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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제대로 사는 삶의 문제

조회 수 455 추천 수 0 2015.07.03 12: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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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아주 오랜 물음, 문명이라는 이름의 물음에 이끌려 살아왔다. 인간의 문명 특히 서구문명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할 까닭이 없는, 이런 물음을 갖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운 생명으로 여기지 않아왔다.

제대로 사는 것이, 궁극에서 보면 사회의 공적 영역, 그 부산함에, 시끌벅적한 부(富)와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노동, 사업과 인간관계, 인정과 평가의 사회생활에 크든 작든 자신의 능력으로 끼어들어 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라면, 이런 기회를 이미 상실했거나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다른 방식의 제대로 된 삶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허황된 진실로 위로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의 생활은 여전히 피폐돼 있으며 때로는 이로 인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는 박탈감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한번 제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 하면서 전제하는 ‘제대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이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목숨 걸고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근대적 생활체계의 근본에 대해 사실상 올바르게 알지도 못할뿐더러 거기에서 무엇이 처음부터 잘못돼 평생 소외와 궁핍, 수고와 갈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지도 알지 못한채 죽는다.

철학과 예술은, 특히 근현대철학과 예술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개인들의 지적, 문화적 실천으로 이어져왔다. 인간과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철학적 이론과 예술의 중심과제가 되어있다. 하지만 철학과 예술도 기왕의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에 종속돼 세상을 속이고 스스로도 속일 수 있다. 철학과 예술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체제이념의 뜨거운 수호자가 되기도 한다. 철학과 예술에도 제대로 된 삶의 의미에 대한 갈등이 피부처럼 달라붙어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 제국미술학교 유학생 이수억이 1943년 쓴 글에는  청년 미술학도 이수억이 지닌 예술관과 그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삶’의 의미가 고스란이 나타난다.     

“예술가는 그가 사는 사회에서 영향 받은 지식의 소재를 흡수해, 사회를 향해 자신의 것을 토해낸다. ...... 이 때문에 예술은 사회의 문화성, 정치성을 조장하는 리더가 되어야 할 사명이 있는 건 아닐까, 요컨데 이상형의 인생 경험을 묘사한 예술가는 인생에서 깊어진 심원한 경험을 아는 한편 실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묘사하는 것은 자기식의 인생을 해석하는 것으로 일종의 인생비평이다. ...... 그들 작가는 깊고 적확한 인간과 사회와의 파악과 인류사회에 대해 성실히 하고 총명함으로 선의에 일관성 있게 하는 위에, 더 고급스런 지성의 지주가 되는 것은 아닐까...... “,  “예술가가 자신의 이상세계에 안주할 때 그는 현세에 사는 사람들의 감화력을 잃고, 또 예술가가 사회성, 사상성이 결핍되었다고 비난될 때 그의 지성은 퇴보되든가 정지되고 있는 것이다. 또 향수자가 그런 모양의 상태에 함몰될 때 그는 생활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요컨데 그들 작가의 작품은 현실세계에서 발생한 연관성을 갖지 못하게 된다. ...... 우리의 예술에 뜻을 둔 자는 우수한 사회인이 되고 도민이 되고 애국심에 불타는 국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술을 존중하는 것은 고로 예술보다도 사회를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 면학(勉學)의 초보에서는 명(命)을 담은 진검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수억은 조선미술의 발전을 믿고 예술을 통해 인류를 위한 원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예술가의 자아라고 말한다. 이런 그에게는 정체성 갈등은 엿보이지 않는다. 예술가의 사상성, 인생비평을 중요하게 보면서도 정치적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가치관이야말로 날개를 펴 도약하고 싶은 자칭 진보적 예술가가 자신이 믿는 제대로 된 예술가적 삶을 살아볼 수 있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윤리적 정치적 선전적 목적을 주로 하는 예술은 순수하지 못한 예술로 경멸해야 할 퇴폐예술이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정현웅은 조선미술계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로,

“우리가 항상 귀가 아프도록 듣고 있는 작가의 경제적 빈곤이고, 객관적 조건의 불우이고 고갈하고 있는 이완된 환경이고. 여기에 내가 또 한 가지 첨가하면 지방화단이라는 모멸적 관념이 있어서 이곳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려고 하지 않은 경향 ... 식민지적 근성”을 이유로 든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이라는 조건 밑에서는 미술의 일반적 문제도 형성되지 못한다”는 지적을 한다.

또한 “조선 사람이 미술에 몰이해하다니, 화가를 무시한다니 하는 작가들의 하소연”을 “작가 개인 개인이 적극적으로 활약해서 그들에게 이해를 바란다는 것 보다 이해를 시키게 하는 것이 조선에 난 화인으로서의 의무일는지 모른다”며, 조선의 미술계 발전을 위해 화인들이 자포자기 보다는 조선의 세인들의 이해를 독려할 것을 권한다.  

이수억과 정현웅에게 일본 식민지 지방 미술계인 조선 미술계의 발전은 조선을 위해서도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도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야만 식민지 조선의 예술가들도 제대로 된 삶을 누리고 제대로 된 작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수억과 정현웅의 이런 태도는 일본이 식민지 근성이라고 부르는 조선인의 태도가 아니다. 식민지적 근성이란 일제의 눈으로 보면 조선의 상황을 회의적으로 보는 조선인의 생활태도이다. 이런 태도가 나름대로는 자신들이 믿는바 조선의 예술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궁여지책 끝의 결론이었다. 이런 의식을 지닌 예술가들의 계보는 해방 이후 현재의 한국사회 발전, 미술계 발전에 공헌한 사람들로 이어지며 이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도 된다.

자신의 말처럼  ‘무엇이 될 것처럼’ 예술만을 고집하며 살았던 이중섭은 어떤가? 그는 어느 날 예술만을 고집하며 산 것에 때문에 자신이 세인을 속이고 있는 것 같다는 자책감을 지니고 그래도 ‘이 고장의 피나는 소재’로 그림다운 그림을 그려 스스로에 면죄부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보고 겪은 그대로 이 고장의 피나는 소재를 가지고 말이야 동경 가서 그려올 께 마음껏 큰 캔버스에다 채색을 한번 바르고 문질러서 그림다운 그림을 그려올 께, 남덕이 보고 싶어 가는 줄 오해 말어 ...... 나는 세상을 속였어!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후일 무엇이 될 것처럼 .... 남들은 저렇게 세상과 자기를 위하여 바쁘게 봉사하는데 그림만 신주처럼 모시고 다니고 이게 뭐야”하며 이중섭은 다시 일본인 부인이 있는 동경으로 돌아가기를 바랬다. ‘세상과 자기를 위하여 바쁘게 봉사’하지 못하는 것을 자책했던 그는 오늘날 세인의 예술가상에 가장 근접한 작가로 기억되고 있으며 대작도 아니고 피나는 이 땅의 소재도 아니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상, 그림다운 그림이라고 볼만한 작품 <부부>를 그려낸다. 그가 말한 무엇이 될 것처럼은 결국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일 것이다.

이중섭은 부부관계를 환희의 감정으로 드러냈다.  섬세하면서도 힘찬 비상으로 서로 교접하는 부부로서의 기쁨을 마치 손에 잡히지 않는 꿈의 정경처럼 그린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가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에서 인생은 교접하는 순간 죽음을 맞을 때 가장 완전하며 그 이전과 이후의 생은 퇴락일 뿐이라고 하지만, 이중섭은 일상적 부부관계의 기쁨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는 우리 미술사의 소위 위대한 예술가군에 속한 작가가 되어 있다.

고향이 원산인 이중섭은 남북한 정권이 들어설 무렵 월남해 종군작가로도 활동한다. 실향민으로 남한에 정착하며 창작에 전념한다. 사실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도 않았고 계급투쟁 전선에 뛰어든 혁명가도 아니고 남한에서는 제대로 예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기에 남하했고, 그리고 자신의 ‘느낌대로 그리는데’ 생을 바쳤다. 식민지 예술가로 지극히 개인적인 삶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경제적 여유를 누린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미술계 이전투구에 앞장서 나서지도 진보를 자처하며 미술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는 사실상 숱한 이중섭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중섭은 이들의 우상이다. 그의 삶은 식민지체제와 남한사회체제에 종속돼 있었지만, 그는 체제역사의 파도위에 떠다니며 왜 파도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흔드는지에 대해서보다는 파도를 역사의 일부, 자신의 생의 조건의 근간으로 보고 그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려한, 사회의 수많은 개인들, 세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도 어느 정도로는 정치 사회적 견해와 역사문화관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들의 세상살이관은 이러한 견해에 의해 방향지워진다. 이중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중섭이 그 속에 비집고 산 남한에서의 삶을 다시보면, 민족 정체성과 국가정체성 등 남북한 갈등과 남한 내부의 갈등 어디에도 비껴나 살던 삶이었다. 

제대로 살고 싶고 작품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 못지않았으나 그렇다고 남북한이든 어디든 가서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 체제욕망에 앞장서거나 그 안에서 반체제, 탈체제의 전략과 전술을 적극 모색하며 고민하는 개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 구성원 중 대개는 사실상은 이중섭 같이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상은 사회 속에서 살지만 사회의 주요세력들로부터 소외된 삶이다.

이들이 바로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이고 대중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정체성을 일러 ‘세인’(世人)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인들의 실존상태의 구조적 특징인 빈말과 호기심, 애매함으로 범벅된 세인들간의 상호공존성 상태는, 사실 이데올로기 개념의 하이데거식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도 은밀하면서도 공공연이 매개돼있다.

“빈말, 호기심, 애매성은 일상적으로 현존재가 자기의 현(現)이라는 존재방식 즉 세계내존재의 ... 존재방식을 성격지우고 있다. 이들의 세가지의 성격은 현존재에서 보이는 실존론적인 규정성......이런 상호공존재 내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가 ‘세인’이라고 명명한 현존재를 실제로는 ‘평균인’ 혹은 ‘평범한 사람’(ordinary people)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 본다면, 평균인이 그 본래상태에서 스스로와 세계에 대해 깨우치게 될 방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하이데거가 본 세인들간의 정체성 관계의 구조인 셈이다.  

이런 사람 중에 이중섭은 훌륭한 화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을 뿐이다. 이들에게 남북한 체제의 차이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이다. 세인은 자기도 모르게 가장 혹독한 인생의 피해자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파렴치한 인생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중섭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이수억의 태도와 큰 부분 궤를 같이 한다. 이들에게 일본제국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이다. 조선 땅을 지배하는 일본국의 국민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무엇이라도 될 듯’ 시간과 공간을 넘는 세계 속의 ‘예술’을 꿈꾸며 살았다. 오늘날 우리의 예술관에는 이수억과 이중섭의 이 태도가 알맹이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수억의 예술관에서 보이는 화가로서의 자아정체성은 사실 그의 고유한 정체성은 아니다. 일본 제국미술학교의  정체성이다. 개인의 자유사상과 봉사적인 예술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제국주의와 밀착해 지배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결국은 체제에 순종하게 되는 자유주의 오마주의 예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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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정체성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 정체성은 말하자면 자격을 놓고 말한다. 동일한 역사관과 문화관, 가치관으로 무장하자는 것이다. 집단의 새로운 삼강행실도를 그리자는 것이다. 다르게는 피의 역사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혈류도이든 다시 해석한 것이든, 또는 장소 특정적 값어치이든, 성공과 자산, 차별과 박탈, 환대와 권리행사의, 나아가 모든 즐거움과 억울함의 역사를 잊지 말자는 것이고 기회를 얻자는 것이다.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무엇이 될 것’을 담금질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추구하는 정체성을 위한 상호공존재간의 장소특정적 경험과 판단들은 서로 간에 자신의 고유한 것이라 여겨지는 자유와 기회에 안타까워하며 타자의 정체성을 그  완곡함 때문에, 공격적임에 대해, 낯섬이 서로 간에 양립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싸움을 보는 세인들의 이해에서처럼, 타자에 대한 비난과 왜곡을 멈추지 않는다.

일본인들에게 재일 조선인이나 교포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일본인만큼만 이라도 생활의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게 보장하라고 우리가 요구한다면, 우리도 우리 안의 타자들에게 그러 할 수 있어야하고, 일본 거주 조선인과 한국인 간에도 상대방의 정체성 보존 권리를 용인해야 할 것이다. 작가 송영옥처럼 3국으로 분리된 정체성을 지닌 채 살아야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내부의 일본인들 간의 서로 다른 정체성도 동시에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정체성의 정당성 판단을 결정할 최종심급이나 최상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진데 정체성의 도덕적 우열, 우선성에 대한 문제는 결국 또한 여전히 갈등의 불씨일 뿐이다.

정체성을 담보해온 특수 집단의 역사와 문화는 인류의 진보를 이끌기도 하지만, 역사와 문화는 정체성이라는 대의명분으로 타자를 내몰았다. 사실 정체성은 역사와 문화의 다른 이름이었다. 정체성의 확보를 필연성이라 주장한다면, 정체성은 폭력이 된다. 정체성 확보의 대의적 명분은 제대로 살기 위해 내 안과 내 밖의 상황을 점검하고 거기에 맞춘 인문적 적정기술을 확보하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그 행위가 다른 정체성의 기반을 말살하려고 하면 자신의 정체성 기반도 척살당할 뿐이다.

정체성은 이타성(利他性)에 기반해서야만이 타자와 소통 할 수 있다. 이타성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한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타적인 개인이 이기적이기만 한 개인 보다 생존이 유리하다.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서는 이기적인 생명체 보다는 이타적인 생명체가 필요해서이다.

이웃한 정체성과 초인 경쟁을 하고 잔혹경쟁을 하면 남는 것은 동물사회 에 만연한 힘과 능력에 의한 서열피라미드체제가 영속할 것이고, 아니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몇 표차의 선거에 이겨 정당성을 보장받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정체성의 정당성은, 서로 간에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모든 (개인)정체성이 평등하고 자유롭기에 사실상 (개인)정체성은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워진다. 개인이 평등하다는 것은 개인 간의 부자유를 낳는다.

이것을 조절하는 것은 국가 등 사회의 가치심급이다. ‘광장에서 서로의 선택을 조정’한다고 하지만, 광장에서 조정된 공유지식도 선택의 우선과 우열의 논리에서, 평등해서 평등할 수 없는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김창겸은 <사루비아 다방>전(2003) 글에서 “최인훈이 소설 <광장>에서 인생을 풍문 듣듯 사는 건 슬픈 일이라며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난다고 그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하자고 했다며 소설 주인공 이명준이 그리던 풍문과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랑이 있는 광장, 그곳을 찾아서 나도 삶의 바다를 떠돌지 않았을까” 하는 고백을 한다. 

이청준과 김창겸의 광장은 한국 자유 총연맹 바르게살기운동본부의 광장이기도 하다. 한편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자유총연맹집회나 촛불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세인들에게 광장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그대로 재현되는 불편한 이해관계 속의 순수 정치적 공간으로만 느껴질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정체성이 그들의 행복추구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들의 행복추구권은 다른 이들의 정체성을 좌시하지 않는다. 뿐 만 아니라 불특정 세인의 정체성과 특정한 광장의 정체성 사이에는 ‘빈말과 애매함 호기심의 관심’이 작동된다.

“계엄군이 임산부 배를 대검으로 쨌다더라, 독침을 쏘는 간첩이 배후에서 조종한다더라, 광주에서 올라온 사람으로 부터 군인들 총에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학도호국단 단장인 선배는 그런 유언비어는 거짓이니 믿지 말라고 했다. 소문만 무성할 뿐 그때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문은 TV와 신문을 통해 그 모호함을 키워나갔다”(김창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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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체성 문제는 동시대 작가들의 가장 큰 화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로 사는 문제를 진정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고 이로써 예술의 의미 조차 다시 구축해가고 있다. 이들의 작업에 나타난 작가의 정체성 고민은 작가가 성장한 시대 상황과 환경에 부유했던 관념들, 자신의 작가적 성장을 위해 만났던 무수한 비전과 개념과 비유들을 익숙하기도 하지만 낯설기도 한 혼성적 관계로 엮는 실험들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정체성이 몸과 마음의 역사와 문화가 원래 그곳으로 부터 출발한 언덕, 뿌리 뽑힌 듯한 생의 감정을 치유하거나 자신의 존재의 정당화를 위해 찾는 것이라면, 가족은 그런 고향 중 가장 본래적인 공동체를 상징한다.

배운성의 <가족도>(배운성의 후원자 가족이라고 함)는 우리가 ‘가족’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전통적인 개념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김을의 <옥하리 265번지>전(2002)은 “가족의 흔적을 찾아온 작업을 정리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혈육의 존재같은 다양한 느낌의 고리를 포착”(김을)하고 그려낸다. <옥하리 265번지>로 상징되는 혈류가 작가에게 의미하는 것은 배운성이 그린 <가족>에 드러난 후손에 미치는 가족의 지배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의 관계를 죽음 너머에 까지 약속할 보이지 않는 가족 정체성 틀은 제사를 통해 완성된다. 하지만 문영민에게 제사라는 관습은 자신 안에 들어와 있기도 하지만, 새삼스레 ‘정체성’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되씹게 되는 낯선 대상이기도 하다.


“절하는 모습을 그리는 이유는 그것이 물론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애도의 보편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행위란 내가 친숙하고 잘 아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낯설고 정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는 모순에서 기인한다.”(문영민, 시민적 윤리-질서의 감각연작에 대하여)


남북이산가족 상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다. 때로는 먼 친척이라도 직계가족처럼 가족의 이름으로 얼싸안고 회한을 푼다. 하지만 어떤 개인에게 부모와 형제는 개인사의 비참한 덜미이기도 하다.

배운성과 김을의 가족도는 이선민이 <수영과 지영>에서 부모가 자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바로 그 가족상이기도 하다. “부모의 꿈과 욕망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자식과 나누고 공유하는 모습을 이미지화함으로서 중년세대가 간직한 내면의 욕구를 표출한다”(이선민) 가족은 이들 세 작가들에게는 개인이 해야 하는 일, 가치관, 인생설계의 밑그림을 그리는 사회적 생명의 실제적 힘이다. 가족은 개인의 ‘정체성의 의미’를 전승한다. 가족은 경우에 따라 내가 꿈꾸는 어느 문화를 뿌리 채 뒤흔드는 ‘세인’이라는 가치관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이선민 수영과 지영.jpg



가족을 마을이나 집의 외관과 함께 그린 경우, 애매한 추상적 생활공간이 개인의 애매한 정체를 대변한다. 박수근 그림은 주변의 정경이나 집을 배경으로 한다. 집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재산이라기보다는 한때의 보금자리나 생활터전이다. 박수근은 그림에서 대상의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는다. 문제로 삼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 ‘세인’, 다시 말해 일반인의 사정을 애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작가자신도 가족도 주변인물들도 이런 존재로 대해진다. 세인들의 진정한 우상은 세인들 자신이고, 그 중에서도 예술가라면, 고통스럽지만 자기마음대로 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우상이다. 세인들은 이중섭과 박수근에서처럼 인간관계에 대해 따뜻하고 호기심어린 시선을 지녔지만 그것의 사회적 정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들지 않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생활의 고통은 민중미술운동에서 비로소 그 정체성 갈등의 재현상을 얻는다. 하지만 민중미술에서도 실제 거의 모든 가족 관계에 깔린 복합적인 정체성의 문제지층은 표현을 얻지 못한다. 강광의 <가족, 회색지대>에서 지나가는 기억의 한 조각인 듯 표출될 뿐이다. 사실 이 작품과 정용규의 역사 없는 기쁨의 서커스가 벌어지는 탈장소적 애매함에 기댄 도시의 가족은 정체성이 상실된 의미들처럼 서성댄다.

주재환은 <나의 푸른 꿈>을 통해  “현실 속에 부재하는 희망을 언어적 표상과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 사이의 괴리를 통하여 은유”한다.(성완경) 주재환이야말로 적정기술의 의미를 인문적 창작방법으로 적용한 작가인데, 퇴락해버린 사물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의미론의 다른 곶, 하지만 추상적 지형이 아니라 ‘하찮은 것’들이 부서지면서 떨어트리는 생활의 파편을 곰씹으며 사물 정체성의 전환을 시도한다. 신학철과 정하수의 작품들도 다른 꿈을 향해 나아간다.

천경자와 안창홍과 주재환과 민정기가 그리고 황주리와 권여현이 가치관이 다른 듯 보여도, 한편 김경인과 한석란과 이흥덕과 황현수와 황지선의 예술적 비전이 달라 보여도, 이들 모두는 ‘무엇이 될 것’이라 꿈꾸며  ‘작품’에만 매진하는 작가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가들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의 자기정체성 탐구는 이들처럼 이중섭의 소망에 닻을 내리고 있다. 김승영에게 의미의 시작이 요셉 보이스이듯 이들에게 생의 정체성의 ‘의미의 시작’은 천재 정체성의 작가개념에 있다.

이상현의 작품 <잊혀진 전사의 여행>은 “선에는 좋다거나 나쁘다는 그런 것이 없다. 또한 추하다거나 아름다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예술을 삶과 구분해서는 안 되며, 삶 속에는 오직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공상영화의 화려한 스펙타클 보다는 못하지만, ‘누추한 형식’으로나마 자신의 공상의 나래를  풀어낸”(이상현) 작업이다. 이상현의 작가적 삶은 가히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공상적 퍼포먼스 오딧세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의 누추한 모험이, 행위가 그를 만들어왔다.  

오형근은 아줌마 연작과 중간인 연작등에서 ‘불편한 진실’을 찍는다. “뭔가 규정하기 쉽지 않은, 거대한 불안이 아니라 아주 소소하고 미열 같은 불안, 자기 자신 혹은 외부의 시선조차도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화한다. 오형근은 한국사회에 내재된 중심문제를 ‘중간성의 개념’으로 찾는다. 그래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수많은 중간인들이 느끼는 미열 같은 불안을 한국 사회 정체성 문제의 고리를 푸는 ‘푸앙카레의 가설’( Poincar's Conjecture)로 삼는다.

권소원의 <평균여성>은 오형근의 중간인처럼 평균여성에 내재된 균열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평균여성의 정체성을 세간의 ‘여성’의 전형으로 그려내는 시도를 한다.  

80년대 민중미술에서는 작품과 작가의 정체성은 운동에서 나온다. 그 안에 작가는 없다. 작가적 정체성은 운동에 몸을 바친 예술가의 이타성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타성은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적 추진축이었다. 제대로 살아보기 위한 움직임의 씨앗이었다.

“애매한 나이와, 원하지 않는 고교교사이거나, 무직인 대졸 예술가들만이 드나 들 수 있는 여러 장소의....지극히 자의적인 해석들로 시작된 불만의 소리였으므로, 햄릿과 김재규를 동일시 한다거나 ‘게릴라 미학’이라는 식의 70년대 재야인사들의 유행어를 반복해 외친다든가 하는 가장 상투적인 예술가의 관습에서 비롯된 자극적인 전시형태들이 학생들의 시위와 동격으로 이해되고 있었다.”(최민화) 

이들과는 다르지만 소위 민족기록화에서도 개인은 보이지 않는다. 작품의 주체는 국가거나 민족인데 민족기록화에서 민족은 국가의 역사에 속한 국민일반을 가르킨다. 민족기록화 작품을 그린 작가들도 이타적 행위를 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사람이 아니라 국가권력에만 이롭게 하는 것이므로 이타적인 것이 아니다.

“경제번영 민족기록화는 1970년대 초기의 우리 기간산업에 대한 경제발전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 당시 참여했던 많은 작가들이 오늘날 우리 미술계의 원로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고 계시듯, 이제 우리 산업도 초기의 어려움을 벗어나 눈부신 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경제발전을 담은 기록화 도록을 재발간하며,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2)

당시 민중미술 작가들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국가와 사회의 비인륜성이다. 이들 예술가들의 자아 정체성을 감싸며 떠도는 문화는 ‘비판적 인식’의 에토스인 ‘미적 문화’이다.

미적 문화는 이타성의 결핍에 예민한 후각을 가진 공론적 주체의  문화이다. 이렇게 다양한 인지 전제들 간의, 모든 정체성들 간의 새로운 이타적 관계형성은 결국 미적 케이스 컨퍼런스(Case Conference)에 내맡겨질 수 밖에 없다. 그래야 공론적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숱한 정체성의 가치(기호)가 경험적으로 볼 때, 표리부동하다면, 정체성의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결합이 임의적이라면, 그래서 사이비(Pseudo, Fake) 라면, 이타적 관계를 새로이 터나가는 길은 ‘장소성’(특수성)의 상호공감 문제와 직결된다. 특수성에 대한 보편성을 확보하는 일에 달려있다. 모든 정체성에 제대로 사는 방법에 길을 터주는 모든 역사와 문화에 대한 케이스 컨퍼런스 공유가 필요하다.

일찍이 이건용은 로지칼 이벤트 <장소의 논리>에서 “몸이 움직임에 따라 관계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며 최종적으로 ‘어디’를 반복 외침으로서 장의 논리를 교란 내지 증폭시켜 자문하게끔 한 작품‘들을 했다. 그가 이때 정체성의 케이스 컨퍼런스를 위한 인식전제들을 따져본 것이라면, 이미 숱한 작가들의 스터디는 지속돼왔고, 그럼에도 지금도 여전히, 작가들은 제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기다린다.

양혜규의 <세 개의 목소리>나 노재운의 <목련아 목련아>,  문경원 전준호의 <미지에서 온 소식> 프로젝트도 이 계보에 속한 실험들이다. 일종의 케이스 컨퍼런스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은 각자 부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목련존자 목건련, 그리고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 자신의 정체성을 얹어보고 ‘제대로 사는 세계’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동굴을 파보고 있다.  

“왜 이 많은 관계들이 비대칭적인 구조 안에서 자라나는가. ...

같은 적막이지만 다치기 쉬운 적막이 있다

나는 바로 이 잠재적인 소리가 포함된 다치기 쉬운 상태를 구한다.“(양혜규, <세 개의 목소리> 중에서)


“마음 속 지옥의 스크린에는

무엇이 형성되나,

실시간으로

산자의 백골들

굶어 죽은 사람들

쉰호흡으로 자식을 돌려보내는 어머니

침을 삼키는 독수리 앞에서 손을 흔드시네“(노재운 전시글)


정체성은 결국 ‘비전설계’에서 나온다.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뜻은 모두가 제대로 살아볼 수 있는 이념을 의미할진데, 친일파이든 빨치산이었든, 남한의 상이군인이든 북한의 상이군인이든, 대기업 이사이든 강남좌파이든 시간강사이든, 소년가장이든 미혼모이든, 히피이든 범죄자이든 교회를 상속받은 목사로 교수이든 누구나가 따로 또 같이 살면서 그려내는 아름다운 비전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계속 그려볼 수 밖에 없는 것일 수 도 있다. 이후에 새삼 내 뿌리가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해 고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014. 10. 월간미술 연재2)  



댓글 '2'

발뒤꿈치

2015.07.16 21:44:06

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비전설계' (vision planning인 것 같은데 처음에는 '비 전설계'인가 했습니다.) 를 제대로 된 삶의 본질로 주장하고 있는데 거기서 '비전'은 뭡니까? 뒤에 보면 모두가 각자의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 묘사되고 있는데 글 전체적으로는 개인적인 문제만 보는걸 비판하고 거시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것을 비전이라고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쾌활림

2018.06.22 13:24:15

댓글을 지금 봤네요.. 3년전.. 제 글에는 전혀 댓글이 달리지 않았기에.. 댓글이 달렸으리라 전혀 생각못했는데.. 죄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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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수선전도(修善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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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에도 ‘수선전도’가 존재한다. 내 마음이 느끼는 서울의 전체상인데 내가 느낀 서울의 심경상(像), 그 바닥이자 하늘이다. 원래 ‘수선전도’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한 나라의 ‘수도(首都)’의 의미는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하는 일 곧 수선(修善)의 시작점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수선전도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기관들이 국심(國心)의 세력중심으로 재현돼있다. 오늘날의 광화문 부근 영역이 정부청사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등이 들어서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상징하듯...

_‘퍼블릭 아트’는 동어반복적 개념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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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예술과 퍼블릭(Public Art) 아트 개념> 1 광장   광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광장에서 함께했던 낯선 사람들과의 뜨거운 연대감이다. 광장에 서면 일상 속 불만과 갈등이 내일을 위한 희망으로 바뀌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느낌의 순간에 내 옆 어느 낯선 사람도 내 마음에 동참해주고 있다는 벅찬 뜨거움이 올라온다. 굳이 촛불집회같은 광장에서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어디인가 누구나가 갈 수 있고 자유롭게 주변을 누리고 공중의 특별한 간섭없이 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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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종현실   제1의 리얼리티가 있다. 제1의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를 숙주로 한 기생 리얼리티와 그 변종을 무한증식한다. 리얼리티가 무한증식하는 줄기는 의식상에서의 범주에서이다. 그리고 숙주리얼리티 변종들 바이러스는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항상성을 지녀서 겉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것은 제1의 리얼리티가 개인이 해체, 파괴할 수 없는 구조로서의 ‘현실 겉면’이기에, 철의 장막이기에 무한증식하는 숙주 리얼리티는 의식 바탕 저 아래 깊이로 밖에는 변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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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미술 4월호 연재 글(그간 반년 가량 개인사정으로 중단 했다가 다시 시작)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1. 맥 컴퓨터와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한 텍스트나 이미지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호환을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연결해야 한다. 호환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단은 결국 상품으로 구입해야 한다. 구글 시트(Google Sheets)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 워드로 쓴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호환이 안 되면 텍스트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 작업들을 메일로 전송하고자 ...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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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월간미술 연재13) 1 이 세상에 실제하는 공론의 양대 축, 공론이 그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원천은 제도와 인간이다. 세상의 저간에 떠도는 갖가지 공론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그들 모두 간의 삶의 느낌에서 나온다. 이런 가지가지 개인감정과 이해(理解)의 시선들이 실제로 모아져 일정하게 객관화된 것이, 결국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정착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제도의 정신으로, 관련된 법으로 움직여진다.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행위가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예측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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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의 미학   1 미술가가 자신이 직접 본 광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동, 서양 모두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였다. 미술가는 이즈음부터 자신이 본 생활상의 장면에 자신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듬뿍 담아 일정한 틀 속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보다 더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사회경관 대부분의 광경들은 작가 주변의 일상생활 아니면, 사회 밑바닥 층의 헐벗고 남루하고 그럴 수 없이 가난한 삶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자연스레 인생에 회의가 들고 인생의 고통 전반에 생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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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 공공성, 제도의 영혼   1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 악행(惡行)이나 악덕(惡德)을 묘사하는 숱한 어휘들도 생겨났다. ‘흉악하다’, ‘수전노 같다’, ‘냉혈한이다’ 같은 표현들과 ‘악덕 군주’, ‘악덕 자본가’, ‘악덕 계모’, ‘모리배’, ‘간신’ 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악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인간언어의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덕한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악덕에 관련된 형용어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라도 간절히 기...

메타포, 정원, 공공영역 file

  • 쾌활림
  • 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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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 정원(庭園). 공공영역   1   우주의 역사, 자연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역사는 뇌의 생리 속으로 자신의 역사, 그 시간 속 공간 속 축적된 의미들을 전달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 생활의 고통의 역사는 예민한 신경의 공감적 능력에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다. 자연이 삼킨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 개체가 행한 생의 무리수, 공포와 착종된 비전을 그려낸다. 그래서 자연이 종국에서 드러내는 생활상의 과거, 산화(散華)된 경험의 소리와 냄새, 빛과 감각의 모든 스펙트럼을 얼마...

자연의 우울_사실성의 우울 file

  • 쾌활림
  •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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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이 합법칙적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된 관내(管內) 학문, 곧 근대과학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문범주에서‘자연’으로 범주화된 세계는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자연’도 분명 존재한다. 곧 인간의 ‘생활세계’로 근대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세계를 자원으로해‘인류 발전’이라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인류생활로서의 세계이다. 사실상 개인이 몸담고 있는, 개인에 관여되어 있는‘자연세계’는‘자연’으로서의‘생활세계’이다. 과학 연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세계는 추상적인 ...

전통_효과의 사다리, 무의미의 의미 file

  • 쾌활림
  • 2015-09-27
  • 조회 수 1439

1.   아프리카 해안가 어디에선가 부터 해협을 건너고, 지구 표면을 따라 방랑하기 시작한 인류의 족적, 이 발자취를 인류사의 시작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전통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다. 지구 위를 방랑하다가 삶의 터전을 세우고 발 길 닿는데까지 영토화한 일도 흔히 역사라고 불려지지만 ‘전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전통을 세운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딘가로부터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석기, 철기 시대를 열고, 삼한과 백제, 신라, 고구려를 세운 일도 역사이고,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생활의 전...

자기만의 세계상 file

  • 쾌활림
  • 2015-07-29
  • 조회 수 1219

자기만의 세계상 _  새로운 체험의 초현실 1. 누구나 한번 쯤은 살면서 권태롭기까지 했던, 아귀다툼 같았던 일상이 지상의 행복이구나 하며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의 일상이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이 반복되는 생활리듬에서 나왔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별별 이유와 고통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벼터내는 것은 나날의 생계(生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목격하고 체험한, 피해 입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세상...

제대로 사는 삶의 문제 file [2]

  • 쾌활림
  • 2015-07-03
  • 조회 수 455

1 인류는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아주 오랜 물음, 문명이라는 이름의 물음에 이끌려 살아왔다. 인간의 문명 특히 서구문명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할 까닭이 없는, 이런 물음을 갖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운 생명으로 여기지 않아왔다. 제대로 사는 것이, 궁극에서 보면 사회의 공적 영역, 그 부산함에, 시끌벅적한 부(富)와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노동, 사업과 인간관계, 인정과 평가의 사회생활에 크든 작든 자신의 능력으로 끼어들어 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

예술과 생활2 file

  • 쾌활림
  • 2015-05-28
  • 조회 수 374

김성룡천일야화 프로젝트   1. 역사는 거창한 비전과 계획이 이룬 삶이 아니다.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구성원들 일부가 대량살상으로 인해 혹여 절멸 된다고 해도, 나머지 개인들이 비참한 생활로나마 생존할 수 있다면, 역사는 생존자들의 핍진한 이해관계의 긴장으로 무장돼 미래만 바라보며 나가게 된다. 굶주림과 학대가, 살상과 모반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은 새벽위로 떠올라 밤사이로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일상에서 몇몇 극소수 개인들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도 기획하고 생의 미화도 만끽하면서 ...

미학이란 무엇인가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330

 1 일반적으로 '미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조금은 그 뜻을 막연해한다. 그래도 '미에 대한 학문'이니까 예술에 관한 전문지식체계를 다루거나 미용 등 구체적인 생활분야에서 무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과 관련될 때 미학을 언급한다는 정도는 알 수 가 있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의 미학 이해는 틀리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미학'은 얼핏 대하기 만만치 않은 아우라와 수수께끼로 가득 차 보인다. 통념이 과연 맞는 것인가 반신반의 하게 된다. 한편 미학에 대한 통념이 미학에서 실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91

1 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

인문학의 정치,미술의 정치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555

이인철/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논쟁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말하자면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참여예술을 주장하는 작가는 보통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라고 추정, 분류되면서 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 보듯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순수냐 참여냐의 예술적 선택에서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예술적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온시하면서‘정치적 미술’로 문제시 한 것이다. 실제 정...

사회시스템과 미술1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26

서용선<단종복위모의>   최경태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활로를 얻기 위해 움직인다. ‘생활’(生活)에 나서야 나날의 일상과 자신의 생애가 보장되고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태어나자 마자 생활에 나서지는 못한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경험해야한다. 경험을 위해 배워야한다. 초기 인류라면 생활을 위해 무작정 걸으면서 보고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역사 시대 접어들면서는 생활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배워야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체계(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가 경험하고...

경험과 판단의 아카이브_필요하지만 없는 것에 대한 단상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247

  조양규 <31번 창고> * 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