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익숙한 것들을 뒤로 하고, 다시금 사유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게시판에서 나는 ‘독일’ 이야기를 하게 될 테지만, ‘독일’을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사회민주주의의 낙원도, 경제강국이라는 유토피아도, 그리고 ‘선진국의 문물을 배우고 전하는 유학생’도 이 공간엔 없다. 대신 (독일)사회의 ‘반대편’에 놓인 잡다한 것들을 다루는 사전, 기사, 보고서 등의 인용문들이 이 공간을 채우게 될 것이다. 사회의 풍경은 이 반사회적인 - 각각 asozial, unsozial, kontrasozial에 해당하는 - 것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베를린 유학생.
글 수 11
왜 좌파들이 지금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차벽을 넘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 갈아치우는 게 가장 큰 목적인 것마냥. 자본주의의 지배를 끝장은 못내더라도 적어도 의문에 붙이자고 좌파하는 거지 민주당으로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지금까지 좌파했나.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100만명이 나왔는데, 거기 1/10 채우자고 우리가 좌파하는 건가. 이 판은 좌파의 판이 아니지 않은가. 퇴진도, 탄핵도, 하야도 좌파가 주도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재벌들이 줄줄이 엮여 있는, 국민연금과 삼성이 걸려 있는 이 사건의 실체를 이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은가. 지배자들의 민낯을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내가 가난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내가 이렇게 죽도록 야근을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왜 그렇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하는지, 이사를 다닐 수록 집은 왜 작아만 지는지, 왜 공부를 하려는 내가 이렇게 알바만 살고 하고 있는지, 왜 빚만 가득한지, 왜 이렇게 부모님한테 죄송해 죽을 것 같았는지, 왜 이렇게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만 했었는지, 그게 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이 보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FTA와 싸우고, 반올림 투쟁을 하고, 밀양에서 싸우고, 부양의무제와 싸우고, 수많은 사업장에서 수많은 악덕 사장들과, 수많은 골목의 작은 가게들 앞에서 수많은 악덕 지주들과 용역깡패들과 싸웠던 것일까. 무엇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수도 없이 밟혀도 끊임없이 다시 고개를 들었던 것일까. 오늘 이 순간 때문이 아니었나. "박근혜가 위기에 처한" 오늘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저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기 시작한 오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가 싸우던 문제가 모든 이들의 문제와 다르지 않은 것임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한 오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다!"같은 말을 주문처럼 반복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귀담아 듣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이 싸움이 박근혜 하나 몰아내자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계속 말해야 하지 않는가. 청와대로 가는 싸움에 앞장 서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이 얼마나 넓은 싸움인지를, 하지만 이길 수 있는 싸움인지를 계속 말해야 할 책임이 좌파들에게 있지 않은가. 왜 청와대로 가자고만 하는가. 청와대로 가자고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이 때에 왜 우리도 청와대로 가자고 해야 하는가. 왜 싸움을 넓히려 하지 않는가.
모든 곳에서 말하고 다녀야 할 때가 아닌가. 가난한 건 우리 잘못이 아니었다고. 행복하지 못했던 건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었다고. 재벌들 세금을 깎아주고, 복지를 포기했어도, 일자리도, 경제성장도,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도 늘어나지 않았다고. 그냥 저들이 다 가져갔을 뿐이라고. 광장에 백만이 모이는 이 때, 광장이 아닌 곳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조직하고, 그 곳의 싸움을 백만의 싸움과 이어야 할 때가 아닌가. 왜 목적지가 고작 청와대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