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우리 시대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라고 독일 철학자 칸트는 말했다. 옳거나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성을 포기하지 않아야한다는 신념이 드러나는 발언이다. 생각하는 능력으로서 이성은 그러므로 비평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도 선험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 비판과 반비판이 교차하는 공론의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판단은 판가름 난다.
그러나 이 공론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진리의 척도가 필요하다. 예전 같으면 그 척도를 신과 같은 선험적 범주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물론 요즘도 주변에서 이렇게 사물 현상을 판단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지만), 여하튼 판단의 근거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바깥에서 찾는 모양새는 이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외계인이 등장해서 인류의 잘잘못을 심판해주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이런 외부의 시선이 등장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외계인들조차도 지구 세계와 연결된 또 다른 내부일 뿐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외계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이런 사정은 그냥 단순한 농담이라기보다 상상력에서조차도 외부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일 테다. 이 모든 상황은 완벽한 시뮬라시옹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물론 내 입장에서 이런 상상은 과장된 것이다.
모든 것이 시뮬라시옹으로 통합되었기에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기보다, 어떤 이유에서든 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 소멸의 상태 자체를 증상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작품은 생산되는데 비평은 없는 현상은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기보다, 그 자체로 진단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마치 이것은 사회의 위기 내지는 부재를 목도하는 시기에 ‘OO사회’라는 제목을 붙인 서적이 범람하는 것이나,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사회적 예술’이나 ‘사회적 네트워크’ 같은 말들이 횡행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사회’로 표현되는 것들은 정치의 자리에 가깝다. 정치적이라는 말 대신 ‘사회적’이라는 말이 즐겨 쓰이게 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치가 계급갈등을 가리킨다면, 사회는 연대를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 연대라는 말에 합당한 사회가 남아 있는지 상황은 심히 의심스럽다. 이런 상태에서 ‘사회적 미술’이나 ‘사회적 영화’는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 여기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은 ‘사회 문제’를 다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회 문제’를 다루지 않는 작품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런 사고방식의 효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 전제가 옳다면, 사회라는 연대의 영역은 갑자기 ‘사회 문제’와 관련된 영역으로 축소된다. 사회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차원으로 전락한다. 사회는 당연히 공통적인 것인데, 사회적인 것과 사회적이지 않은 것이 공존하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노동은 사회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이런 구분법에 따라 사회적이지 않은 노동도 가능한 것처럼 보이거나, 더 극단적으로 사회에 근거한 노동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비치게 만든다.
비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처럼 공론의 지반을 형성하는 공통적인 것의 상실을 암시한다.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없다는 것은 그러므로 근본적 조건의 변화라기보다 통합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없는 난국을 드러낸다. 공통적인 것을 흩어지게 만드는 것은 상품화이다. 상품의 가치는 차이를 통해 만들어진다. 상품화라는 것은 이런 차이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다. 차이들 사이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이윤은 극대화된다. 지리상 차이든 시간상 차이든, 상품화는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낸다. 앤디 워홀이 말했던 것처럼, 부자나 가난뱅이나 코카콜라를 1달러에 사먹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차이는 평등하다.
그러나 이 평등은 기계적인 차이화의 결과일 뿐이다. 이미 만들어진 차이의 체제에서 보장받는 평등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평등은 언제나 ‘잘못된 것’을 내포한다. 비평의 임무는 이 평등의 체제에서 지워진 ‘잘못된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개별적인 이해관계의 평등만을 보장하는 이 체제는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진리도 말해주지 않는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세계는 공허한 스크린이다. 비평은 바로 이 스크린 너머에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어떤 실체를 보여주려는 행위이다.
한때 융성했던 비평이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까닭은 이런 실천적 명제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진리를 진단해야할 비평이 상품의 차이만을 논하는 차원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것은 한낱 상품의 차이를 강화하는 장식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비평은 차이로 나뉘어져 있는 공통적인 것에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작품은 공통적인 것에서 기원한다. 이 기원을 환기시키는 것이 비평의 기능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있되 비평은 없는 곤혹은 당분간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비평에게 필수적인 것은 이념이지만, 지금은 이념 자체를 의심하는 시대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루카치의 말년을 다시 생각해봐야한다. 소련군의 탱크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 루카치는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고 한다. 이후 가택연금을 당하고 일절 정치적 글쓰기를 금지 당하자 루카치는 ‘문학비평’에 매진했다. 장르비평을 통해 현실정치를 우회한 ‘정치에 대한 철학’을 재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상황은 비관적이지만, 우리가 잘못 생각했다고 알아채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평은 다시 불려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옹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