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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요즘 한국 사회는 거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아노미의 원인은 다름 아닌 시장 민주주의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장의 진리를 침해하지 않는 조건에서 모든 것은 평등하다는 이념이 시장 민주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시장의 교환에서 모든 사물이 평등하다는 이런 전제는 교환 불가능한 것들, 가령 '무엇을 위해'라는 정치적 대의는 쓸모없거나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서 폐기하거나 배제해버린다. 이 상태가 모든 가치를 상대주의에 빠트리게 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세계 없음’의 상태가 이처럼 적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세계 없음’은 단순한 상실감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경험 이외에 그 무엇도 이 세계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무엇을 위해’라는 정치적 대의가 소멸한 세계에서 오직 남은 것은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이다. 물론 이 생존경쟁은 사회를 자연환경과 동일시하는 특정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런 경쟁주의적 태도를 낳은 이념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이와 같은 반발 중 하나일 것이다. 단도직입해 말한다면, 국정화는 핑계일 뿐, 사실상 민주화 과정에서 홀대 받아온 경제개발세대의 세계관을 추인시키겠다는 인정투쟁이 국정화 논쟁의 본질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시장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시장에서 인정 받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 시장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한편으로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모순적인 주장이지만 사실상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검정제도라는 시장주의의 실패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국정제도를 제시하는 셈이지만, 검정제도라고 해서 정부의 개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정화가 기존의 제도에 정면으로 배치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정부의 개입에 대해 시장이라는 ‘진리’를 옹호하는 것이 적절한 대립각인데, 이런 의미에서 국정화 반대의 대안이 검정제도의 유지가 아니라 자유발행제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나마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시장주의를 위반하는 자칭 자유주의자들에게 더 강력하고 절대적인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정부의 ‘역주행’에 대한 근본적 대책일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질문하자면, 과연 동서양을 통틀어 역사적으로 어떤 정부가 문자 그대로 완전한 시장의 자유를 실현한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역사는 우리에게 시장의 실패마다 개입했던 정부에 대한 이율배반의 사례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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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딜레마를 아이유 논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취향의 차이에 따른 선택이라는 시장주의 원칙은 한 출판사의 문제제기로 너무도 쉽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누구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대변하고 지지해야 할 출판사가 특정한 문학작품의 등장인물에 대한 아이유의 해석을 문제 삼았다는 사실은 교과서 검정제도에 문제제기하는 시장자유주의자의 모순을 다시 환기시켰다. “표현의 자유도 대중의 공감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출판사의 발언과 “학문도 너무 자율은 안된다”는 여당 대표의 발언은 단어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말이다. 왜 이런 자가당착이 발생하는 것일까. 냉정히 말해서, 아이유 논란도 겉으로 보기에는 표현의 자유를 축으로 한 갑론을박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각자가 염두에 두는 시장의 진리에 대한 ‘해석’을 주장한 것에 불과했다. 아이유의 노래에 대해 음원폐지운동이 벌어지는 것이나, 대중음악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취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시장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는 입장은 동일하다. 전자가 불량식품을 근절하기 위해 소비자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후자는 불량식품을 사먹는 것도 하나의 취향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시장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두 입장 모두 자유를 허락하거나 규제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시장의 선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표현의 자유 자체를 규범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표현의 자유에게 규범을 부여하는 기준은 다른 무엇도 아닌 시장의 진리이다. 이들 모두에게 시장은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허락하고 제한할 것인지 결정하는 척도인 것처럼 보인다. 건강한 시장을 위해 불량식품을 유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나, 불량식품의 유통을 강제적으로 막으면 시장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동전의 양면 같은 주장이다. 이 지점에서 제기되어야할 본질적인 질문은 어떤 특정한 식품을 '불량'이라고 진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지, 불량식품의 유통을 허용하느냐 마느냐 여부가 아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등장하는 '제제'라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유의 해석이 '소아성애'라는 주장이 있었고, 이런 의혹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아이유 본인이 스스로 해명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견을 굽히지 않고 아이유의 노래를 유통시키지 말아야한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는 아이유의 해석이었다기보다, 특정한 상품을 '불량'으로 받아들인 소비자의 불만이었던 것이다. 주장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 역시 이런 불만을 타인의 취향에 대한 간섭으로 간주해 시장 다양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규범화의 덫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논란의 쳇바퀴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확대되려면 이렇게 토론의 공간 자체를 폐색해버리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편가르기에 바쁜 규범화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야하지 않았을까.

시장 민주주의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 우리 사회에서 시장은 이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구분하는 규범의 척도가 되었다. 규범화는 시장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어떤 사물이 성공적인 상품이 되려면 반드시 규범화와 같이 가야한다. 생수라는 상품이 등장하면서 수도물을 마시는 것은 어딘가 촌스럽거나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규범화의 효과이다. 교환가치가 사용가치화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상품은 홀로 무대에 서지 않는다". 상품이 시장에 나가려면 법이라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이 법이 곧 규범화의 물질성인 것이다.  지금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규범화의 덫이다. 규범화는 특정한 입장이나 태도만을 정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규범화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구분을 만들어내는 프레임이다.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비정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유의 앨범을 두고 ‘소아성애’의 혐의를 덧씌우면서 ‘비정상’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규범화에 따른 결과이다.  규범화는 사유를 가로막기 위한 권력의 기동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이 권력은 이미 수립되어서 위에서 아래로 작동하는 것이라기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각자도생하는 ‘세계 없음’이 만들어낸 진풍경들이지만, 이 또한 대타자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규범이라는 금지를 발명해내야하는 소비자 주체의 운명인 셈이다. 이 욕망의 악무한을 끊어내는 용기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이다.


* 이 글은 2015년 11월 12일자 경향신문 칼럼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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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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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촛불, 두 개의 공화국 fil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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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트럼프 현상을 다시 생각하자 [2]

  • 20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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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인’의 타락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가치’를 만들어낸 전후 자유주의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적인 배경으로 인해 트럼프 정권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미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는 미디어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어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기층의 불만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경악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만큼 미국답지 않은 선택이라는 뜻일 ...

거기 '내가 있었다': 소셜미디어와 체감의 정치 file [1]

  • 201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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