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34553354.JPG

영화 <박열>을 보고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 동안 잘 몰랐다는 생각에 빨리 알아서 스스로 이 민망함을 지우자는 조급함도 있었다. 책을 찾아 보니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쓴 옥중수기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가 쓴 평전 <가네코 후미코>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저자가 박열과 후미코 두 사람을 함께 다룬 책이 있었는데 이는 영화 개봉과 비슷한 시점에 출간되었다. 평전과 함께 옥중수기를 읽으려고 보니 옥중수기가 무려 세 종류였다. 이 중 두 종류는 영화보다 한참 전인 2012년 출간되었다. 어떤 책을 고를까 살펴 보다가 나는 제목이 더 마음에 드는 쪽을 선택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책을 다 읽고 보니 이 제목이 역시 가장 잘 어울린다. “나도 결코 내가 꼬여 있지 않다고도, 뒤틀려 있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겠다. 사실 나는 꼬여 있었다. 또한 뒤틀려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비뚤어지게 했는지.”(158)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통해 현재를 설명한다. 주말에 후딱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의 삶이 너무 가혹하여 짧은 문장 사이에서 긴 호흡이 필요했다.

가네코의 어머니는 억척 어멈은 아니라 계속 남자를 찾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1900년대에 여자가 혼자 자식 기르며 생활하기 어려우니 남자를 계속 찾고, 주변에서도 남자를 계속 소개한다. 그러나 나아지는 것은 전혀없다. 이 남자들은 식모와 유모가 필요해서 재혼을 하거나 후처를 찾을 뿐이다. 자신의 처제와 바람나서 자식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네코 어머니가 만난 남성들은 하나같이 무책임하고 무능력에 불성실하기 짝이 없다. 술과 노름은 기본이고 폭력적이다. 가네코의 아버지는 가부장의 권위는 가지려 하지만 자식을 끝까지 호적에 올리지도 않아 가네코와 그의 동생은 모두 무적자였다. 법적으로 이 세상에 없는 사람. 한국과 비슷한 점, 바로 가문과 체면, 조상을 중시 여기는 일본에서 1900년대 무적자란 천하고도 천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이로 인해 가네코는 온갖 멸시와 구박을 받는다. 가네코는 결국 외조부의 호적에 막냇딸로 오르고, 남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모가 자신의 사생아로 호적에 올린다. 가네코는 어머니 쪽의 성이다.

가네코는 자신이 학대받은 경험을 기록하며 가장 대표적이며 가장 잔혹한 구박의 기록은 아니다. 나는 일부러 그것은 쓰지 않았다.”(158)라고 한다. ““그것은 당신의 성격이 꼬이고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할머니가 아무리 냉혹하다 해도 설마 그 정도일 리는 없어.”라는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158)이라고 한다. 그럴 리 없어, 그런 사람 못 봤어, 너가 너무 지나친 거 아냐?....... 이처럼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가네코가 조선에서 고모와 할머니 집에서 보낸 7년은 혹독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처음에는 가네코를 가난에서 구제해서 교육도 받게 할 것처럼 데려갔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툭하면 가두고, 내쫓고, 굶기고, 온갖 일을 부려먹고, 구타했다. 학대와 배고픔 속에서 가네코가 자신과 동일시한 대상은 마당에서 떨고 있는 개나 일본인에게 핍박받는 조선인이었다. 그의 조선 생활 중 따뜻한 말로 밥이라도 한 끼 챙겨주려 한 사람은 조선인 아줌마였다. 밥 먹었냐는 말 한마디에 가네코는 울음이 터진다. 부모를 비롯하여 핏줄,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 내에서 제대로 돌봄받지 못한 그가 민족이나 국가를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오자 가네코의 아버지는 자신의 처남이자 가네코의 외삼촌이 상속받을 재산을 노려 가네코를 외삼촌과 혼인시킬 계획까지 세운다. 외삼촌 또한 처녀와 살기 위해 자신의 조카를 아내(라는 이름의 식모)로 만들려 한다. 두 남자 사이의 조약은 가네코가 또래 남성과 연애를 하면서 깨졌고, 아버지는 가네코에게 화냥년이라 욕을 퍼부으며 구타한다.

가네코가 아버지를 벗어나 도쿄에 와서 연애한 남자들은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그를 노리개삼았다. 임신 따위 걱정 안 하는 일본인 남자친구, 같이 살자더니 조선으로 튀어버린 조선 유학생.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노리개였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335) 가네코는 도쿄에서 식모살이, 노점 등을 거치며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치지만 끼니를 때우기도 버겁다. 수많은 상처를 안고 나 자신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 이것은 하쓰요 상을 알게 되면서 하쓰요 상이 내게 읽게 해준 책들의 감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하쓰요 상 그 자신의 성격이나 일상생활에 자극을 받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335)

7a0f861670f5ce79eb3a320f5f19f21a.JPG

후미코가 자기 인생에 단 한명의 여성이라 말한 니야마 하쓰요는 그의 지적 성장에서 중요한 영향을 준 친구다. “<노동자 세이로프>를 감격에 겨워 나에게 권한 것도 하쓰요 상이었다. <죽음의 전야>를 빌려준 것도 하쓰요 상이었다. 베르그손이나 스펜서나 헤겔 등의 사상 일반을, 혹은 적어도 이름이라도 알게 해준 사람이 하쓰요 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나의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하쓰요 상이 갖고 있던 니힐리스틱한 사상가들의 사상이었다.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331) 니야마 하쓰요는 결핵으로 후미코가 이 수기를 쓸 때 옥중에서 이미 죽었다. (영화 <박열>에서 폐병 환자로 나오는 여성이다)

짧은 생을 꼼꼼히 기록한 그의 수기는 한 개인의 인생이며 조선과 일본의 미시사다. 그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경험한 장날의 풍경이나 철도 건설로 인해 변화하는 사람들의 일상, 당시 교육제도 등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일본의 시골에 머물던 시절을 기록하며 '도시가 어떻게 시골을 착취하는지'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시각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체면에 억눌린 사람들의 모습에 몸서리쳤다. 무책임한 이들의 체면 타령.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는 그런 사회에서 나 개인에 대한 존엄함을 잃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분투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조국을 버리고 사랑하는 남자와 뜻을 함께한 여자로 가네코를 소개하는 방식은 성차별적이다. 조국을 버리고 남자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와 뜻이 맞는 남자를 만난 것이다. 게다가박열의 연인은 그의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다. ‘ ~의 여자라는 시각에 갇혀서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아주 편협하게 그릴 수 있으며 대부분 여성의 삶이 이러한 편협한 틀에서 기록된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한 개인을 떠나 20세기 초에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성장한 여성의 기록이 그 자체로 너무도 귀하다.


댓글 '2'

2017.10.17 09:02:05

이런 걸 보면 결국 여자에게 국가는 없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침112

2017.11.07 09:29:2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file [2]

  • 2017-10-13
  • 조회 수 44297

영화 <박열>을 보고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 동안 잘 몰랐다는 생각에 빨리 알아서 스스로 이 민망함을 지우자는 조급함도 있었다. 책을 찾아 보니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쓴 옥중수기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가 쓴 평전 <가네코 후미코>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저자가 박열과 후미코 두 사람을 함께 다룬 책이 있었는데 이는 영화 개봉과 비슷한 시점에 출간되었다. 평전과 함께 옥중수기를 읽으려고 보니 옥중수기가 무려 세 종류였다. 이 중 두 종류는 영화보다 한참 전인 201...

'윈드 리버' : 동물과 여성, 그리고 초월적 사냥꾼 file [2]

  • 2017-10-07
  • 조회 수 2343

* 스포일러 있음. 잭슨 폴락의 고향, 와이오밍은 미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주지만 황량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역동적이다. 와이오밍이라는 보수적이며 야생적인 지역을 중심으로 동성애, 살인사건, 약물중독 등을 다룬 애니 프루의 단편집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 와이오밍의 지역성을 소설의 중심에 놓은 작품이다. 애니 프루는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로도 ‘와이오밍 이야기’를 단편으로 꾸준히 썼다. 와이오밍은 지리적 관점에서 이야기 생산을 자극하는 지역이다. 주로 평원이 펼쳐진 중서부에 비하면 로키 산맥이 뻗어있는 와이오밍...

여성의 액체를 말하라 file [6]

  • 2017-09-07
  • 조회 수 6488

작가 Sarah Levy가 자신의 생리혈로 그린 도널드 트럼프 초상 그레타 거윅의 연기가 만개하는 <20세기 여성들>. (왜 한국 제목은 <우리의 20세기>인가) 애비(그레타 거윅)는 손님들과 함께 앉은 식탁에서 “나 생리중이야”라고 말하며 ‘월경menstruation’이라는 단어를 또렷하게 내뱉는다. 영화 속 배경은 79년. 당시 20대인 50년대 생 애비의 행동은 20년대 생 도로시(아네트 베닝)의 눈에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발언을 지적하자 애비는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월경’ 이라는 단어를 말하도록 설득한다. 모...

노력에 대한 보상 file

  • 2017-06-23
  • 조회 수 44497

이미지 출처(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95204.html) 지난 겨울 한국에서 만난 한 교육계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대학생들이 만우절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오는 경우가 있어요. ‘일반고’ 교복 틈에서 자사고나 특목고 교복이 눈에 띄지요. 그러다가 저쪽에서 누군가가 도포 자락 휘날리며 걸어오면 전부 기 죽는 거에요.” 도포자락이요? “민족사관고요.” 아... 다소의 과장이 섞인 이야기겠지 생각하면서도, 이런 슬픈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로 인간들의 ‘분리’ 작업이 섬세해졌음을 알 수 있다. ...

설겆이에서 돼지흥분제까지 file [1]

  • 2017-05-09
  • 조회 수 13065

연이어 발생한 테러, 사람들의 일상을 꾸준히 위협하는 실업문제가 ‘더 중요한’ 사안이기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프랑스는 올랑드 집권 동안 ‘작은’ 성과도 있었다. 환경정책을 비롯하여 내각의 성별과 인종 구성, 동성혼 합법화, 성매매에 대한 새로운 법 도입 등. 대부분 ‘성’정치에 해당한다. 성과 밥벌이가 분리된 사람들에게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문제다.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을 상징하는 빵과 장미가 어떤 사람에게는 밥과 여자에 해당한다. 여자가 행복추구권의 매개 역할을 한다. 배가 고파 밥을 먹고 ‘2차로’ 후식처럼 여자를 ‘...

남성 정치인의 아내 file [1]

  • 2017-04-19
  • 조회 수 10491

정치인의 아내가 남편을 돕기 위해 하는 일은 어디까지 공적인 지원이고 어디까지 아내의 개인적 내조에 해당할까. 정치인을 ‘남성’으로 두고 배우자는 대부분 아내라는 이름의 여성이기 때문에 이 여성들이 남성 배우자를 지원하는 일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정서가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한 정치인의 아내가 다른 정치인 아내를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를 위해 선물을 사느라 시간을 쓴다면 이는 공적으로 지원요청을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닌가. 안철수 후보의 아내 김미경씨의 ‘갑질’ 논란을 보면서 좀 복...

본다는 것 : ‘더러운 잠’을 둘러싼 시선의 정치 file

  • 2017-02-23
  • 조회 수 9366

뭘 봐,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모두 ‘어디 감히 보느냐’를 뜻한다. 낯선 사람에게 나도 두어번 당해봤다. 어떤 사람에게 본다는 것은 위험하다. 반대로 나는 수도 없이 보여졌다. 보기만 할까. 품평도 한다.  ‘시선강간’이라는 말이 있다. 성별때문에 시선을 통한 폭력을 경험하는 여성들의 상황을 표현하는 언어다. 이 표현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언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여성들은 시선의 침략에 수시로 맞닥뜨린다는 점을 생각하자. 표현의 정확성은 다시 고민하면 된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를 묘사한 이들은...

여성의 가장 중요한 직업 file [1]

  • 2017-01-23
  • 조회 수 82276

조지 엘가 힉스 George Elgar Hicks, <여성의 임무 :  Woman’s Mission: Guide of Childhood >, 1862–3 <여성의 임무> 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에게 일종의 지침서로 사용하기 위해 3부작으로 구성되었다. 아이를 기르는 엄마, 남자의 동반자인 아내, 노인을 돌보는 딸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캠페인의 육아 정책 홍보 비디오에는 “엄마이며, 아내이며, 사업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방카 트럼프가 목소리를 낸다. 그는 “엄마는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직업”이라고 한다. 그도 물론 아내이며 무려 아이를 셋이나 낳은 엄마...

쳐들어오는 말들 file

  • 2017-01-02
  • 조회 수 1703

지금은 사라진 '대한민국 출산지도' 김혜수의 매력은 꺼질 줄 모르는가 싶을 정도로 여전히 신선한 모습을 과시하는 영화 <굿바이 싱글>. 김혜수가 연기한 극중 배우 고주연에게서 아주 당연하지만 사회에서는 전혀 당연하게 취급받지 못하는 말 한디가 쏟아져 나온다. 임신한 고등학생의 미술대회 입장을 가로막는 학부모들에게 고주연은 “임신시킨 남자애는 국가대표로 나갔는데 왜 임신한 여학생은 미술대회 못 나가냐!”고 소리친다. 성’관계’라고는 하지만 이 ‘관계’에 대한 책임은 주로 한쪽이 담당한다. 임신은 온전히 여자의 몫이...

"‘동네 아줌마’보다 못한" file

  • 2016-11-02
  • 조회 수 22643

“저는 ‘제3의 성’이라고 불리는 ‘아줌마’입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자기소개를 하던 자리였다. 또래보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던 한 여성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했다. ‘제3의 성’이라는 그의 표현은 재치있는 유머였지만 나름 뼈가 있는 말이었다. 아줌마로 분류되는 기혼 여성의 세계에 살고 있는 그에게 ‘뒤늦게 공부하는 아줌마’라는 주변의 눈치가 꽤 있었다. (여담이지만 남의 인생에 ‘늦은 나이’라는 말 좀 함부로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에서 이와 비슷...

나는 몰랐다 file

  • 2016-10-28
  • 조회 수 2679

<짜증나게 하는 신사>, The Irritating Gentleman,  Berthold Woltze, 1874 벌써 십 수년 전이다. 나와 업무상 메일만 1년 가량 주고받다가 어떤 행사 자리에서 서로 얼굴을 보게 된 한 시인이 있다. 나를 만난 그날, 그 시인은 나의 선배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젊은 여자를 봤더니 가슴이 너무 뛰어서 집에 가는 길에 약 사먹다”고. 내가 이걸 어떻게 알까. 그 선배가 내게 직접 면전에서 전해줬기 때문이다. 히히 웃으면서, “집에 가는 길에 약 사먹었대”라고 내게 친절히 전해줬다. 많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이러한 ‘징...

혼자 못 사는 남자들 file [1]

  • 2016-07-11
  • 조회 수 6220

허균은 <성옹지소록>에서 아버지 초당 허엽의 스승인 화담 서경석의 일화를 소개한다. “아버님께서는 화담 선생에게 가장 오래 배우셨다. 일찌기 칠월에 선생의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가 화담 농막으로 간 지 벌써 엿새째라고 했다. 곧 뒤따라 갔었는데 가을 장마로 물이 한창 넘쳐나서 건널 수가 없었다. 저녁 때 여울물이 조금 줄었으므로 겨우 건너가셨더니, 선생은 한창 거문고를 타면서 높게 읆조리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저녁밥 짓기를 청하자, 선생은 “나도 먹지 않았으니 함께 짓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머슴이 부엌...

여성 혐오, 그 개념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 file [1]

  • 2016-06-06
  • 조회 수 1038

대안교육 전문지 격월간 <민들레> 10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그게 왜 이슈가 되는가 <인천 콘크리트 바닥 속 백골 시신, '20대 여성 알몸' 추정>, 얼마 전 이 기사를 읽으며 그동안 수없이 죽어간 익명의 여성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라고 생각했다. 26년 전에 지어진 건물, 옷도 소지품도 없이 백골로 나타난 20대 여성의 시신(기사는 ‘알몸’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이 시신에 대해 밝혀진 정보가 없다. 이름도 모르는 한 여성이 건물 바닥에 백골로 묻혀있는 사건은 하나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여성의 죽음은 인간이 쌓...

마지막 상영 file

  • 2016-03-24
  • 조회 수 169

사진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83045 그 이름이라도 한 번 불러줘야 도리일 것 같다. ‘신영극장’. 2007년 폐관 후 2012년 다시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으로 문을 열였지만 나에게는 그냥 ‘신영극장’이다. 강릉에 있는 신영극장이 지난 2월 말에 ‘마지막 상영’을 하고 휴관을 했다고 한다. 너무 안타까운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현이라도 해야겠다. 나의 청소년기 극장 중 하나다. 극장은 신영극장, 서점은 단골서점, 강릉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

대통령 마음대로 file

  • 2016-03-05
  • 조회 수 30082

몇 달전 한 학생에게서 인상적인 메일을 받은 적 있다. 그는 “고통을 상상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할 윤리적 의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졸업논문과 관련한 문의였으나 내가 그렇게 거대한 주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깜냥은 못 되기에 그냥 그의 생각을 듣고 공감하는 차원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그저 그의 고민 자체가 굉장히 반가웠다. 내 고통에 대한 생각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생각은 내게 (아직) 오지 않은 고통에 대한 치열한 상상이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상상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나와 무관한 일...

여성의 장소 file [2]

  • 2016-02-08
  • 조회 수 3334

루이즈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1911~2010), <여성-집 Femme Maison> 연작, 1946~47년   며칠 전 간단한 다과를 준비할 일이 있어서 스타벅스에서 케이터링 서비스로 커피를 구매했다. 나는 그런 서비스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커피를 내려서 보온병에 담아 갈까(보온병이 없네), 인스턴스 커피를 사서 뜨거운 물에 각자 타먹게 할까(인스턴스 커피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냥 주스만 마실까(커피를 찾으면 어떡하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타벅스에 가면 보온이 되는 큰 통에 담아준단다. 오, 그런 좋은 서비스가! 양도...

남성 페미니스트 file [7]

  • 2016-01-13
  • 조회 수 2490

 정희진, ‘남성 페미니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8409.html   뒷북. 진작에 읽었으나 도무지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공감과 비판적 의견이 교차하는 글이라 내 의견을 적어보고 싶었다. 일단 이 글이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 두 가지 유형의 남성 페미니스트를 정리했기에 나도 그 기준에 맞춰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도 상관없을 것이다.(각자 자신과 제 주변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유형으로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이들과 “자신...

여자의 말 file [4]

  • 2015-12-06
  • 조회 수 1469

  Thomas Gainsborough(1727~1788), <Conversation in a park>, 1746~7년 경 레이놀즈와 함께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화가인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작품이다. 그림 속의 커플은 작가 게인즈버러와 그의 부인 마가렛이며 결혼 기념으로 남긴 그림이다. 당시로서는 풍경과 인물이 함께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졌다는 면에서 새로운 장르 개척이나 다름 없었다. 귀족들의 사적인 일상을 우아하게 보여주는 그의 그림들은 상류층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공원에서의 대화>는 내가 가끔 들여다 보며 홀로 웃는 그림 중 하나다. ‘대화’하는 부부의 모...

윤리적 창작 file [1]

  • 2015-11-13
  • 조회 수 575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 Honoré Fragonard (1732~1806), <La Gimblette (침대 위에서 강아지와 노는 소녀)>, 1770년 경 가슴을 드러내고 아랫도리를 벗은 소녀의 성기를 강아지의 꼬리로 가리고 있다. 그 점 때문에 당시에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서스펜스의 대가’ 히치콕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영화화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원작이 있는 2차 창작물의 경우 본래 그 원작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가 여간 쉽지 않다. ‘성스러운 텍스트’는 더욱 그렇다. 영화 <노아>는 성경을 왜곡하고 ...

<베어, 더 뮤지컬> : 변태, 걸레, 못난이 file

  • 2015-08-26
  • 조회 수 1681

  <베어, 더 뮤지컬>은 처음부터 “우리 중에 변태 있어~”라며 시작한다. ‘파격적 소재’라고 하지만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15년 전 초연했던 작품으로 이제 미국에서는 동성결혼 합법화까지 되었기에 그 파격의 농도는 과거와 다르게 읽힌다. 늘 논란이 동반되기는 하지만, ‘안방’ 극장에서도 작가 김수현이 2010년 동성애를 다룬 적이 있으니 뮤지컬의 소재로 딱히 ‘파격적’이라는 수사까지는 필요 없어 보인다. 단지 동성애를 다룬다는 사실만으로 소재의 신선함을 앞장세우기에 이미 대중문화는 훨씬 앞서있다. 이야기의 얼개는 간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