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미지 출처(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95204.html)
지난 겨울 한국에서 만난 한 교육계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대학생들이 만우절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오는 경우가 있어요. ‘일반고’ 교복 틈에서 자사고나 특목고 교복이 눈에 띄지요. 그러다가 저쪽에서 누군가가 도포 자락 휘날리며 걸어오면 전부 기 죽는 거에요.” 도포자락이요? “민족사관고요.” 아...
다소의 과장이 섞인 이야기겠지 생각하면서도, 이런 슬픈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로 인간들의 ‘분리’ 작업이 섬세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요즘 학생들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라고 했다. 얼핏 듣기에 ‘노력에 대한 보상’은 당연하지 않을까 싶어 나는 금방 대꾸를 못하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지 않아도 ‘재능기부’를 권하는 시대에 보상은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좀 더 이야기를 들은 후 그가 말한 ‘노력’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노력’의 개념이 변모하고 있으며 이 노력의 원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공부를 잘 하는 이유가 순전히 ‘개인적인 노력’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공부 못하는 이유는 그저 노력을 안 하는 게으름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게으른 인간은 보상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며, 여기서 ‘보상’이란 경제적 차원만이 아니라 인격적 차원까지 확장된다. 그렇게 ‘차별에 찬성’한다.
그날의 결론은 “이게 다 어른들이 보여준 모습이지요.”라는 뻔한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너와는 다른 등급의 인간’이라고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는 모습은 결국 ‘우리’가 보여준 중요한 단면임을 인식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업무 성과에 따라 등급을 매겨 임금에 차등을 두는 성과연봉제로 저성과자는 조직에서 퇴출한다. ‘능력’이 없으면 조직에서 과감히 버려져도 당연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새 정부가 박근혜 정부가 도입한 공공기관 성과연봉제에 대해 폐기 수순을 밟는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소위 ‘금수저 고교’라고 불리는 강남 3구의 몇몇 고등학교와 자사고, 특목고가 서울대 합격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이는 개인의 노력 차원이 아님을 전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부모의 부와 학벌이 자식에게 대물림 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란 세습에 기초한다. “돈도 실력이야. 니들 부모를 원망해라.”라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런 사회를 함축하는 하나의 정언명령처럼 메아리친다.
드라마의 안티고니스트들이 주로 뱉는 대사,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유명한 ‘연민정’도 이 대사를 빼먹지 않았다. 나의 현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외치며 비록 이 현재가 또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더라도 나는 나의 과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울부짖음이다.
학교에서 입학 전형에 따라 이름을 붙여 ‘무슨충’이라고 하며 무시하듯이 직장 내에서도 각종 등급에 따라 서로 간의 반목이 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왜 나처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 나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전혀 근거가 없는 마음은 아니겠으나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가.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또한 능력에 따라 ‘인격적 대우’까지 달라지는 현상이 능력에 대한 올바른 보상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가 예상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은 풍요로부터 비롯된다’. (공상적이지 않은 부분도 많다) 어떤 집단의 빈곤이 다른 집단의 풍요 때문에 생겨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의 풍요는 다른 한 쪽의 빈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나의 ‘능력’이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무/능력자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