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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성을 연기하기

조회 수 1510 추천 수 0 2015.03.27 03:16:09


 지난 주말 파리 근교에서 ‘국제여성영화제’가 있었다. 해마다 이 즈음이면 열리고 올해로 37번째다. 여성이 제작하고, 감독하고, 여성에 대한 주제로 가득한 이런 영화제를 보면서 왜 ‘남성영화제’는 없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여성부는 있는데 남성부는 없으니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여학생회, 여직원 휴게실, 여성할당제처럼 ‘여성’의 이름으로 호출되는 자리가 많다는 건 ‘특혜’가 아니라, 그만큼 일상에서 여성의 자리가 협소하다는 뜻이다. “헐리우드에서 여자로 사는 건 힘들다”는 리즈 위더스푼의 말대로 영화계에서도 여성의 위치는 제한적이다.

 

미국 샌 디에고 대학의 ‘TV와 영화에서의 여성 연구소’에서 해마다 흥행 수익 순으로 250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여성의 참여 정도를 조사하고 있다. 2012년에는 이중 9%가 여성감독의 영화였으며 2013년에는 6%였다.1) 여성감독은 드물고 ‘영화감독’의 이미지는 주로 남성을 떠올리게 한다. 2011년 8월 미국의 영화주간지 The Hollywood Reporter는 안젤리나 졸리와 제니퍼 여 넬슨 감독을 ‘The (Female) Directors’로 표지에 소개했다. 실제로 여성은 괄호 속에 있다. 2010년 캐서린 비글로우가 오스카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것이 82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감독의 오스카 수상이었다.

 

이는 단지 여성이 감독에 덜 지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헐리우드에도 여성이 큰 예산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편견이 팽배하여 여성제작자와 여성감독이 ‘되기’ 어려운 현실이다. 헐리우드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은 이미 여러 번 논쟁이 되었고 올해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페트리샤 아퀘트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주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헐리우드만의 문제도 아니고 영화계만의 문제도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중년의 여성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를 찾기 힘들다. 신뢰와 전문성은 주로 중년남성이 움켜쥔 이미지다. 여성에게는 전문성보다 ‘젊고 예쁜 외모’가 더 중요하다.

 

스크린 속의 세계도 이미 ‘남성연대’로 가득하다. 오죽하면 벡델 테스트(Bechdel Test)가 있을까. 영화 속에서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두 명 이상 등장하는가, 그들이 대화를 하는가, 그들의 대화 내용이 남자 주인공과 관련되지 않은 다른 주제인가. 단순히 이 세가지를 영화에 적용해 보면 통과할 수 있는 영화가 별로 없다. 많은 여성 인물이 남자 주인공의 엄마이거나 애인(아내)으로 등장한다. <레지던트 이블>과 <아바타>에 출연했던 미셸 로드리게즈는 “나는 누군가의 애인이 아니다”라며 여배우 역할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2011년 소르본느 대학에서 주최한 ‘줄리 델피와의 만남’자리에서 줄리 델피는 헐리우드가 여배우에게 요구하는 온갖 ‘섹시’타령에 넌덜머리를 냈다. 사람(남자)의 애인, 사람(남자)의 엄마가 아니라 제 삶을 사는 한 사람의 역할을 갈망하는 여배우의 목소리는 곳곳에 있다.

 

문소리의 감독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단편 영화 <여배우>(2014)를 보았다. 여배우는 ‘연기력보다는 매력’이 중요하다며 여배우의 외모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꼬집는다. 게다가 더 이상 젊지 않은 여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누가 해도 별 차이 없는 엄마 역할이다 보니 “애가 대학생만 아니면 되요”라고 사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중 문소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결국 애가 대학생인 엄마였다.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여배우가 애가 대학생인 역할을 마다하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정도로 여배우의 역할 빈곤을 보여준다. 이 짧은 영화에서 무엇보다 통쾌한 장면은 술 한잔 들어간 ‘아저씨’들의 모습이다. 어찌나 현실적인지 혼자 마구 웃음을 터뜨리면서 봤다.

 

실제 여성의 삶은 (아주 당연하게도) 얼마나 입체적인가.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재현되는 여성의 모습은 상당히 평면적이다. 대부분 인형 같은 외모로 매력을 뿜어내며 남성 주인공의 보조 역할을 한다. 여배우에 대한 평가는 외모 품평이 주류다. <여배우>에서 문소리와 함께 술을 마시는 남자들은 계속 문소리의 외모만 뜯어 본다. 고쳤냐, 안 고쳤냐, 실물이 더 예쁘다, 자기 부인이 더 예쁘다, 자기관리 너무 안 하는 거 아니냐…… “이야~ 여배우랑 술을 다 마셔보고~”라며 흥분하는 이들에게 여배우는 예쁜 인형이고 함께 술 마시면 술 맛 돋는 유흥의 보조자다. 화면 뒤쪽에는 아름다운 여배우가 주류 광고를 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심재명이 제작하고 부지영이 감독한 <카트>처럼 제 삶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이 대거 등장하는 영화는 얼마나 귀한가. “반찬값이나 벌러 나온 여사님”이 아니라 “저 생활비 벌러 나와요”라고 분명하게 들려주는 그 여성의 목소리. 여배우는 이렇게 인격이 있는 인간의 삶을 연기하기보다 수동적이고 비참한 피해자이거나 몸을 보여주는 장식물로 등장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이를 문제제기 하면 오히려 ‘영화는 그냥 영화로 보면 되지 뭐 그런 것까지 따지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세계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여배우가 직접 묘사한 여배우에 대한 영화는 두 손 들고 환영할 만 하다. 문소리처럼 ‘안 고친 여배우’도 좋지만, ‘고쳤는데 어쩌라구? 안 예쁘면 또 안 예쁘다고 깔거잖아!’라고 외치는 여배우의 모습도 통쾌할 듯 하다. 외모 품평의 그 이중성에 대해, 여성의 ‘스펙’이 외모에 머무르는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 대해, 통념적 여성성의 극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여배우들이 그 통념적인 모습에 반발하는 목소리를 더 많이 들려줬으면 한다. 문소리가 이 여배우 이야기로 다시 장편을 만든다면 정말 기대되지 않을까.

 

 1) Martha M. Lauzen, <The Celluloid Ceiling : Behind-the-Scenes Employment of Women in the Top 250 Films of 2013>, San Diego State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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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출출한데과자나

2017.10.22 20:49:49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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