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자 술꾼>, Pieter de Hooche(1629~1684)
아무런 긴장감 없이 늘어뜨린 왼팔, 편하게 죽 뻗은 다리, 발그레한 볼에 미소를 띤 여자의 얼굴을 보니 벌써 여러 잔 걸친 모양이다. 다음 잔을 위해 옆에서 남자가 술을 따르고 있고 옆에는 나이 든 하녀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창 밖이 훤하다. 여자는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그 무서운 낮술을 마시는 중이다. 바닥에 잠들어있는 강아지에게도 어쩌면 술을 줬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17세기 네덜란드 작가 피에터 드 후흐의 <여자 술꾼>은 순간을 즐기며 희희낙락하는 인간을 묘사했다. 종교적 규율을 깨고 인생, 곧 현생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낮에 한가하게 술 마시는 여자의 모습은 이를 표현하기에 적당한 소재다. 주로 여성은 술을 따르는 유흥의 보조자로 여겨지지만 실은 예부터 술을 만드는 사람이 여성이었다. 서양에서는 펍이 생기기 전부터 각 가정에서 여성들이 맥주를 담가 팔았으며 한국에서 전통주를 담그는 일도 여성들 몫이었다. 술을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지만 술 마시는 여자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제사 음식을 만들기는 하지만 제는 남자들 중심으로 돌아가며 음복은 당연히 남자 어른이 먼저 하는 ‘전통’과 같은 맥락이다.
1998년 배우 이미연이 산사춘 광고에 등장할 때만 해도 여배우의 술광고는 신선했다. 그래서 이 현상이 여자의 인권과 상관이 있나? 아니다. 단지 술 소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여성 모델을 발탁했을 뿐이다. 사모님과 ‘된장녀’의 간극처럼 소비시장에서 여성의 위치와 일상생활에서 여성의 위치는 다르다.
여전히 직장 내 성희롱으로 ‘술따르기 강요’는 빈번하다. ‘술과 여자’는 유흥의 세트메뉴이기 때문에 여자는 술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술상을 완성하는 중요한 메뉴다. 그래서 ‘여자 끼고’ 술을 마셔야 술맛이 더 산다. 술, 도박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빠지지’ 말아야 하는 대표적인 위험물이기에 때로는 ‘조심’해야 할 대상이다.
술 맛을 돋게 하는 여자가 아니라 술을 마시는 여자는 기존의 도덕에 훨씬 어긋난다. 술 먹고 제 몸을 못 가누는 여자에게는 자기 몸 관리 못한다고 탓하지만, 술 먹고 남의 몸을 침범하는 남자에게는 그저 ‘술탓’이라며 관용을 베푼다. 그래서 많은 가해자들이 여성을 성폭행 해도, 살인을 해도, ‘술김에’라는 변명을 하곤 한다. 실제로 친절한 판사들은 이 ‘술탓’에 어느 정도 동조해주고 있다.
많이 마시면 누구에게나 좋지 않은 술을 똑같이 마셔야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아니다. 도덕의 적용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권력 있는 남성의 유흥은 ‘접대’라는 형식을 빌어 공식적으로 벌어지지만 ‘제 3의 성인 아줌마’들은 낮에 커피숍에 모여있기만 해도 대단한 사치와 낭비를 행하는 한심한 여자들이 된다. 담배에 대한 인식도 성별에 따라 얼마나 차이가 큰가. 또한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음주 문화는 술 못 마시는 남자를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남성사회의 술로 이어지는 업무와 술로 맺어지는 연대 속에서 못 먹는 술도 때로는 잘 마시는 척 해야 한다. 남자의 허세와 여자의 내숭은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저 그림 속에서 오른쪽 뒤에 걸려있는 그림은 ‘예수와 간통한 여자’다. ‘간음’은 종교에서 모두에게 금지 사항이기는 하지만 유독 여성에게 더 엄했다. 간통을 혼자 하는 것도 아니건만 여자의 간음은 훨씬 더 ‘더럽다’. 더러운 년. 그러니 간통한 여자 앞에서 대낮에 남자가 따라주는 술 마시는 저 여자는 간이 배밖에 나온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