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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안교육 전문지 격월간 <민들레> 10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그게 이슈가 되는가

<인천 콘크리트 바닥 백골 시신, '20 여성 알몸' 추정>, 얼마 기사를 읽으며 그동안 수없이 죽어간 익명의 여성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라고 생각했다. 26 전에 지어진 건물, 옷도 소지품도 없이 백골로 나타난 20 여성의 시신(기사는 알몸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시신에 대해 밝혀진 정보가 없다. 이름도 모르는 여성이 건물 바닥에 백골로 묻혀있는 사건은 하나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여성의 죽음은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과 문화의 밑바닥에 익명으로 깔려있다. 여성 학대를 구조로 삼아 버티고 있는 사회. 여성의 인권을 짓밟고 서있는 인간 권리. 우연히 뉴스를 공교롭게 다른 살인사건 소식을 접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정확히는 여성 살인 사건이다.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칼을 품고 기다리다가 여섯 명의 남성을 보낸 처음으로 들어온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했다고 말했다. 사건의 정황, 가해자의 , 모두 여성 정확하게 향하고 있다.  사건에 대해 여성 혐오 주제로 다루는 기사와 칼럼에는 이게 이슈가 되는가,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유난을 떠는가라는 댓글이 달린다. 죽어서도 트렁크녀, 가방녀 등으로 불리는 수많은 이름 모를 여성들의 죽음이 일상이라 여성’ ‘살해 집단적으로 둔감해졌다. 강간 문화라는 말이 있듯이, 여성 살해 인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항상 있는 일에 유난을 떠느냐고? 바로 그대로 항상 있는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한국에선 3일에 명의 여성이 친분 있는 남성(남편이나 애인, 헤어진 연인 )에게 살해당한다는 사실은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목소리를 냈으나 듣지 않던 사회는 이번에 강남역을 거점으로 조직적인 추모가 이어지자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강남묻지마 살인에 위축된 남성들(국민일보) 보도하는 언론처럼 여성 살해의 심각성보다 남성의 불쾌감을 충실히 전달하는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남성 혐오 걱정하는 언론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에 대한 무시 어떻게 규범화되는지 똑똑히 보인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강남역 살해 사건은 여성 혐오 사건의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번지고 있는 논란은 점점 사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 혐오를 숨기고 남성 혐오 걱정하는 사회가 얼마나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여성의 언어를 제압하는지 분명하게 응시해야 한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는 가해자의 말을 언론은 일제히 사건의 제목에 넣었다.  제목에는 개의 목소리가 중첩되어 있다. 일단은 가해자의 목소리,  다음은 말을 전달하는 언론의 목소리다. 가해자는 조현병 환자이며 그가 스스로 범행 동기라고 밝힌 내용은 진실 아닌 핑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다른 진실은 그가 그러한 핑계 끌어왔을까, 하는 점이다. 여자에게 무시당한 남자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영역이므로.

femicide.png



남성 혐오 잠재적 가해자

여성 혐오라는 선명한 단어를 들고 나와 남성들의 행동을 여성들이 명명하는 태도를 보이자 사회 곳곳에서 당황하고 있다. 혐오가 확산되고 있으며 갈등이 야기되고 있다는 걱정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Misogyny 단어를 한국에선 여성 혐오라고 번역해 사용하고 있지만 어쩌면 앞으로 논의를 거쳐 적합한 언어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언어 속에는 여성의 실제 경험을 설명할 틀이 부족하다. 일상어는 물론이고 사회과학적 언어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학술 논문 겉표지에 남자의 이름을 적었을 때와 여자의 이름을 적었을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한 결과 다른 반응이 나온 사례도 있다. 정말 논리적이라서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아니라 보편적으로 남자가 하는 논리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여성의 언어는 제거되고 여자들은 너무 감정적이라고 규정한다. 일단 여성들이 많이 말하고, 계속 말하고, 크게 말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제도적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퍼져나가기는 남성보다 훨씬 어렵다.

마땅히 필요한 분노 표출을 갈등이나 대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역시 악의적이다. 여성 혐오는 여성을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모든 태도와 문화를 일컫는다. 여성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거나 언어폭력을 사용해야만 혐오가 아니다.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저지하려는 언어  남성 혐오 잠재적 가해자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혐오라는 언어는 현재 심각하게 오남용 되고 있다. 혐오라는 개념을 단지 어떤 대상을 싫어한다 혹은 공격한다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혐오자라고 하면 펄쩍 사람들이 많다.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여성을 혐오한다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굳이 여성 혐오자라는 말이 불필요할 정도로 성차별주의를 공기처럼 마시며 살고 있다.

요즘 들어 여성 혐오가 심해졌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미 있었던 혐오의 표출이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여성혐오가 확산, 남녀갈등, 분열조장, 성대결, 잠재적 가해자, 남성을 일반화 모두 이상한 말이다. 여성혐오는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되었으며, 성차별에 대항하는 행동은 갈등이나 분열, 나아가 대결을 조장하지는 않는다. 인종차별에 저항한다고 이를 인종갈등이나 인종분열, 혹은 인종대결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잠재적 가해자는 여성의 과거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두 지워버리는 언어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 말은 성차별에 대해 전혀 인식이 없다는 고백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관습인 남아 선호부터 온갖 경조사, TV 예능 방송, 가정에서의 성역할, 광고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서 보이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직장 성희롱 , 성차별과 무관한 일상은 찾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은 현재의 착취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표현이다.

여성의 여성다움은 대부분 무시당해도 가만히 있는 성질로 대표된다. 이를 다소곳한, 참한, 청순한, 얌전한 등의 형용사가 대체하고 있다. 성희롱 앞에서도 여성들은 가해자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남자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졌다. 여성의 일상에서 남자에 대한 무시라고 규정되는 상황은 없이 많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 기가 세고, 설치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여자가 된다. 가해자의 무시해서라는 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린다. 여성들의 행동에는 도를 넘는이나 지나친이라는 말이 곧잘 붙어 다니며 말과 행동이 일상적으로 제약받는다. 그렇기에 공개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툭하면 페미-나치라는 소리를 듣는다. 페미-나치는 저항의 언어를 뒤집어서 되려 저항하는 자를 가해자 만드는 대표적인 언어다. 언어가 없었던 이들이 언어를 가지려고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존재가 설치면 이를 아주 쉽게 폭력이나 공격, 혐오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진보 정당의 게시판에서 페미-나치라는 말이 여성들을 공격하기 위해 등장해도 이는 사회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롱당하는 저항, 무시와 무지 속에서 목소리 자체가 소거당하고 있지만 올바른 목소리 허락하겠다는 올바른 사람들의 진보 대부분 여성의 삶과 무관한 진보다.

존중과 관계

언어의 재개념화는 절실하다. 광복절은 위안부 피해자에게는 광복 무관한 날이다. 8 15 광복절 즈음 광복절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에요. 우리는 해방되지 않았어요.라는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TV에서 듣던 나는 새삼스럽게 충격받았다. 일제에서 해방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었다. 위안부 피해자에게 일제 끝나지 않았다. 공식적 해방과 무관한 이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 이것이 바로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생각할 있는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사건을 통해, 자신이 있는 위치를 계속 인식하고 배워가야 한다.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의 극단에는 바로 여성 살해가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일부 언론은 제목에 강남 유흥가에서 사건이 벌어졌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미성년자도 들어갈 있는 대중적인 장소였건만 마치 새벽 1 유흥가를 떠돌던 젊은 여성의 탓이라는 어감이 담겨있다. 여성을 죽이는 이유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개인 사정에 따라 꾸준히 발명된다. 여성이 느끼는 공포는 바로 지점에 있다. 내가 조심하든 하든, 내가 어디에 있든, 죽을 있다는 공포. 편안할 () 집에 있는 여성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집에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편하다는 의미다. 존중받지 못한다면 여성에게 안전한 장소는 없다.

작년 미국판 『맥심』 잡지의 11월호에는 프랑스 배우 레아 세이두가 표지에 등장했다. 세이두는 여자를 존중할 아는 남자가 좋다 말했다. 존중,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기본적인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 보니 여성을 존중할 줄만 알아도 특별한 남성이 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중은 종종 사회적으로 무시당한다. 남성연대 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부추긴다. 여성들과 친하고 보편적인 남성다움에서 벗어난 남성들을 기생오라비라고 하거나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을 굳이 애처가 공처가라고 한다. 현모양처에 대응하는 현부양부라는 말은 없다. 남성다움에는 여성에 대한 지배가 포함되어 있기에 아내를 존중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인간으로 남성연대에서 탈락시키려고 한다.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기 어렵고,  존중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가부장제 속에서 부부는 동반자 관계(partneship) 아니라 소유 관계(ownership) 가깝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자존감을 낮게 만들고, 여성이 남성에게 의지하도록 이끌고, 여성에 대한 보호와 통제를 자연스러운 규범으로 정착시킨다.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는 그렇게 탄탄히 유지되고 있으며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동성애 혐오는 여성혐오와 더불어 필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가 넓은 의미의 약자와 소수자를 존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할 권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이는 그동안 특권 누려왔다는 뜻이다. 조심과 불편은 분배되지 않았고 안전은 특권화 되었다. 이번 강남역 사건에서 보듯이 어디, 여자가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말은 여성 살해로까지 고리가 이어졌다. 언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싸워야 하는 이유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익명으로 사라진 수많은 무슨녀들의 원통한 연대할 있는 방법이다.


댓글 '1'

소년의노래

2016.06.06 02:35:28

-존중,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켜져야하는 것인데 이 기본적인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 보니 여성을 존중할 줄만 알아도 특별한 남성이 된다.-

심히 공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여성 존중'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져서요. 그럼 반대 개념은 뭘까요? 마치 '존중'이 선택의 영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여성의 인권을 존중해줄 줄 아는 깨어있는 남성'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현실.

제발 '진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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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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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성옹지소록>에서 아버지 초당 허엽의 스승인 화담 서경석의 일화를 소개한다. “아버님께서는 화담 선생에게 가장 오래 배우셨다. 일찌기 칠월에 선생의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가 화담 농막으로 간 지 벌써 엿새째라고 했다. 곧 뒤따라 갔었는데 가을 장마로 물이 한창 넘쳐나서 건널 수가 없었다. 저녁 때 여울물이 조금 줄었으므로 겨우 건너가셨더니, 선생은 한창 거문고를 타면서 높게 읆조리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저녁밥 짓기를 청하자, 선생은 “나도 먹지 않았으니 함께 짓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머슴이 부엌...

여성 혐오, 그 개념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 file [1]

  • 2016-06-06
  • 조회 수 1086

대안교육 전문지 격월간 <민들레> 10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그게 왜 이슈가 되는가 <인천 콘크리트 바닥 속 백골 시신, '20대 여성 알몸' 추정>, 얼마 전 이 기사를 읽으며 그동안 수없이 죽어간 익명의 여성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라고 생각했다. 26년 전에 지어진 건물, 옷도 소지품도 없이 백골로 나타난 20대 여성의 시신(기사는 ‘알몸’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이 시신에 대해 밝혀진 정보가 없다. 이름도 모르는 한 여성이 건물 바닥에 백골로 묻혀있는 사건은 하나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여성의 죽음은 인간이 쌓...

마지막 상영 file

  • 201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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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83045 그 이름이라도 한 번 불러줘야 도리일 것 같다. ‘신영극장’. 2007년 폐관 후 2012년 다시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으로 문을 열였지만 나에게는 그냥 ‘신영극장’이다. 강릉에 있는 신영극장이 지난 2월 말에 ‘마지막 상영’을 하고 휴관을 했다고 한다. 너무 안타까운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현이라도 해야겠다. 나의 청소년기 극장 중 하나다. 극장은 신영극장, 서점은 단골서점, 강릉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

대통령 마음대로 file

  • 20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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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 한 학생에게서 인상적인 메일을 받은 적 있다. 그는 “고통을 상상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할 윤리적 의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졸업논문과 관련한 문의였으나 내가 그렇게 거대한 주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깜냥은 못 되기에 그냥 그의 생각을 듣고 공감하는 차원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그저 그의 고민 자체가 굉장히 반가웠다. 내 고통에 대한 생각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생각은 내게 (아직) 오지 않은 고통에 대한 치열한 상상이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상상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나와 무관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