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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격월간지 <민들레> 6월호에 실리는 글입니다.

<민들레>의 허락 하에 이 곳에도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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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체리를 든 소년 (Gamin aux Cerises)>, 1858년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표정이 잘 어울리는 배우 이나영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등장하는 한 카드광고. 같은 광고의 유해진 편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라고 한다. 가만히 있기, 긍정적인 태도, 바로 이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은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기에 대해 여전히 생각 중이다. 생각하는 인간은 움직이는 인간이다. 신체적 움직임과 사상의 움직임은 ‘운동(movement, 運動)’이라는 같은 단어를 쓴다. 그렇기에 생각하는 인간은 운동하는 인간이며 생각하기와 실천하기는 분리되지 않는다. 움직임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는 자, 곧 생각하는 인간은 반드시 저항한다.


1 누가 생각하는가


관념의 전복, 체제의 변화가 두려운 이들은 생각하는 인간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억압한다. 권력자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예술행위를 재판하여 벌금을 물리고, 정해진 답을 벗어난 출판물을 금지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의 표현은 규범이 되지만 누군가의 표현은 말대꾸, 싸가지 없음, 하극상이다. 툭하면 ‘군기’를 잡고, 특히 나이주의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한국사회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개념은 이미 표현의 권력관계를 규정한다. ‘윗사람’과 토론은 불가능하며 ‘아랫사람’은 그저 말을 들어야 한다. 규범을 만드는 사람과 규범을 지키는 사람은 이렇게 나뉘어져 있다.


현실에서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 있지 않다. 게다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고 어디부터 폭력이 되는가. 이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어와 목적어다. ‘누가’ 표현하는가. ‘무엇을’ 표현하는가. 특히 표현하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표현하는 자의 위치며, 표현의 주체가 표현의 맥락을 완성한다. ‘누가’라는 주어를 괄호 속에 감춘 채 외치는 표현의 자유는 종종 오만한 힘의 과시가 되기 십상이다. 대북삐라 살포는 표현의 자유지만 트위터로 ‘우리민족끼리’를 리트윗한 박정근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정작 자기검열이 필요한 이들은 과도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폭력 행위 : 약자 조롱과 혐오)을 하고 있으며, 표현을 제한받는 이들은 과하게 자기검열에 시달린다. 검열하는 자와 검열당하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자.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와 타인을 심판하는 자가 나눠진 이 규범은 전혀 정의롭지 않다. 이성애의 표현을 동성애자가 심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무엇이 검열 당하는가보다 누가 검열하는가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검열의 대상이 되지 않는 표현에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의 침묵을 담보로 얻을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특정 표현의 독주가 될 뿐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


끔찍한 여성혐오를 배설한 개그맨은 여전히 건재하며 그는 사과조차 개그의 소재거리로 삼아 2차, 3차의 조롱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매체의 파급력으로 따져도 비교가 안 되는데 여성혐오를 뱉어낸 방송은 살아남아도 엄마에 대한 잔인한 표현을 담은 동시집은 전량 폐기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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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인간의 표현할 권리


이 편파적 시스템 속에서 한 초등학생의 시를 두고 ‘잔혹동시’라며 어른들이 유난을 떨고 있다. 일단 ‘잔혹동시’라는 낙인은 시의 세계를 협소하게 가둔다. 한 쪽에서는 시인의 천재성을 운운하지만 이 또한 적절치 않아 보인다. 천재성 유무는 출판의 자유와 무관하다. 시의 문학성과 시인의 천재성은 비판의 영역인데, 현재 ‘잔혹동시’는 문학적 비판 이전에 출판의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천재성이 있는지, 부모의 욕심이 과한지, 또 시에 작품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할 생각도 없거니와 나는 천재를 감별할 능력이 없다. 이 글에서는 ‘어린’ 인간의 시(생각, 표현)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문제적 시선을 다루고 싶다.


10세의 작가가 쓴 동시집 <솔로강아지>가 ‘패륜’이라는 비판까지 들으며 여론에 오르내리자 출판사는 결국 책을 전량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동시를 두고 ‘사탄’까지 운운한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한 ‘부모’들의 생각이 궁금하여 관련 커뮤니티를 탐색하다가 실로 잔혹함이 무엇인지 보고 말았다. 허세, 애어른, 천재성은 개뿔, 작위적, 정신 상담이 필요해...... 모두가 ‘잔혹한’ 인간평론가가 되어 있었다. 시 한 편으로 작자의 10년 인생과 부모와의 관계, 가정환경까지 모두 꿰고 있는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인터넷 속의 가상세계를 빠져 나왔다. ‘시’가 아니라 가십만 난무한 참혹한 결과를 빚었다. 10세 소녀의 무서운 시가 ‘표현의 자유를 넘었다’고 비난을 듣는다면, 이 어린이를 향한 어른들의 무시무시한 공격은 정당한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어른들은 어린 인간을 지적하기만 바쁘다.


인터넷을 통해 시집 <솔로강아지>에 있는 여러 편의 시를 살펴보았다. 꽤 여러 번 엄마에 대한 작자의 시각이 등장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학원 가기 싫은 날, 솔로강아지, 엄마 등) 엄마에 대한 애정을 표하기는커녕 적개심과 두려움을 드러낸다. 작가는 “시는 시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시가 시일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시를 비롯하여 예술 작품이 현실의 도덕교과서는 아니라고 여긴다. 예술은 미와 선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추와 악을 다룰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추와 선악의 개념을 지속적으로 전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름답고 재미있는 예술도 있겠지만 불편한 질문을 꺼내드는 작품도 있기 마련이다. 예술이 아름다움과 유희, 치유를 향한다는 착각은 꽤 견고하다. 그래서 흉하고 더럽고 악하고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표현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예술은 독자를 기분 좋게 만들 의무가 없다.


문제가 된 ‘학원 가기 싫은 날’은 전통적 ‘효’사상에 반하는 표현이며 폭력적인 묘사 때문에 ‘아이답지 않다’는 반응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아이다움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모두가 거쳐 온 세계지만 쉽게 망각 속으로 사라진 세계가 아이의 세계다. 전쟁도 놀이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의 ‘동심’ 속에는 이미 인간세계의 각종 폭력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또한 아이와 엄마의 관계는 그리 평면적이지 않다.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보호자이며 영원한 내 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장 강력하게 구속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엄마”라는 초등학생의 시는 솔직하다. 아이 입장에서 엄마는 규범을 만드는 사람이기에 가장 커다란 저항의 대상이지만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띤다. 효, 형제애, 가족애, 모성애 등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작동하는 일관된 가치라면 그토록 온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강조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3 순수한 마음


모성애에 대한 신화만큼 동심도 어른의 시각으로 발명된 세계다. 어른은 아이에게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를 요구한다. 아이는 어른의 철저한 타자다. 미성년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미(未)’성년일수는 있으나 ‘미(未)’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성인만이 인간 취급을 받는다. 미성년자는 덜 된 인간이고 노인은 너무 낡은 인간이다. 성인 인간을 기준으로 미성년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타자화한다면 노인은 낡고 더러워서 오염된 존재다. 그래서 ‘늙은 여자’는 동화 속에서 주로 마녀로 등장하며 ‘순수’와는 거리가 멀다. 동심을 걱정한다면 오히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수동적 여성상, ‘계모’의 틀을 빌린 여성혐오 등에 대해 인식함이 우선이 아닐까. 어른들은 아이에게 차별적 문법을 고스란히 전달하여 혐오를 배우도록 한다.


순수한 마음이란 강요받지 않은 본래의 마음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순수라는 명목으로 아이의 마음과 역할을 강요한다. 철저한 타자여야 할 아이가 간혹 어른과 별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이면 ‘애늙은이’라고 한다. 우리 관념 속의 순수에는 정답이 있다. 순수는 선함, 깨끗함, 경험 없음, 약함, 순종적인 성격을 띤다. 이는 젊은 여성과 아이에게서 주로 보고자하는 환상이다.


아이와 여성은 보호의 대상일 때 아이답고 여성답다. 보호의 대상이란 다른 말로 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남자 어른을 제외한 인간을 ‘아녀자(아이+여자)’로 아울러 부르듯이 여성은 남자 인간의 타자이며, 어린이는 어른 인간의 타자로서 이들은 ‘나머지 인간’에 속한다. 흔히 결혼해야 어른이라고 하거나 자식을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주장하는 습관도 ‘어린 인간’이라는 타자가 있어야 어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순수의 상징이며 감성의 주체, 비문명의 이미지를 위해 여성은 자연에 비유되며 어린 인간은 자라나는 새싹으로 파릇파릇 생기가 넘쳐야 한다. 특히 ‘소녀’는 여성과 어린 인간이라는 이중의 타자화 속에서 무균질 순수덩어리, 오염되지 않은 청정구역의 판타지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니 환상을 깨는 소녀의 거친 폭력성과 예상을 빗나가는 자기주장은 어른들을 ‘멘붕’으로 이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글이 있다. ‘낯모르는 누이들에게’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은 “소녀들의 대화치고는 너무 거칠고 야한” 이야기를 우연히 제과점에서 들은 스님이 소녀들에게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위해 쓴 글이다. 이 글을 쓴 시점이 1971년이라는 사실이 내 눈에 들어왔다. 10대들의 거친 말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지만 언제나 ‘요즘 애들은’ 더욱 문제아가 된다. 게다가 거칠기로 따지자면 소년의 입과 주먹이 더욱 심각하겠으나 어찌된 노릇인지 법정은 소녀에게만 연설을 한다. “소녀라는 말은 순결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슬기로운 본질을 가꾸는 인생의 앳된 시절을 뜻한다.”며 “우리 춘향이나 심청이한테 배워야 할 거다”라고 한다. 춘향은 정조를 지킨 열녀, 혹은 신분상승에 성공한 여성이며 심청은 목숨을 건 효녀, 혹은 한량 아버지 봉양이 지겨워 자살을 택한 딸이다. 아마도 배우라는 점은 열녀와 효녀의 모습일 테다. 이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소녀다움이며 여성다움이다. 어린 여자일수록 더더욱 남성 어른의 환상에 봉사하기 위해 ‘~다움’을 연기해야 한다.


올해 2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제국의 위안부>의 판매금지 결정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여지가 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란의 배경에는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제한된 정체성이 있다. 조금이라도 ‘자발적’ 성질이 있다면 완벽한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순식간에 ‘더러운 매춘부’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한다. 단발머리 위안부 소녀상이 상징하듯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상상력은 제한되어 있다. 그렇기에 위안부 피해 여성을 ‘순수한 소녀’가 겪은 고통으로만 바라보려는 통념과 다르게 분석한 <제국의 위안부>는 이 사회가 허락할 수 없는 저술이다. 피해자들이 소녀이든, 아줌마든, 설사 돈벌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했든, 제국주의 하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발생한 위안부 제도는 이미 그 자체로 착취이며 폭력이다.


순수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그 순수한 대상의 목소리를 삭제하는 강력한 명목으로 작용한다. 어린 인간을 순수의 결정체로 추켜세우지만 정작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미성년자의 표현을 무시하는 습관은 일상에 만연하다. ‘소녀의 일기장 같은’이라는 상투적인 수사가 그렇다. 유치한 감정과잉의 글을 비하하기 위해 종종 죄 없는 소녀의 일기장을 끌어온다. 하지만 고전이 되어버린 일기장, <안네의 일기>가 바로 소녀의 일기장이다. 게다가 안네의 일기조차 안네 아버지에 의해 성적 호기심이나 바르지 못한 표현, 곧 ‘거칠고 야한’ 내용은 걸러진 채 출판되었다. 미성년자의 생각을 직접 그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불쾌한 예술이 살아남길 원한다. ‘폐기’라는 금지가 금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비판할 기회의 상실, 곧 생각할 자유의 박탈이다. 표현의 잔인함보다 그 표현을 하는 사람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학벌차별은 인종차별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기 그지없다. 이 차별에서 살아남으려고 모두 발버둥치는 중이며, 뒤처짐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 한국 사회를 온통 뒤덮고 있는 ‘시대정신’이다. 햇빛을 보지 못해 비타민D 부족이 심각할 정도로 한국의 소아청소년은 학업에 치여 산다. 어른이 보고 싶은 동심이 아니라, 어른이 들어야 할 어린 인간의 목소리가 더 필요하다. 환상에 빠진 동심이 아닌 실재의 동심은 바로 그 목소리에 있다. 슬프게도, 이번 사건은 결국 목소리 낼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목소리 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들 외에는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표현의 비뚤어진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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