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은 정치적 위치를 막론하고 미움 받는 인물이다. 비백인 이주민과 여성 정체성, 그럼에도 ‘내겐 없는 권력’을 가진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라는 요소가 버무려지거나 혹은 독립적으로 원한 감정을 키운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20년 전에는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왔어요?’라고 물었다면 요즘은 ‘왜 왔어요?’라고 물어요”라고 했다. 비백인 이주민에 대한 시선이 호기심 돋는 대상에서 우리가 건설한 국가에 유입된 무임승차자로 변했다. 인터뷰 기사에는 이자스민 의원을 두고 “한국민들 세금을 필리핀 돈줄로 생각하는 말도 안 되는 법안이나 내놓았다”는 댓글이 달렸고, 최다 추천을 받았다. 이 의원은 그런 법안을 내놓은 적이 없다.
<설지>는 북한에서 선전 벽화를 그리다 탈북한 뒤 남한에서 한 명의 예술인으로 거듭 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독립 영화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 관객이 감독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주인공이 탈북자인데 왜 저렇게 이쁜가요?” 이렇게 묻는 관객도 있었다. “탈북자가 어떻게 꽃집을 하는 건가요?” 북한이탈주민은 어떤 정형화한 얼굴이나 인상, 골격을 가져야 하고, 자영업자보다 더 낮은 계급의 노동, 예를 들면 식당 종업원이나 공장 노동에 종사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차별적 인식이 그대로 담겼다.

그래도 이 관객들은 북한이나 북한이탈주민을 다룬 영화를, 그것도 몇 안 되는 스크린에 어렵게 시간 맞춰 보러 올만큼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북한이나 북한이탈주민 뉴스에는 혐오 섞인 욕설과 “우리 세금으로 지원 받았으면 조용히 살아라”는 식의 겁박 댓글이 달리거나 혹은 무관심, 두 가지 극단적 반응 뿐이다. 심지어 북한이탈주민들은 비백인 이주노동자을 대하는 것보다 못난 시선을 받는다. 정착 초기 이들에게 주어지는 지원을 ‘특혜’로 보는 반감 탓이다.
이런 차별적 시선과 혐오 발언의 폭력은 어디에서 올까. 위기가 일상화하고 불안이 편재하면 사람들은 삶의 전망과 의미를 찾기보다 당장의 현실에서 정상성의 세계를 구성하려고 나선다. 정상성의 세계는 배제가 가능한 이상성의 영역을 필요로 한다.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책임을 묻는 동시에 정상성의 세계를 굳세게 뭉치게 만드는 적대의 생산! 여기에 당장 손쉬운 대상은 ‘우리’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인간들이다. 비백인 이주민이라는 인종적 정체성, 북한이탈주민이라는 ‘3등 시민’ 정체성,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고리로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확산하는 까닭이다.
정체성의 차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위기와 불안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정상성의 세계를 구성하기도 한다. 여기서 안전함이란, 어떤 현실적 이해관계에서 파생된다고 여겨지는 상상 속 피해로부터의 안전함이다. 비백인 이주민들과 북한이탈주민들은 여기서 “내가 낸만큼 돌아와야할 세금이 온전하게 돌아오지 않게 만드는 주범”으로 구성되고, 사람들은 재빨리 피해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주범’들을 축출하면 내가 낸 세금이 온전히 나에게 돌아와 나를 보살펴주고, 나와 우리의 안전한 이해 추구 공간이 확보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내가 낸 세금이 온전히 나의 이익으로 환원되는 시스템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그런 차원이라면 세금은 거둘 필요조차 없다.
혐오와 배제의 정치는 ‘나는 이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사회는 능력만큼 대접해주지 않느냐’는 식의 억울함에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억울한 이’들을 위기와 불안에 빠뜨리는 주체 역시 억울한 이들이 혐오하고 배제하는 ‘2~3등 시민’이 아니라 둘 모두를 내려다보는 사회적 강자라는 점이다. 하지만 ‘억울한 이’들은 사회적 강자에 대항해 싸울만한 정치를 구성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선 눈앞의 불안과 위기의 공포에 매몰돼 손쉬운 적대 생산에 혈안이 된 그들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처한 사회적·경제적 환경의 영향을 애써 무시하고 능력에 따른 이해관계에만 집중하는 각자도생의 파편화한 세계가 힘을 규합해 사회적 강자와 싸울 수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사회적 강자에 대항해 싸울만한 정치를 구성해내지 못한 책임은 이 ‘억울한 이’들에게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 진보 정치에도 있다. 혐오와 배제의 정치에 매몰된 이들의 삶을 다시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정치가 구성되지 않으면 혐오와 배제는 랜선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폭력으로 재현될 것이다. 최근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이 재출간되자마자 매진됐다는 독일 소식이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완해서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