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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자의 말

조회 수 1719 추천 수 0 2015.12.06 07:26:51

 conversationdanslepark.jpg

Thomas Gainsborough(1727~1788), <Conversation in a park>, 1746~7년 경


레이놀즈와 함께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화가인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작품이다. 그림 속의 커플은 작가 게인즈버러와 그의 부인 마가렛이며 결혼 기념으로 남긴 그림이다. 당시로서는 풍경과 인물이 함께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졌다는 면에서 새로운 장르 개척이나 다름 없었다. 귀족들의 사적인 일상을 우아하게 보여주는 그의 그림들은 상류층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공원에서의 대화>는 내가 가끔 들여다 보며 홀로 웃는 그림 중 하나다. ‘대화’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아주 명료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 나를 웃게 한다. 남자는 무릎 위에 책을 놓고 활발하게 손을 움직이며 여자에게 뭔가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반면 여자는 아주 다소곳하게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한다. 울스턴크래프트가 비판하던 18세기 영국 귀족 여성의 옷차림인 질질 끌리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왜 이 여자가 별로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는 걸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여자를 보고 있는데 여자의 눈은 나와 마주치고 있다. 지루하지? 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두 사람의 태도가 상반된 이 장면이 그리 낯설지 않다. 물론 18세기의 작가가 이를 의식했을 리는 없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배경에서 이제 막 결혼한 젊은 부부의 싱그러운 대화였을 것이다. 그 당시 여성에게는 적당히 입을 다무는 태도가 미덕이었으니까.

“울스턴크래프트의 시대에는 어느 정도의 학식은 가정에서 여인을 입다물게 하는데 유용한 장식적 교양의 부분으로 여겨질 수는 있었지만 정도를 뛰어넘는 학식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1 

‘정도를 뛰어넘는’의 기준은 누가 정할까. 제 맘에 안 들면? 97년 출판되었을 때 논란을 일으킨 <선택>의 후기에서 이문열은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것이 지나쳤을 때 뿐이다."  ‘지나친’의 기준은? 제 비위를 상하게 하면 지나친가? 여성의 학식이든 페미니즘이든 ‘과하다’는 판단의 밑바닥에는 여성의 표현 자체를 불편해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권력이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몰려 있는 현실은 자연현상처럼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 권력에 대한 저항은 툭하면 지나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를 온갖 미사여구와 스스로 논리라고 착각하는 논리를 기계처럼 끌고 들어와 사고의 자판기를 굴린다. 그 틀에서 계속 사유하는 한 메뉴 안에 있는 품목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에서 약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스스로) 억눌러야 하는 것이 ‘말’이다.

매주 토요일 아침에 ‘시니어 토크’라며 ‘어르신’들이 패널로 출연하는 방송을 여러 번 보았다.  한국의 나이주의와 성차별이 ‘문화’로 잘 자리잡은 아름다운(?) 장면들을 종종 감상할 수 있다. 주로 젊은 부부 한 쌍이 출연해 그들의 문제를 보여주면 어르신(다른 말 없나!) 패널들이 이에 대해 훈계를 하고 최종적으로 투표를 해서 아내나 남편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어르신 패널들이 각자 자기 부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말할 때가 있다. 한 번은 남성 패널이 이렇게 말한다.

“아내 이름이 ‘양순(가명)’이라서 정말 이름처럼 순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렇지 않더라고요.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요.”

여성의 말과 생각이 남성의 언어를 거치면 ‘잔소리’, ‘수다’로 변하고 그 여성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곤 한다.  순한 여성을 좋게 평가하지만 남성다움은 씩씩한 박력이며 그들은 당당히 제 생각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남자가 제 생각을 말 할 줄 알면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여자는 별 것도 아닌 말을 해도 ‘설친다’, ‘똑똑한 척 한다’, ‘자기 주장이 강하다’ 등의 부정적인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방해할 방 '妨'은 계집 녀를 넣어 여성이 모나게 의견을 제시하면 일에 방해가 된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자기 주장’보다는 ‘오빠’에게 물어보고 오빠의 유머에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주고 감동해주는 역할이다. 

연일 메르스에 대한 소식이 속보와 뉴스의 첫머리에 등장하던 6월이었다. 한 토크쇼에서 남성 진행자가 여성 진행자에게 “메르스의 뜻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이 여성은 “그럼요. 저는 아나운서니까 ‘중동호흡기증후군’이라고 교육을 받고…” 이 여성의 말에 바로 꼬리를 물고 남성 진행자는 “똑똑한 척 하시는군요.”라고 한다. 온 국민이 메르스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건만 메르스의 뜻을 아냐고 묻는 태도도 어이가 없는데, 여성 진행자가  정확하게 답을 하니까 똑똑한 척 한다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한다. 이런 모습은 아주 일상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뭐가 문제인지 잘 인식을 못 하기 마련이다.

모임에서 식혜를 내놨다가 식혜 담그는 법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남자 앞에서 지루함을 참느라 혼난 적이 있다. 물론 그는 식혜를 담가본 적은 없고 자기 엄마가 하던 방식을 여자 후배들 앞에서 설명하고 있었다. (지금 자기 앞에 놓인 그 식혜를 누가 담갔는데?) 밥알이 동동 떠오르기까지 일어나는 발효와 숙성 과정을 과학적(?)으로 한참 설명한다. 듣다 듣다 못 견뎠는지 한 선배 언니가 “야….. 도대체 그 식혜는 사람이 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야?”라고 해서 우리끼리 눈빛을 교환하며 크게 웃은 적이 있다. 그래도 그 날 끝까지 그 남자는 입으로 식혜의 명인이 되었다.

젠더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면 내게 메일을 보내 ‘다른 글은 다 좋은데 그런 글은 불편하다’고 하는 독자가 있고, 폭언을 해서 폭력적이라고 했더니 ‘폭력적’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자기가 상처 받았다며 사과하라고 두 달 동안 메일을 보내서 괴롭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어떤 특수성을 찾으려 애쓸 필요 없다. 대부분 옆집의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여성의 말을 막으려는 몸부림이 몸에 베어서 인식을 못한다. 자신의 의견이 곧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인식론의 한계를 보인다.

말을 하기 위해 굉장히 망설이고 준비를 하며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어려움을 거의 못 느끼고 사는 사람도 있다. 위키피디아 편집자의 90%가 남성이고 이 남성들을 다시 나눠보면 잘 사는 나라의 백인이 대다수다. 정보는 극단적으로 편집되고 있다. 한국 사회만 놓고 보자면 상대적으로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의견은커녕 말 자체를 하기 어렵다. 여자가 남자보다 말이 많다는 생각은 여자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의식이 발명한 관념이지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말이란,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법이다.

암스테르담의 고문박물관에 가면 판화로 남아있는 고문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고문 받는 사람들 중에 여성이 특히 많이 보이는데 이유는 낙태를 했거나 간음을 했거나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근대인’의 시각으로는 모두 끔찍하지만 그 중에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는 여성을 침묵하게 만드는 고문이다. 교육 받은 상류층 여성이 스스로 우아하게 침묵을 감내해야 했다면 낮은 계층의 여성들은 더 직접적으로 물리적 학대를 받았다. 재갈을 물려 입을 틀어막는 고문이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영국에서 ‘주로 여성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들이 ‘지나치게’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여성 앞에서 ‘지나치게’ 가르치고 설명하는 남성들의 오래된 습관은 여성들을 향한 끔찍한 폭력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말하는 사람은 바로 '나', 너는 감히 내 맘에 들지 않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말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물리적 통제와 학대로 확대될 수 있는 법이다. 여성을 4시간 동안 감금, 폭행한 사건의 녹취록을 반복적으로 보면서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폭력의 고리를 또 확인한다.


“말을 싸가지 없게 했어?”

“왜 재수 없게 말해?”

“지금껏 천 번 넘게 얘길 했는데 싸가지 없게 들리는 걸 몰랐어? 또 했어? 응? 내가 언제까지 참아줬어야 됐지?”


torture branks scolds bridle2.jpg

scold's bridle (잔소리하는 여성의 입마개)


1. 86쪽, <세상을 뒤바꾼 열정>, 자넷 토드/ 서미석 역, 한길사, 2003년 


댓글 '4'

발뒤꿈치

2015.12.06 21:02:23

입마개 사진은 정말 충격적이네요...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한 선생님께서 "반 친구가 이성으로 보일 때"를 물어보셨어요. 그 때 남자애들 대답이 '조용히 공부할 때' '조용히 로션바를 때' '조용히 앉아서....' 그런 대답들이 나올줄은 예상을 못해서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상적으로(?) 조용한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드물잖아요?? 어떻게 그런 조용한 여자에 대한 환상이 형성됐는지 모르겠어요ㅎㅎㅎ

이라영

2015.12.08 01:05:03

재미있는 사례네요. 여학생들은 뭐라고 했을지도 궁금하고요.

발뒤꿈치

2015.12.08 06:51:27

여학생들은 그에 대해 별말 안하고 넘어갔던것 같아요!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남학생들 대답처럼 의외가 아니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네요~ 남학생도 한명만 그런 대답을 했으면 기억을 못했을텐데 여러명이 그렇게 대답해서 기억에 남았어요!

이라영

2015.12.09 03:35:02

ㅎㅎ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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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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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 한 학생에게서 인상적인 메일을 받은 적 있다. 그는 “고통을 상상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할 윤리적 의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졸업논문과 관련한 문의였으나 내가 그렇게 거대한 주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깜냥은 못 되기에 그냥 그의 생각을 듣고 공감하는 차원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그저 그의 고민 자체가 굉장히 반가웠다. 내 고통에 대한 생각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생각은 내게 (아직) 오지 않은 고통에 대한 치열한 상상이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상상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나와 무관한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