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 '피습 사건'은 이제 망각의 강을 건너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건의 '배후'를 의심했던 수사기관도 김기종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건 당시에 목격했던 기이한 반응들은 쉽사리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리퍼트 미대사의 쾌유를 빈다는 명목으로 등장했던 일련의 '퍼포먼스'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정상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들이 돌연 비정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여기에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미 대사에서 칼을 휘두른 김기종의 행위를 정상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 논하는 사안과 별도로,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식을 우리는 '근대적인 것'이라고 부르도록 교육 받았다. 말하자면, 근대인이라면, 개인에 대한 개인의 복수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말아야한다는 규범이 우리의 상식, 또는 상식적 판단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김기종의 '테러'가 있자마자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즉각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극우와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보수정치인들과 보수언론들은 앞다투어 배후설을 흘리면서 종북이라는 고전적 전술을 끄집어내기에 바빴다.
통진당 해산 이후에 한국에서 종북이라는 말은 비정상적인 것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언어가 되었다. 이 상징언어는 '괴뢰'나 '꼭두각시'라는 과거의 은유처럼, "자신의 자유의지를 버리고 북한을 무조건 추종한다"는 뜻에 가깝다. 이런 양태는 과거 서구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무신론의 종교비판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종교는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을 '광신'이라는 위험에 빠트리는 대표적인 해악이었다. '광신'은 무엇보다도 자율적 개인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질서를 잡아야할 '다양성'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키메라 같은 괴물이었다.
경제를 우선 순위에 둠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광신'은 더더욱 쓸모없는 열정의 소모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논리에서, 설령 종교를 완전하게 폐지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광신'이라는 뇌관을 제거한다면, 합리적인 세계의 구성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세속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종북 비판은 이렇게 '광신'을 제거하고자 했던 종교비판의 연장이다. 따라서 종북비판과 '통일대박론'은 서로 대립한다기보다, 후자의 논리에서 전자의 논리가 등장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광신적인 북한 추종세력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통일대박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발상은 '조국통일'을 혁명 완수로 생각했던 북한의 논리를 정확하게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김기종의 행위를 간단하게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한 정부 또한 이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정상적인 것을 옹호하는 수사법을 사용했다. 특히 대통령은 이 사건을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했는데,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의 논리에서 김기종이라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비되는 정상적인 것은 '굳건한 한미동맹'인 셈이다. 따라서 현 정부와 그 지지자들에게 미 대사가 습격을 받은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이라는 정상적인 것의 근간을 뒤흔든 종북주의라는 '광신'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미대사관이 있는 광화문 광장에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쏟아져 나와서 집단으로 부채춤을 추었다. 미 대사의 쾌유를 빈다는 지극히 온정적인 마음의 발로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 빗대어서 "나는 리퍼트다"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미 대사가 했다는 "함께 갑시다"는 말이 잠언처럼 나부꼈다.
이 모든 일들은 그냥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미대사관 앞에 모여든 이들에게 그만큼 '한미동맹'은 연약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종북주의라는 '광신'의 준동이 오늘날의 한국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든 그 '한미동맹'을 위기에 빠트리고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기에 집단적인 행동을 이끌어냈으리라. 이 집단적 행동에 놀랍게도 부채춤이라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부채춤이라는 '전통'을 전시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하필이면 부채춤을 추었는지 생각해보면 비밀이 풀리지 않을까. 부채춤이야말로 '만들어진 전통'을 대표하는 근대적 산물이다. 부채춤은 '조국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이면서, 전근대적인 농촌을 새마을로 바꾸었듯이,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무속의 제의를 근대적인 무용으로 만들어낸 것이 부채춤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954년 김백봉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서,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군무로 발전한 것이 부채춤이다. 이런 과정은 한국의 부채춤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 자체가 전통을 재창조하고 익숙한 시공간의 체험을 분리시켜 재배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발명된 전통'이나 '원시적 열정' 같은 개념들은 이런 근대화의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부채춤은 이런 의미에서 한국 근대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도 근대화는 자신의 과거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감추는 양면성을 내포한다. 보여줄 것과 감출 것을 결정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를 지켜볼 것이라고 가정하는 '시선'이다. 이것을 보통 '타자의 시선'이라고 부른다.
한국 보수에게 이 '타자의 시선'은 다른 무엇도 아닌 미국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의 탄생과 형성은 냉전질서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세계체제 구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세계체제에 적응하는 것이 이를테면 한국 보수의 생존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미동맹'은 미국이라는 '타자의 시선'에 고정되어 있는 한국 보수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채춤은 한국 보수가 보여주고 싶은 한국적인 것의 모습이고, 이것을 미국이라는 '타자'를 통해 인정 받을 때 비로소 보수가 바라는 '한미동맹'은 유지될 수 있다. 분명히 미대사관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쳤던 이들에게 이런 논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을 테다. 김기종이라는 '광신'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채춤은 '근대 예술'이라는 합리성의 이름으로 불려나온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던가. 자못 그 '합리성'이 자아낸 정경은 또 다른 '광신'에 가깝지 않았던가.
이 '광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김기종의 행위를 '광신'으로 규정하는 그 입장 역시 '광신'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물론 이것은 한국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근대 자체에 감춰져 있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근대는 재현되지 않는 것들을 '광신'으로 규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역설적으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미대사관 앞에서 선 보인 부채춤은 무속의 제의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무속이라는 전근대적인 요소를 구경거리로 만들어낸 것이 부채춤이다. 무속이라는 종교성을 제거하고 만든 합리적인 구현물이 결과적으로 '한미동맹'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불려나온 것이다.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근대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는 예증도 없는 것 같다. 김기종을 '괴물'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괴물'이 아님을 '타자'에게 증명하기 위해 한국의 보수가 펼쳐보인 퍼포먼스도 그 못지않게 괴물스러웠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보수의 입장에서 김기종이 한국 근대화의 나쁜 것을 다 모아놓은 결과물이었다면, 자신들의 부채춤은 반대로 한국 근대화의 좋은 것만을 다 모아놓은 결과물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둘 다 '괴물'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판단에서 좋고 나쁜 것을 나누어서 전자를 위해 후자를 배제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이런 괴물성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