤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이 위기를 촉발했다. <빙하는 움직인다>(창비),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이다. 새누리당은 이 책을 근거로, 참여 정부가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앞서 북한에 의견을 구했고, 그에 따라 기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을 정조준했다. 내게 이 논쟁 자체는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몇 주 지나서 전혀 생뚱맞은 맥락에서 이 책이 언급...

정치는 신학을 떨쳐낼 수 있을까 - 마크 릴라, «사산된 신» 서평 (2009) file

  • 김강
  • 2016-02-27
  • 조회 수 538

이 서평은 2009년 «온라인 당비의 생각»에 실었던 글이다. 아래에 쓴 "문명하셨습니다."와 연결되는 관점을, 특히 '정치와 종교' 문제와 관련하여 짧은 서평 안에 정리해 둔 글이라 몇 년 지난 글이긴 하지만 약간의 코멘트를 추가하여 «파벨라»에도 담아둔다.  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렌의 오스나브뤼크에서 역사적인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벌어진 ‘신교 유럽’과 ‘구교 유럽’의 피비린내 나는 30여 년의 전쟁을 끝맺는 것이기도 했지만, ‘교회의 정치에 대한 지배’라는 중세 유럽의 기나긴 신학-정치...

"문명하셨습니다." file [5]

  • 김강
  • 2016-01-06
  • 조회 수 1344

지금까지 어떤 문명이 미개함을 몰아내자는 캠페인으로 건설된 바 있을까. 있다. 오직 식민지들에서만 그것이 가능했다. 그것을 건설이라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미개를 타파하고 문명을 갈망하는 목소리들에 (문명인 다운) 주체적인 자의식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문명 캠페인은 두 개의 타자화 형식, 즉 1. "미개"라는 타자를 설정하고 공격하는 것, 2. 스스로 "외국"이라는 대타자(오직 구미의 선진국들만이 이 "외국"이 될 수 있다)의 대상이 되는 것 속에서 이뤄진다. 그 속에서 문명을 갈망할 수록 주체는 더욱 더...

[번역] 좌파 버전의 무의미한 그렉싯 담론에 반대함_토마스 자이버트 file

  • 김강
  • 2015-07-12
  • 조회 수 4939

역주 | 그리스 치프라스 수상과 차카탈로스 재무장관이 국민투표에서 채권단 안이 부결된 뒤에 이와 비슷한 긴축안을 재출함으로써 각국 좌파들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칼럼은 독일 좌파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리자 정부의 신 협상안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리스 정부의 신 협상안은 정치적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독일 정부가 이끄는 현재 유럽질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무엇보다 정치적 행위자로서 좌파진영의 무능이야말로 이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유럽 및 그...

독일 급진좌파운동 약사(略史) file [1]

  • 김강
  • 2015-05-20
  • 조회 수 752

68 운동의 학생 지도자 루디 두취케 6, 70년대의 독일 급진좌파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비교적 익숙하다. 50년대의 보수적인 “총리 민주주의”의 시기를 거쳐 대연정 및 사회민주주의의 황금기에 접어든 독일(서독)에서도 반전운동과 반권위주의로 특징지워지는 68혁명의 기운이 불어왔다. 이 시기의 서독의 의회정치는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 그리고 소수파 자유당 단 3당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교회(가톨릭과 독일개신교)나 노동조합,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이들 정당을 통해 대의되는 조합주의적 사회형태를 띄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