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사진 : 한겨레 김명진 기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8년 동안 가수 조영남의 그림을 대신 그렸다고 한다. 이 화가는 그림 1점당 10만원의 대가를 받았다. 검찰은 사기 혐의로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을 조영남 자신이 그린 것처럼 속여서 전시하고 판매했다는 것이 검찰의 생각이다. 화투 시리즈가 대표적인 조영남의 작품 가격은 호당 50만원 정도다. 주로 팔리는 크기는 20~30호로 1000만~1500만원을 오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계 일부는 반발했다. 미학자 진중권은 <매일신문> 기고에서 “적어도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그리고 팝아트 이후 예술가가 작품에 ‘콘셉트’만 제공하고 실행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은 관행이 되었다”고 했다. 미술평론가 반이정은 블로그에 “미술계에 굳은 관행에 대해 외부에서 너무 몰라서 생긴 일이라고 본다”고 썼다. 진중권은 이어 문제 삼아야 할 건 10만원이라는 낮은 대가,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았다는 걸 미리 밝히지 않은 조영남의 윤리 의식이라고 했다. 다만 “외국에서도 조수를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본인이 사전에 밝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힌 검찰의 설명과 달리 ‘미리 밝혀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현대미술에서는 진중권과 반이정의 지적대로 콘셉트를 제공하는 창작과 실제 작품으로 재현하는 제작은 분리되어 있다. 핵심은 창작이지 제작이 아니다. 지금까지 관행이 그래 왔다면, 창작과 제작을 따로 했다는 사실만 두고 조영남에게 사기 혐의를 적용하거나 비판을 가하는 건 무리다. 게다가 미리 밝혀야 할 의무가 없다면 조영남의 윤리 의식을 문제 삼는 일도 정당한 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제작이라는 공이 가려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창작이 핵심일 뿐, 창작과 제작이 협업인 건 분명하다. 그림 제작 과정에 어느 정도의 공력과 시간이 투입됐는지 살펴봐야겠지만, 1점당 10만원이라는 대가가 적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검찰의 설명과 달리, 외국의 경우에도 미술품의 제작자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제작자가 원한다면 관행과 달리 작품에 제작자 표기를 논의해볼 수 있다. 이에 더해 조영남은 제작자에게 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옳다. 그런 논의가 이뤄지기 힘들기 때문에 제작자가 검찰을 찾았을 수 있지만, 애초부터 이 사건은 검찰이 수사에 나설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먼저 창작과 제작의 분리 관행이 이전부터 사회적으로 인지되고 있었는가 여부다. 예술계의 관행은 혹시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공유됐던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인터넷에 분노를 쏟아내는 정의로운 대중의 현대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과잉행동”이라고 대중을 비판했다. 대중이 이 사건에 공분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이름없는 ‘하청업자’들이 빈번하게 협업이나 관행을 빌미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생산에 들인 땀을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에 대한 무지”라는 이유를 달아 대중을 담론에서 가볍게 내치기보다, 검찰 수사를 비판하면서도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술계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지 않았을까. 관행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예술이 일상이 되기 어려운 이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아울러 지금까지 있어왔던 이 관행이 앞으로도 정당할 것인가 묻는 작업 역시 과제로 남아 있다. 관행이란 건 기준도 아니고 법칙도 아니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얼마든지 관행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제작자가 제작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길 원하지만, 창작자가 관행뿐만 아니라 문화 권력이나 도제적 시스템을 이용해 이 요구를 억누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약자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대체로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미약하나마 저항이란 걸 했다가 더 강하게 짓밟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제는 조영남이 아니다. 현대미술의 관행은 이제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준을 가질 수 있는가를 묻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미술계 내부의 은폐된 모순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해소를 위해 나서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 아닐까.
*<방송대학보>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