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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은 사회적 구조와 의미망에서 발생한다는 전제 하에, 한 사람이 처한 사적고통을 공적언어로 해석하는 글을 인터뷰나 에세이로 쓸 예정이다. 말의 억압 시대,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글쓰는 사람.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등에서 글쓰기 수업을 열어 자기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며 자기언어를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2015)> <쓰기의 말들> <폭력과 존엄 사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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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원하는 돈 줄테니까 덮고 가자” file

  • 은유

한강 다리는 서른한 개다. 하나씩 두 발로 건너보리라 언제부터 다짐했다. 아름다운 한강을 살뜰히 만끽하려는 서울내기의 욕심이고 목표였다. 성산대교, 양화대교, 한강대교, 원효대교, 마포대교, 잠실대교를 걷고 나선 진척이 더뎠다. 봄기운 깃드는 3월 6일, 반포대교를 건넜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 11주기 ‘방진복 행진’에 참가했는데 그 구간에 반포대교가 포함돼 있었다. 출발지는 한남동 리움미술관 앞. 미술관 건너편에 붉은색 높은 담장이 보였다. 저 안쪽이 삼성 총수 일가 자택이라고 누...

  • 2018-03-18
  • 조회 수 629

'불쌍한 아이' 만드는 '이상한 어른들' file

  • 은유

인터넷 광고 페이지에서 아기 사진을 보았다. 통통하게 오른 볼살과 한 줌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가진 아기가 누워서 천장을 보는 옆모습이었다. 작은 생명의 연약함, 무구함, 천진함이 몽글몽글 만져졌다. 자세히 보니 어느 사회복지 단체의 광고 홍보성 페이지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은 아이들을 돌본다는 그곳은 이웃의 관심을 당부했고, 게시물 아래에는 ‘후원했다’, ‘우리 아이가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돕겠다’, ‘천사 같은 아기야 힘내라’는 댓글이 달렸다.   때는 연말, 날은 춥다. 원래 아기 사진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

  • 2018-01-21
  • 조회 수 573

나쁜 어른으로 오래 늙지 않으려면 file

  • 은유

몇 해 전 추석을 앞두고 외숙모에게 전화가 왔다. 나이 들어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음식 장만이 힘들다며 추석은 쉬고 설날에만 오면 어떻겠냐고 주저주저 운을 뗐다. 그간 매년 명절에 아버지를 모시고 외가에 갔었고 숙모는 20인분 가량 친지의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후엔 우리 가족을 각별히 챙겼다. 명절상에 특별요리를 더한 상차림이 예순을 넘긴 숙모에겐 고단한 노동이었을 텐데 미리 헤아려드리지 못해 너무도 죄송했다.   아버지에게 외숙모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숟가락 몇 개 놓는 건데”라며 표정이 ...

  • 2017-09-26
  • 조회 수 2298

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file

  • 은유

민지(가명)는 수업시간에 자주 엎드렸다. 의견을 물어도 묵묵부답.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지 않으니 더는 말을 시키지 않았다. 물잔처럼 놓여있던 민지는 할 말이 생각나면 남의 말을 끊고 불쑥 끼어들었다. 주장도 의견도 아닌 그 파편적인 말들을 나는 팔뚝에 튄 물방울 닦듯 무심히 대꾸하거나 못 들은 척 넘겼다. 한번은 민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쌤은 할 말 없을 땐 말 시키고 말하고 싶을 땐 안 시켜요.” 고루 발언 기회가 돌아가는 ‘말의 평등’을 우선시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 2017-07-20
  • 조회 수 1039

고양이 키우기에서 고양이 되기로

  • 은유

수레 집에 혼자 있겠구나. 밖에서 전화하면 딸아이는 정정한다. 아니, 무지랑 둘이 있어. 아, 그렇지 무지가 있었지. 자꾸 까먹는다. 무지는 우리집 고양이다. 사람이 아닌 고양이라서 나는 아이 혼자 있다고 여기고, 고양이를 자신과 동등한 개체로 여기는 딸아이는 둘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기가 이토록 어렵다.  3년 전, 딸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네 마리를 품고 있는 장면이 ‘명화’ 같았다. 친구의 지인 새끼 고양이들인데 다 입양이 결정됐고 한 마리만 남았다며 우리...

  • 2017-07-02
  • 조회 수 2455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 file [1]

  • 은유

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기회에 관심이 많다. 이제껏 사랑을 몇 번 해봤느냐는 물음을 실없이 던져보기도 한다. 상대는 거의 머뭇거린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의 기준 설정부터 간단치 않은 거다. 내게 사랑은 나 아닌 것에 ‘빠져듦’ 그리고 ‘달라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엮여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면서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게 되는 일. 연애가 그랬고 공부가 그랬다. 이전과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계기적 사건이 사랑 같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는 내 어설픈 사랑 연구에 맞춤한 세 편의 이야기가 나온...

  • 2017-05-30
  • 조회 수 3285

상처의 수만큼 우리는 돈을 번다 file

  • 은유

개강 후 두 번째 수업에 과제 발표자가 결석했다. 과제 부담일까, 개인 사정일까. 궁금한 마음에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저, 오늘 안 오셔서 연락드렸어요.” “네? 지난주에 수강 취소하고 환불받았는데요.” 예기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나는 전달을 못 받았다며 얼버무리고 끊었다. 문자로 남길 걸 괜히 전화했나. 불편한 상황을 만든 나 자신을 책망했다. 그날 전화를 끊고 수업을 잘 마쳤다. 집에 가는 길, 얼마 전 통신사 해지방지팀에서 일하다가 자살한 현장실습생이 떠올랐다. 취소·환불이란 말들이 귓속으로 여과 없이 파고드는 따...

  • 2017-05-01
  • 조회 수 2598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이라는 환상

  • 은유

“맞벌이 하시죠? 수레는 혼자 있는 시간에 뭘 하면서 보내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이 담임에게 전화가 왔다. 학부모가 되고부터 핸드폰 액정에 학교 전화번호만 떠도 가슴이 철렁한다. 학교는 어쩐지 불길의 정조를 몰고 온다. 담임의 부름을 받고 불안을 안고 몇 시간 후 빈 교실에 마주 앉았을 때, 담임은 물었고 나는 순간 깜깜했다. 뭐든지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말할 게 없었다. 월수금 영어학원 간다고 둘러댔지만 고작 한 시간 반. 끝나면 아이는 또 무얼 할까.   상담 중 담임이 말했다. 지난주 과학 시...

  • 2017-03-22
  • 조회 수 3651

그날의 눈은 나를 멈춰세웠다

  • 은유

10년간의 프리랜서 생활을 청산하고 직장을 구한 건 고정 급여가 필요해서였다. 은행 대출금을 석 달 이상 갚지 못하면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고 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애들 데리고 이사 다니기 싫어서 마련한 궁여지책인데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니 얼마나 두렵던지. 매달 대출 상환금만큼의 수입 확보를 위해 취직을 택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니까 꼬박꼬박 통장에 돈이 들어왔고, 그 돈은 대출금으로 고스란히 빠져나갔다. 직장 생활 1년이 될 즈음 어느 날 출근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굵고 탐스러운 눈...

  • 2017-03-15
  • 조회 수 1638

엄마입니다만, 어쨌다구요. file

  • 은유

“엄마는 생일날 우리랑 안 있고 왜 친구 만나러 가?” 아이가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면접에 임하는 사람처럼 성심껏 답했다. 우리는 매일 밥을 같이 먹고 외식도 자주 한다. 근데 생일에도 가족이 꼭 함께해야 하는 걸까. 엄마는 아빠나 너네들이랑 같이 있으면 자꾸 일하게 된다. 동생이 어리니까 밥 먹을 때도 반찬을 챙기게 되고 신경이 쓰인다. 일상의 연장이고 특별하지 않다. 엄마도 생일에는 마음 편히 보내고 싶다고. 나는 첫아이를 저렇게 질문이 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둘째...

  • 2017-02-27
  • 조회 수 1422

슬픔 주체로 살아가기 file

  • 은유

세월호 1주기를 앞두고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었다. 이 책은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라는 부제가 달린, 시인 소설가 평론가의 글 모음집이다. 우리는 돌아가며 마음에 남는 문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도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수전...

  • 2017-02-06
  • 조회 수 2000

가지 말고 쓰지 말고 file [5]

  • 은유

시내 길가에서 뷔페 레스토랑 간판을 발견한 아이가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갑게 말한다. “아, 애슐리다! 또 가고 싶다.” 나는 아이에게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본 내용을 말해주었다. 딸아, 애슐리와 자연별곡 등의 이랜드그룹 계열사 외식브랜드에서 지난 1년간 4만명이 넘는 아르바이트생 임금을 84억 원이나 가로챘다단다. 그건 연차수당, 휴업수당, 연장수당, 야간수당 등 수당이란 수당은 다 빼먹은 거라고. 일 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업체를 엄마는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딸아이는 열다섯살이다. 빨리 ...

  • 2017-01-09
  • 조회 수 16962

시를 배반하고 사는 시인들이여! file

  • 은유

시월 이후 내 하루 일과는 ‘문단_내_성폭력’ 검색으로 시작됐다. 자고 나면 터져 나오는 증언을 식후 30분 이내에 챙겼다. 꼬박꼬박 듣기로 말하기를 지지했다. 모 시인, 모 시인, 모 소설가, 모 시인은…. 술자리에서 가해지는 너절한 희롱의 말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이 어린 습작생에게 등단을 미끼로 “여자는 남자 맛을 알아야 한다”며 접근하고 성적 탈선이 미학적 실천인 양 꼬드기고 금품 갈취를 행했다는 기함할 증언까지 나왔다. 이런 일들을 마음에 쟁여두고 살았다니 그 삶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무수한 성폭력 사건을 접하...

  • 2016-12-15
  • 조회 수 1182

말을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 file [2]

  • 은유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촛불 집회는 수업을 마친 후 학인들과 동행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삼삼오오 몰려간다. 일전에 문화공연에 정태춘이 나왔을 때 사오십대는 작은 탄성을 냈고 이십대는 물었다. “정태춘이 누구에요?” “음유시인인데, 우리나라의 밥 딜런 같은 존재랄까?” 난 가사도 음색도 최고인 가수라고 한껏 들떠 소개했다. 설명을 듣던 친구는 검색 본능에 따라 스마트폰을 켜더니 날 보여준다. 실시간 검색어 1위 정태춘. 집회에 온 젊은이들이 ‘늙은 가수’를 모르는 것이다.  지난 주말 집회에는 남성 댄스그룹 DJ DOC가 문화...

  • 2016-12-05
  • 조회 수 10706

한 병 딸까요? file

  • 은유

배우 윤여정이 ‘박카스 아줌마’로 나온다기에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챙겨보았다. 윤여정이 맡은 배역은 소영.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삼팔3.8따라지’(전쟁 고아)로 태어나 식모살이, 공순이, 양공주 등 여러 직업을 거친다. 젊었을 때 미군 흑인 병사와 살림을 차렸고 아이를 낳았지만 키울 여건이 안 돼 해외로 입양 보낸 사연이 있다. 하필 전쟁통에 삶에 제약이 많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필두로, 살면서 몇차례 난폭한 우연을 통과하자 남은 거라곤 몸뚱이 뿐. 65세 여성 노동자는 가방에 박카스를 챙겨넣고 파고다 공원 일...

  • 2016-11-14
  • 조회 수 2996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file [20]

  • 은유

나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중3 초에 그 학교를 알게 됐고 '공부 잘해야 가는 학교' '취업 명문'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가까스로 합격했고, 잠실에서 무악재까지 왕복 서너 시간 등하굣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난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일찌감치 따두었고 2학년 올라가서 5월에 국내 최대의 증권회사로 취업이 결정됐다. 그때부터 책 보고 시 베껴 쓰고 음악 듣고 학교 건물 뒤편 우애동산에서 낙엽 주우면서 한량처럼 놀았다. 금융권에서 여직원은 여상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여상 중에서도...

  • 2016-11-10
  • 조회 수 39151

기죽지 않는 자기 소개 file

  • 은유

"저는 나이가 많습니다. 70살인데 결혼을 안 했고 자식이 없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지역 평생학습관 글쓰기 수업 첫시간, 한 여자 학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일흔 살에 비혼 여성? 내용의 희소성보다 그 사실을 서슴없이 터놓는 당당함에 처음엔 당황하고 곧이어 감탄했다.  일정한 나이에 학교 가고 취업 하고 결혼 하고 자식 낳고 사는 인생 행로를 가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서는 시시때때로 불편을 겪는다. (중년 여성은 무조건 ‘어머님’으로 불린다.) 왜 남들처럼 살지 않는지 설명을 요구받는다. 그 ...

  • 2016-09-30
  • 조회 수 609

김제동의 말 file [2]

  • 은유

“너희들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종족들이에요.” “무조건 남자들은 앞으로 살면서 여자 말을 듣고 산다 생각하면 중간은 간다.” “여자들이 불쌍한 남자 잘 보살펴 달라.” “사람이 아니고 개다 생각하면 싸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인터넷에 떠도는 김제동의 강연 동영상 자막이다. 김제동은 ‘연애할 때 싸우지 않는 법’을 특유의 입담으로 설파하고 객석을 채운 선남선녀 커플들은 물개 박수를 치면서 박장대소다. 화기애애한 강연장 분위기를 보는 나는, 웃자고 하는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 쉰다.  김제동의 말은...

  • 2016-05-30
  • 조회 수 15433

그렇게 장애인 아버지가 된다 file

  • 은유

지하철 객차에서 장애인 아들과 비장애인 아버지를 보았다. 건장한 성인 체격의 아들은 천진난만한 어투로 목청껏 떠들고 크게 웃었다. 주변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금만 작게 말해달라고 타일렀다. 자상한 눈빛이었다. 부자지간의 대화가, 그들의 외출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다. 직업정신인데, 무수한 이야기가 깃든 얼굴, 자기정리가 된 듯 편안한 기운에 끌렸다. 어떤 일로 웃는지, 속상한지, 불편한지, 실망하는지, 어떻게 기운 차려 하루를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매스컴에 소개...

  • 2016-05-10
  • 조회 수 631

기록되지 않은 전태일을 기록하며 file

  • 은유

1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모인 글쓰기 수업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을 때면, 그의 생애 만큼이나 뜨겁고 척척한 말들이 오간다. 감응의 지점이 세대별로 조금씩 다르다. 60대는 ‘신발에 물이 새지 않으면 다행인’ 찢어지는 가난에 좀 더 공감하고 40~50대는 ‘비참한 현실을 바꿔내는’ 집요한 싸움에 반응한다. 20~30대는? 가장 열렬하다. 전태일이 그리는 생생한 노동 현장 실태에 맞장구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월급 받아도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전태일 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틀리지 않구나 싶어요.” “먹고 살길이 ...

  • 2016-04-15
  • 조회 수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