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소녀상

조회 수 1844 추천 수 0 2016.02.11 17:47:08

2016010802121_0.jpg

인간은 상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20세기 구조주의 인류학자들은 이런 ‘상징 행위’의 의미에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문화의 작동방식을 실증해서 보편이론을 만들고자 했다. 그만큼 상징은 보편적이고, 보편적인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론 문화에 따라서 상징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길조를 뜻하는 까치는 서양의 상징체계에서 보면 흉조이다.

상징의 문제는 상징물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성을 획득하는 순간, 다른 차원을 얻기도 한다. 상징물은 분명 추상적인 상징성을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상징물이 추상적 상징성 자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에 대한 추상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이것을 하나의 상징물로 표현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국기라는 상징물은 국가에 대한 여러 추상을 하나로 재현하는 것일 뿐이지, 그 모든 추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상징물은 국가에 대한 여지를 남긴다. 태극기는 분명 국가를 상징하지만, 그렇다고 국가의 상징성 자체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여지, 잃어버렸다고 여기지만, 결코 회수할 수 없는 이런 잔여물야말로 국가의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행정체계나 권력체제로서 국가를 상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의 대체보충으로 항상 민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민족은 바로 국가의 형성을 통해 만들어진, 그럼으로써 선험적인 것으로 떨어져나간 숭고한 대상이다.

민족의 상징은 복원할 수 없는 국가의 잔여이기에 숭고하다. 판타지는 주체성의 경계에서 자기 충족적이지만,그 외부에 숭고 대상을 가진다는 점에서 항상 불안하다. 이 대상은 때때로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실제로 그 역시 일시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대상은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다. 없기 때문에 있고, 있기 때문에 없다. 이 대상은 ‘그리고’를 매개로 사슬처럼 연결된다. “나를 사랑한다면~”이라는 요구는 특정한 대상을 받는 순간, 사랑의 추상성을 남긴다. 사랑은 충족할 수 없다. 마치 민족처럼. 그러므로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민족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렇기에 충족되지 않는다. 민족과 민족주의는 만나지 못한다. 이 만나지 못하는 사정이 결과적으로 사랑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도 이런 민족이라는 숭고 대상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협상으로 이 숭고 대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기는커녕 대상을 향해 흐르는 욕망은 점점 더 강해진다.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상함으로써 ‘해결책’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숭고 대상에게 ‘해결책’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민족은 존재했고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때가 오면 이렇게 제거된 민족을 복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민족주의적인 도착의 본질이다. 이 믿음의 중심에 바로 ‘소녀상’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소녀상’은 평상시에 숨어 있다가 ‘위안부 문제’가 법정으로 가게 되자 눈앞에 나타났다. 아마도 ‘소녀상’ 건립 이후로 이렇게 많은 여론의 관심이 ‘소녀상’에 쏠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정부가 ‘소녀상’ 철거를 ‘해결책’에 포함시킴으로써 ‘소녀상’은 돌연 하나의 기념물을 넘어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소녀상’을 둘러싼 대립은 팽팽한 것처럼 보인다. 일부는 이 ‘소녀상’이 ‘위안부’를 ‘소녀’로 표현했기 때문에 전형적인 민족주의의 통속성을 보여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2008년 ‘촛불소녀’의 사례처럼, 촛불집회에 참가한 ‘청소년’ 일반을 ‘소녀’로 묘사하는 환원주의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서 ‘소녀상’을 ‘촛불소녀’와 같은 형식논리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수이다. 이번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논쟁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났듯이, 사실상 지금 쟁점은 ‘위안부’가 국가적인 기획이었는지, 아니면 국가의 법망을 피해 일어난 개인적인 범죄였는지, 아니면 국가의 기획에 개인이 강요된 자발성을 발휘한 결과였는지 밝히는 지점에 있다. 만일 ‘위안부’의 의미가 ‘소녀상’으로 재현되는 순진한 소녀가 아니라 일정하게 보수를 받고자 했던 성인 여성일 경우에, ‘위안부 문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국가적 범죄이든, 개인의 일탈이든, ‘위안부’에 성인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소녀상’은 사안을 왜곡하는 잘못된 상징물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지금 현재 ‘소녀상’ 철거라는 문제가 쟁점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소녀상’은 분명 판타지의 산물이긴 하지만, 바로 그 판타지의 왜곡 자체에 진리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거짓’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상징물이다. 이른바 ‘학문’은 이런 판타지를 제거하고 말 그대로 실증적인 데이터로 환원한 역사를 기술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완전히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다면,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할 것인지 고민하는 문제가 남는다. 말하자면, 역사는 가치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녀상’의 상징성을 제거하고자 하는 이른바 ‘학문’의 시도는 무모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

박유하 교수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표현의 자유’ 또는 ‘학문의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유는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자유가 다른 자유에 비해 우선적이라거나 으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모든 자유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자유의 개념은 종종 현실에서 충돌한다. 이번 ‘소녀상’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면, 박유하 교수와 그 지지자들 역시 ‘소녀상’ 철거를 반대해야한다. 무한한 관용의 정신에 입각해서 보면, 이런 무차별적인 연대감은 분명 아름다운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위안부’와 관련한 ‘소녀상’ 문제는 ‘촛불소녀’의 경우와 다르다. 그 이유는 이 ‘소녀상’은 ‘위안부’ 전체를 재현한다기보다, 거기에서 자행된 국가범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녀상’은 소녀의 ‘순수성’을 보여준다기보다, ‘보편성’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위안부’는 여성이었고, 거기에 끌려간 이들 중에 소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박유하 교수의 주장처럼 일시적으로 제국의 논리를 수용하고 때로 적극적으로 그 의무에 복무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위안부’가 ‘소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의 처지에서 종종 탈민족주의는 서구중심주의의 변종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촌스러운 것’이고 탈민족주의는 ‘세련된 것’이라는 태도가 탈민족주의를 운위하는 사람들의 담론에 은연 중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태도는 우리가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하는 민족주의의 폐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효과를 낳는다. 민족주의를 ‘미개’로 간주하는 순간, 탈민족주의가 무의식적 인종주의로 전도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탈민족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파시즘적 전체주의’로 몰아붙이는 현상이 바로 이런 전도된 인종주의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한국이나 아랍국가처럼 민족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는 국가들은 ‘저열한’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는 ‘미개한 집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학자 임마누엘 월러스타인도 지적하듯이,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결코 ‘미개’의 산물이 아니다. 19세기 이래로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더불어, 역사적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해방적 담론’의 기능을 수행해왔다.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동일하게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것을 추동하는 ‘혁명적’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이데올로기가 광범위한 ‘유토피아 담론’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재현’했던(또는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를 통해 통합시켰던) ‘국가’의 존재 덕분이었다.

이 국가는 말할 것도 없이 ‘민족-국가’이다. 이 혼연일체의 ‘민족-국가’가 이른바 세계화를 통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이다. 세계화란 것은 결국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한 뒤에 이루어진 전후 세계체제의 확대팽창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국가’가 냉전 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전후 복구 과정에서 중요한 엔진으로 작동했다면, 세계화로 대변되는 ‘새로운 자본주의’에게 ‘민족-국가’는 낡은 장애물일 뿐이다. 이 시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민족’이라는 숭고 대상을 제거한 국가장치이기 때문이다. 이 국가장치조차도 국민을 재현하는 정치기계가 아닌 오직 국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치안기계로서 필요할 따름이다.

‘소녀상’은 바로 이런 혼돈의 시대에 솟아오른 ‘민족’이라는 숭고 대상,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의 잔여물이다. ‘소녀상’을 하나의 고철덩어리로 간주하고자 하는 현실주의는 얼핏 들으면 타당성을 가지지만, 이런 현실주의 역시 민족 없는 국가라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만들 내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상실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녀상’을 탈신비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녀상’이라는 상징물이 필요한 민족을 21세기에 재구성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만이 섣부른 화해나 해결을 논하기에 앞서, ‘위안부’ 문제를 역사의 관점에서 재정위시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소녀상’은 그래서 여전히 부족하지만, 또한 그렇기에 충만한 이 시대의 상징물이다.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진격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생각한다 file

  • 2022-03-12
  • 조회 수 658

침공과 제재 전격적인 푸틴의 침공으로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이 서방세계의 예측과 달리 장기전으로 가고 있다. 물론 이런 장기전을 푸틴이 예상 못한 것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다. 폴 크루그먼은 3월 4일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칼럼에서 푸틴의 오판을 단언하고 있는데, 이런 평가에 따르자면 푸틴이 불러온 이번 전쟁은 전략적 실패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러시아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겠지만,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푸틴은 초기 기동전으로 신속하게 우...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애시드 공산주의까지: 마크 피셔의 문화비평 file [3]

  • 2020-12-18
  • 조회 수 2440

1. 워릭 시절 마크 피셔(Mark Fisher)는 나에게 각별한 비평가이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의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박사 과정 막바지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내가 입학한 철학과 대학원은 사디 플랜트(Sadie Plant)와 닉 랜드( Nick Land)가 남겨 놓은 펑키한 분위기를 유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피셔 역시 이들이 만든 사이버네틱 문화연구부(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의 일원이었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인준한 연구단체는 아니었지만, CCRU로 통했던 이 단체는 기본적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보다 file

  • 2020-10-16
  • 조회 수 847

2019년 특강을 위해 초청 받은 오사카 대학에 갔을 때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나선 골목 어귀 파출소 게시판에 붙어있던 수배 전단지 하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훑어봤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문구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이름도 생소한 무장조직의 가담자 둘을 수배하는 내용이었다. 호기심에 정보를 검색해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74년 8월부터 시작해서 5월까지 도쿄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를 비롯해서 주요 일본 기업과 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 이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순수한 상호공생의 이론적 근거: 슬라보예 지젝과 한병철의 논쟁에 대해 file

  • 2020-04-25
  • 조회 수 2211

* 이 글은 Fall Semester에 기고한 "On The Rationale Of Pure Mutualism: An Intervention Into The Debate Between Slavoj Žižek And Byung-Chul Han"을 강영민이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이동할 수 없다. 코로나19(COVID-19)도 마찬가지다. 바이러스는 동물 같은 숙주를 필요로 한다. 라틴어로 동물(animal)은 숨이 붙어 있는 존재란 뜻이다. 인간의 의미 상징 체계 내에서 이미 바이러스 감염의 문화적 기원이 각인되어 있는 셈이다. 동물이 바이러스를 다른 동물로 이동시킨다. 오늘날 같이 동물이 다른 동물들과 빈...

조국 말고 검찰에 요구해야할 것 file

  • 2019-09-07
  • 조회 수 1151

정치만큼 묘한 생물이 어디에 있을까. 말 많고 탈 많던 조국 후보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청문회 이전까지는 이 세상이 한국당과 민주당 둘만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청문회가 끝나고 나자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당과 민주당이 펼치던 쇼 무대에 갑자기 검찰이 난입한 것이다. 기성 정치진영을 대표하던 두 당 사이에 끼어든 이 생뚱 맞은 검찰의 출현은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국민의 의혹'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행정부 국정을 담당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무위원 후보의 부인이 청...

“기생충”을 보다 file [2]

  • 2019-07-04
  • 조회 수 4323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영화 <기생충>을 이제야 보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미리 알고 볼 수 있었다. ‘스포일러 공포’가 횡행했지만, 이 영화는 줄거리를 다 알고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 <명량>을 보고 “이순신 장군 죽는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스포일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여하튼 칸의 수상 덕분인지 이런 “스포일러 마케팅” 덕분인지 영화의 흥행은 성공했지만, 만일 이 둘이 없었더라도 이 영화가 이토록 관심을 끌 수 있었을지 ...

예술과 증언

  • 2019-03-24
  • 조회 수 6273

런던에 있는 영국 국립 미술관에 가면, <아르놀피니의 초상>이라는 그림이 있다. 지금 이 그림의 제목은 <초상>이지만 내가 맨 처음 이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이었다. 1434년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제에 대한 논란은 많은데, 플랑드르 브루제에 살던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의 결혼을 그렸을 것이라는 주장이 한동안 우세했지만, 1997년 아르놀피니가 실제로 1434년에 결혼하지 않았고, 반 에이크가 죽은 지 6년이나 지나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제목이 ...

박항서 매직 file

  • 2019-02-22
  • 조회 수 473

‘박항서 매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끌고 있는 박항서 감독은 10년 만에 사상 두 번째로 스즈키컵 우승을 이끌고, 베트남 A매치 16경기 무패 ‘세계신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 축구를 FIFA 랭킹 역대 최고로 끌어올렸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흥미롭게도 박항서 감독의 말에 따르면,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과 함께 수석 코치를 하면서 지도자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박항서 매직’의 비결이 무엇인지 묻는 ...

인문학자의 빙하기 file

  • 2018-12-21
  • 조회 수 500

'인문학자'라는 말은 참으로 이상한 한국식 명칭이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인문학을 일컬어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풀이해놓고 있으니 '인문학자'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이 풀이에 따르면, "언어, 문학, 역사, 철학"을 모두 아울러 뭔가를 하고 있는 나도 '인문학자'임에 틀림없다.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인문학이란 말이 일반 교양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렇듯 인문학과 일반 교양을...

랑시에르를 만나다 file [1]

  • 2018-04-23
  • 조회 수 3175

자택 문이 열리자 자크 랑시에르는 변함없이 보랏빛 스웨터를 입고 나를 맞이했다. 처음부터 인터뷰를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학술행사가 있어서 들른 차에 잠깐 찾아뵙고자 했던 것인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길어져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청탁할 것이 있었고, 또한 다른 부탁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있던 참이었다.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은 거실도 변함없었다. 아담한 살굿빛 소파가 놓여 있는 정경은 몇 년 전에 찾았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지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특강 때문...

미투 운동과 한국의 진보주의 file

  • 2018-03-17
  • 조회 수 4608

미투(#MeToo)라는 말이 처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폭발적인 운동으로 번져갈 것이라는 예상을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1월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들불처럼 퍼져나간 미투는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누구는 이렇게 한국 사회에 성범죄가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터져야할 문제가 지금에야 터진 것이라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 특히 남성이 저지르는 성 관련 범죄는 거의 먼지처럼 일상에 퍼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비트코인 신드롬 file [1]

  • 2018-01-27
  • 조회 수 3336

가히 비트코인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하다. 빌 모러가 2015년 <어떻게 결제하시겠습니까?>라는 책을 쓸 때만 해도 비트코인은 기술발전이 가져올 화폐의 미래 중 하나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암호화폐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비트코인은 갑자기 ‘투기’의 대상으로 비난 받게 되었다. 유시민 같은 이들이 앞장서서 비트코인 신드롬을 ‘광풍’으로 진단하면서 투기를 조장하는 ‘작전세력들’을 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비트코인에 대한 다소 과도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지만, 유시민 같은 이들의 주장을 문제 삼기 위해 ...

자코메티 file

  • 2017-12-09
  • 조회 수 2192

“나는 예술에도 관심 있지만, 본능적으로 진리에 더 관심이 많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더 다르게 본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그러므로 ’다르게 보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자코메티는 ”미술은 보기의 일종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예술은 어떤 신비감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얼마 전 도쿄에 가서 봤던 자코메티 전은 띄엄띄엄 마주쳤던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을 일별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전시를 둘러보면서 종종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

청문회와 '문자폭탄' file

  • 2017-07-20
  • 조회 수 1382

최근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알렌카 주판치치는 자신의 짧은 에세이에서 이탈로 스베보의 소설 <제노의 양심>에 등장하는 애연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애연가는 언제든지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계속 담배를 피운다. 애연가의 ‘양심’에 비추어본다면, “담배를 끊는다”는 그의 진술은 담배를 끊지 못하고 계속 피우는 행동에 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애연가는 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모순적인 진술과 행동을 지속하는 것일까. 달리 묻자면 이 애연가는 왜 서로 충돌하는 것이 빤한 자신의 진술과 행동을...

탄핵, 잔치는 끝났다 file [6]

  • 2017-04-05
  • 조회 수 14337

박근혜 대통령이 끝내 탄핵되었다. 이로써 박근혜라는 이름 석 자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 당한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매주 20차에 걸쳐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던 광화문 촛불집회는 승리의 기억으로 각인된 것처럼 보인다. 2008년 촛불집회가 ‘명박산성’을 넘지 못했던 것과 달리, 이번 경우는 청와대 앞 100미터까지 진입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초창기에 폭력이니 비폭력이니 논쟁이 잠깐 일었지만, 청와대 바로 앞까지 촛불이 ‘합법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자 유야무야되었다. 여기에서 어렵지 않게 2008년 촛불집회와 2017년 촛...

한병철과 헬조선 file [3]

  • 2017-03-21
  • 조회 수 5275

한병철 교수의 특강이 모종의 '퍼포먼스'였던 모양이다. (▶참고 글) 이 문제에 대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린 평가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철학자의 객기" 정도였는데, 이를 두고 벌어지는 풍경이 자못 심각해서 짧게 몇 마디 보태고자 한다. 참석한 관객들의 '증언'과 이후 알려진 정보들에 따르면, 저자는 출판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본인의 강연을 그런 식으로 진행하고자 했던 것 같다. 피아노를 미리 주문해놓은 것을 봐도 무엇인가 특별한 계획이 그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해프닝으...

차기 대통령의 딜레마: '큰 정치'의 전망을 기대한다 file [2]

  • 2017-02-05
  • 조회 수 6234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할 시기는 격동이라는 한 단어로 담아내기에 너무도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전후 세계 질서를 구축했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퇴조하고 보호무역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태동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제일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트럼프라는 개인이 원인 제공자처럼 비쳐지고 있지만, 사실상 전후 세계 질서가 표방했던 개방주의는 2008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점차 폐기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이야말로 개방주의를 기치로 내건 전후 세계 질서에 가장 잘 적응해온 아시...

트럼프와 촛불, 두 개의 공화국 file [6]

  • 2017-01-30
  • 조회 수 1798

“트럼프도 박근혜처럼 임기 중에 탄핵당했으면 좋겠다.” 힐러리 지지자였던 미국의 지인이 내게 보낸 메시지이다. 그만큼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많은 힐러리 지지자들에게 충격을 안긴 사건이었다. 트럼프의 당선이 한반도의 정세에 미칠 영향도 만만치 않을 것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역시 트럼프 당선 못지않게 극적인 것이다. 이 상황은 어떻게 극적인가? 2012년을 상기해보자. 박근혜 정부의 출현은 보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상화’를 의미했다. 이 ‘정상화’를 다른 용어로 번역하면 ‘정치의 ...

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트럼프 현상을 다시 생각하자 [2]

  • 2016-12-25
  • 조회 수 2122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인’의 타락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가치’를 만들어낸 전후 자유주의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적인 배경으로 인해 트럼프 정권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미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는 미디어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어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기층의 불만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경악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만큼 미국답지 않은 선택이라는 뜻일 ...

거기 '내가 있었다': 소셜미디어와 체감의 정치 file [1]

  • 2016-11-28
  • 조회 수 1071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게 문자는 인간을 게으르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문자로 무엇인가를 표기해놓으면 주객이 전도되어서 그 문자를 해석하느라 갑론을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문자에 담긴 이데아를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악명 높은 ‘시인추방론’과 일맥상통하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인류 중에서 살아남은 우리 사피엔스는 플라톤의 우려와 달리 “돌에 정보를 새기는 능력” 덕분에 사회를 이루고 이렇게 지구 환경 자체를 변화시키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 문자야말로 괴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