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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은 사회적 구조와 의미망에서 발생한다는 전제 하에, 한 사람이 처한 사적고통을 공적언어로 해석하는 글을 인터뷰나 에세이로 쓸 예정이다. 말의 억압 시대,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글쓰는 사람.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등에서 글쓰기 수업을 열어 자기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며 자기언어를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2015)> <쓰기의 말들> <폭력과 존엄 사이> 등을 펴냈다.


인터넷 광고 페이지에서 아기 사진을 보았다. 통통하게 오른 볼살과 한 줌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가진 아기가 누워서 천장을 보는 옆모습이었다. 작은 생명의 연약함, 무구함, 천진함이 몽글몽글 만져졌다. 자세히 보니 어느 사회복지 단체의 광고 홍보성 페이지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은 아이들을 돌본다는 그곳은 이웃의 관심을 당부했고, 게시물 아래에는 ‘후원했다’, ‘우리 아이가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돕겠다’, ‘천사 같은 아기야 힘내라’는 댓글이 달렸다.

 

때는 연말, 날은 춥다. 원래 아기 사진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는데다 순탄치 못한 서사까지 더해지니 나 역시 그 페이지를 휙 나가지 못하고 어정거렸다. 눈꼬리에 물기가 맺혔다. 부모 없이 자라는 게 가여워서가 아니라 부모 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고 살아가야 할 아기가 애처로워서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게 부모인가 돌봄인가. 한국사회에서는 오직 부모에게 전가된 돌봄이고, 그것이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비극을 초래하는 것 같다.

 

한 사회복지시설에서 지내는 아이가 ‘비밀’이라는 글을 썼다. 너무 비밀이라 선생님만 봐야 한다며 글쓰기 수업이 끝나고 내게 가져왔다. 자기는 아빠, 엄마가 없는데 그걸 친구들한테 말하지 못했고 제일 친한 친구에게만 아빠가 없다는 걸 말했다고. 자기는 친구 집에 놀러가지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수가 없는데, 여기도 집이지만 친구를 데려오면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진실한 글들이 그러하듯 읽으면서 아이의 불안과 감정에 전염되어버렸다. 아이의 비밀스러운 고민은 그때부터 나의 고민이 되었다.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은 왜 비밀이어야 할까. 만약 우리사회가 ‘정상’가족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지 않은 사회라면,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제대로 큰다는 이상한 믿음 체계만 없다면, 저 정상이라는 게 얼마나 허술한지 낱낱이 드러난다면,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타인의 개별적 상황을 들어주고 보듬어주는 분위기라면, 아이는 비밀을 굳이 비밀로 채택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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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두서없는 물음과 한탄으로 꽉 막힌 속을 뚫어주는, 같이 한숨 쉬면서도 정확한 분노와 고민의 지점을 알려주는 미더운 한 권의 책을 만났다. 김희경이 쓴 『이상한 정상가족』이다.

우리 사회가 유독 정상가족에 집착하는 이유가 나온다. “가족은 부계혈연 중심의 유교적 가족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줄곧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개인을 지켜주는 거의 유일한 울타리였다.”(166쪽) 그러니까 사회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가족 내부의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삭막하다. 각각 밥하고 돈 벌고 공부하는 도구적 존재로서 서로를 구실 삼아 정상가족의 그럴싸한 외양을 유지한다.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드는 부모라는 권력”(10쪽)은 체벌이나 학대 같은 친밀한 폭력을 은밀히 혹은 대놓고 행사한다. 아동인권단체에서 6년간 활동하며 ‘아이들의 수난사’를 지켜본 저자는 묻는다.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저 물음에 대해 난 고개를 반쯤 젓게 된다. 수년간 글쓰기 수업에서 ‘어른들의 성장기’를 접하면서 한 사람의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은 어김없이 가족의 뿌리에 닿아 있음을 보았다. 유년시절부터 노동에 지친 아버지는 술 마시고 엄마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었기에 이제 아버지가 죽어도 눈물이 날 것 같지 않다고 자식은 말한다. 일 나간 엄마 아빠를 대신해 초등학교 때부터 가족의 노동력으로 동원되고 두 동생을 돌봐야 했던 어린 장녀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싸움에 휘말렸으나, 자식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매질을 한 엄마에 대한 30년 묵은 원망을 털어놓는다.

 

가족의 울타리는 핵가족 사회에선 억압과 공포의 밀실이 되기도 한다. 학창시절 최고 성적을 놓치지 않았던 아이는 너에게 들어간 학원비가 얼마인줄 아느냐, 1등을 못하면 강아지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시달리며 과중한 학습 노동을 수행했고 끝내 정신의 질병을 얻었다. 물론 가족의 헌신과 지지로 좌절을 감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말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통이 더 깊고 크다. 저자 말대로 “문제는 가족의 형태가 아니다. 예컨대 친부모라고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63쪽).

 

부모와 산다고 다 행복하지 않듯이 부모가 없다고 꼭 불행하지 않다. 복지시설에서 사는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이 아픈 것이지, 그 아이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아이돌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떠들고 치마 기장 줄이기에 연연하며 핸드폰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또래 아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부재를 무조건 동정하거나 차별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이가 기죽을 일도, 거짓으로 둘러댈 일도 없다. 

 

한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타인의 돌봄이다. 그 타인이 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부모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자식을 낳는다고 남을 돌볼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상태가 자동으로 세팅되지는 않으며 그랬다고 해도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128쪽)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 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란 굴레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 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채널예스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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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file [20]

  • 은유

나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중3 초에 그 학교를 알게 됐고 '공부 잘해야 가는 학교' '취업 명문'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가까스로 합격했고, 잠실에서 무악재까지 왕복 서너 시간 등하굣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난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일찌감치 따두었고 2학년 올라가서 5월에 국내 최대의 증권회사로 취업이 결정됐다. 그때부터 책 보고 시 베껴 쓰고 음악 듣고 학교 건물 뒤편 우애동산에서 낙엽 주우면서 한량처럼 놀았다. 금융권에서 여직원은 여상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여상 중에서도...

  • 2016-11-10
  • 조회 수 39238

가지 말고 쓰지 말고 file [5]

  • 은유

시내 길가에서 뷔페 레스토랑 간판을 발견한 아이가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갑게 말한다. “아, 애슐리다! 또 가고 싶다.” 나는 아이에게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본 내용을 말해주었다. 딸아, 애슐리와 자연별곡 등의 이랜드그룹 계열사 외식브랜드에서 지난 1년간 4만명이 넘는 아르바이트생 임금을 84억 원이나 가로챘다단다. 그건 연차수당, 휴업수당, 연장수당, 야간수당 등 수당이란 수당은 다 빼먹은 거라고. 일 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업체를 엄마는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딸아이는 열다섯살이다. 빨리 ...

  • 2017-01-09
  • 조회 수 16985

김제동의 말 file [2]

  • 은유

“너희들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종족들이에요.” “무조건 남자들은 앞으로 살면서 여자 말을 듣고 산다 생각하면 중간은 간다.” “여자들이 불쌍한 남자 잘 보살펴 달라.” “사람이 아니고 개다 생각하면 싸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인터넷에 떠도는 김제동의 강연 동영상 자막이다. 김제동은 ‘연애할 때 싸우지 않는 법’을 특유의 입담으로 설파하고 객석을 채운 선남선녀 커플들은 물개 박수를 치면서 박장대소다. 화기애애한 강연장 분위기를 보는 나는, 웃자고 하는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 쉰다.  김제동의 말은...

  • 2016-05-30
  • 조회 수 15451

말을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 file [2]

  • 은유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촛불 집회는 수업을 마친 후 학인들과 동행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삼삼오오 몰려간다. 일전에 문화공연에 정태춘이 나왔을 때 사오십대는 작은 탄성을 냈고 이십대는 물었다. “정태춘이 누구에요?” “음유시인인데, 우리나라의 밥 딜런 같은 존재랄까?” 난 가사도 음색도 최고인 가수라고 한껏 들떠 소개했다. 설명을 듣던 친구는 검색 본능에 따라 스마트폰을 켜더니 날 보여준다. 실시간 검색어 1위 정태춘. 집회에 온 젊은이들이 ‘늙은 가수’를 모르는 것이다.  지난 주말 집회에는 남성 댄스그룹 DJ DOC가 문화...

  • 2016-12-05
  • 조회 수 10736

남의 집 귀한 자식 file

  • 은유

대학 밴드 동아리에서 키보드를 치는 큰아이가 정기공연을 한다고 해서 구경을 갔다. 홍대 앞 작은 클럽. 벽면은 포스터 붙여다 뗀 테이프 자국이 너덜너덜했고 조명은 교차로 신호등 같은 삼색불빛이 단조롭게 깜빡였다. 아이들이 무대에 올랐다. 사운드가 터지고 조명이 켜지자 기타를 멘 여학생의 어깨끈에서 무슨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귀한 자식’. 동그란 장식용 배지였다.   어느 알바생 유니폼 등쪽에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이미지를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 진상 고객이 얼마나 많으면 저랬겠냐, 사장님 센스 ...

  • 2015-09-14
  • 조회 수 4238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이라는 환상

  • 은유

“맞벌이 하시죠? 수레는 혼자 있는 시간에 뭘 하면서 보내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이 담임에게 전화가 왔다. 학부모가 되고부터 핸드폰 액정에 학교 전화번호만 떠도 가슴이 철렁한다. 학교는 어쩐지 불길의 정조를 몰고 온다. 담임의 부름을 받고 불안을 안고 몇 시간 후 빈 교실에 마주 앉았을 때, 담임은 물었고 나는 순간 깜깜했다. 뭐든지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말할 게 없었다. 월수금 영어학원 간다고 둘러댔지만 고작 한 시간 반. 끝나면 아이는 또 무얼 할까.   상담 중 담임이 말했다. 지난주 과학 시...

  • 2017-03-22
  • 조회 수 3672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 file [1]

  • 은유

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기회에 관심이 많다. 이제껏 사랑을 몇 번 해봤느냐는 물음을 실없이 던져보기도 한다. 상대는 거의 머뭇거린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의 기준 설정부터 간단치 않은 거다. 내게 사랑은 나 아닌 것에 ‘빠져듦’ 그리고 ‘달라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엮여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면서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게 되는 일. 연애가 그랬고 공부가 그랬다. 이전과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계기적 사건이 사랑 같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는 내 어설픈 사랑 연구에 맞춤한 세 편의 이야기가 나온...

  • 2017-05-30
  • 조회 수 3321

자신이 한 일을 모르는 사람들 file [5]

  • 은유

‘신생아 쓰레기통’. 인터넷 포털 화면에 검색어를 넣었다. 며칠 전 지나가듯 본, 신생아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린 사건의 기사를 찾기 위해서다. 스크롤을 내리니 수십 개의 단신이 뜬다. ‘강릉 음식물 쓰레기통서 신생아 발견…‘인면수심' 부모는 누구?’ 가장 자극적인 제목이다. 인면수심의 ‘부’는 정체불명. ‘모’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니 이렇다. 오후 6시40분쯤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집 화장실에서 애를 낳았다. 아기를 낳고 나니 키우기가 곤란하고 겁이 나 수건에 감싼 후 비닐봉지에 넣어 택시를 타고 10km 떨어진 곳의 음식점 ...

  • 2015-12-21
  • 조회 수 3258

한 병 딸까요? file

  • 은유

배우 윤여정이 ‘박카스 아줌마’로 나온다기에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챙겨보았다. 윤여정이 맡은 배역은 소영.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삼팔3.8따라지’(전쟁 고아)로 태어나 식모살이, 공순이, 양공주 등 여러 직업을 거친다. 젊었을 때 미군 흑인 병사와 살림을 차렸고 아이를 낳았지만 키울 여건이 안 돼 해외로 입양 보낸 사연이 있다. 하필 전쟁통에 삶에 제약이 많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필두로, 살면서 몇차례 난폭한 우연을 통과하자 남은 거라곤 몸뚱이 뿐. 65세 여성 노동자는 가방에 박카스를 챙겨넣고 파고다 공원 일...

  • 2016-11-14
  • 조회 수 3002

상처의 수만큼 우리는 돈을 번다 file

  • 은유

개강 후 두 번째 수업에 과제 발표자가 결석했다. 과제 부담일까, 개인 사정일까. 궁금한 마음에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저, 오늘 안 오셔서 연락드렸어요.” “네? 지난주에 수강 취소하고 환불받았는데요.” 예기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나는 전달을 못 받았다며 얼버무리고 끊었다. 문자로 남길 걸 괜히 전화했나. 불편한 상황을 만든 나 자신을 책망했다. 그날 전화를 끊고 수업을 잘 마쳤다. 집에 가는 길, 얼마 전 통신사 해지방지팀에서 일하다가 자살한 현장실습생이 떠올랐다. 취소·환불이란 말들이 귓속으로 여과 없이 파고드는 따...

  • 2017-05-01
  • 조회 수 2603

고양이 키우기에서 고양이 되기로

  • 은유

수레 집에 혼자 있겠구나. 밖에서 전화하면 딸아이는 정정한다. 아니, 무지랑 둘이 있어. 아, 그렇지 무지가 있었지. 자꾸 까먹는다. 무지는 우리집 고양이다. 사람이 아닌 고양이라서 나는 아이 혼자 있다고 여기고, 고양이를 자신과 동등한 개체로 여기는 딸아이는 둘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기가 이토록 어렵다.  3년 전, 딸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네 마리를 품고 있는 장면이 ‘명화’ 같았다. 친구의 지인 새끼 고양이들인데 다 입양이 결정됐고 한 마리만 남았다며 우리...

  • 2017-07-02
  • 조회 수 2476

나쁜 어른으로 오래 늙지 않으려면 file

  • 은유

몇 해 전 추석을 앞두고 외숙모에게 전화가 왔다. 나이 들어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음식 장만이 힘들다며 추석은 쉬고 설날에만 오면 어떻겠냐고 주저주저 운을 뗐다. 그간 매년 명절에 아버지를 모시고 외가에 갔었고 숙모는 20인분 가량 친지의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후엔 우리 가족을 각별히 챙겼다. 명절상에 특별요리를 더한 상차림이 예순을 넘긴 숙모에겐 고단한 노동이었을 텐데 미리 헤아려드리지 못해 너무도 죄송했다.   아버지에게 외숙모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숟가락 몇 개 놓는 건데”라며 표정이 ...

  • 2017-09-26
  • 조회 수 2318

죽음과 죽음 사이 밥이 있다 file [1]

  • 은유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아버지)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이웃 아줌마) 장례식으로 끝나는 수미쌍괄식 구성이다. 검은 상복의 여인 네 명이 주인공. 15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통해 만나게 된 이복 여동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다. 바닷가 마을과 집이 주무대인데 잔멸치 덮밥, 카레 등 식사 장면이 많이 나와 군침을 돌게 하니 이 작품을 ‘먹방 영화’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내게는 ‘죽음과 죽음 사이에 밥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가족 영화로 다가왔다.  이 영화는 없음으로 채워진...

  • 2016-01-05
  • 조회 수 2154

슬픔 주체로 살아가기 file

  • 은유

세월호 1주기를 앞두고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었다. 이 책은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라는 부제가 달린, 시인 소설가 평론가의 글 모음집이다. 우리는 돌아가며 마음에 남는 문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도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수전...

  • 2017-02-06
  • 조회 수 2010

저자가 뭐라고 file

  • 은유

지난 4월 나의 책이 한 권 나왔다. 책을 썼다, 책을 냈다 같은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난 그걸 책을 ‘낳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 없던 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에 엄살을 부리고 싶어서다. 정말이지 출간은 출산처럼 지난하고 지루했다. 원고를 다 쓰고 나면 부족한 데가 보여서 다듬어야 하고, 이제 되었는가 싶으면 빈틈이 드러나 메워야 하는 식이다.  원고를 보고 또 보는 것 외에도 프롤로그, 에필로그, 저자 소개까지 쓰고 또 써야 하는데, 그 과정이 꼭 산통 같다. 괴로움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뭔가 완성될 듯 되지 않...

  • 2015-10-12
  • 조회 수 1867

그날의 눈은 나를 멈춰세웠다

  • 은유

10년간의 프리랜서 생활을 청산하고 직장을 구한 건 고정 급여가 필요해서였다. 은행 대출금을 석 달 이상 갚지 못하면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고 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애들 데리고 이사 다니기 싫어서 마련한 궁여지책인데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니 얼마나 두렵던지. 매달 대출 상환금만큼의 수입 확보를 위해 취직을 택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니까 꼬박꼬박 통장에 돈이 들어왔고, 그 돈은 대출금으로 고스란히 빠져나갔다. 직장 생활 1년이 될 즈음 어느 날 출근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굵고 탐스러운 눈...

  • 2017-03-15
  • 조회 수 1645

엄마입니다만, 어쨌다구요. file

  • 은유

“엄마는 생일날 우리랑 안 있고 왜 친구 만나러 가?” 아이가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면접에 임하는 사람처럼 성심껏 답했다. 우리는 매일 밥을 같이 먹고 외식도 자주 한다. 근데 생일에도 가족이 꼭 함께해야 하는 걸까. 엄마는 아빠나 너네들이랑 같이 있으면 자꾸 일하게 된다. 동생이 어리니까 밥 먹을 때도 반찬을 챙기게 되고 신경이 쓰인다. 일상의 연장이고 특별하지 않다. 엄마도 생일에는 마음 편히 보내고 싶다고. 나는 첫아이를 저렇게 질문이 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둘째...

  • 2017-02-27
  • 조회 수 1431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는 말

  • 은유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유가족이 동의할 만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자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 대한 원성과 비난이 높았다. “대통령이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는 말까지 돌았다. 기사에 달린 댓글로만 보다가 나는 얼마 전에 직접 듣게 되었다. 하필 ‘애를 안 낳아본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여성이 대뜸 말했다. 박근혜가 엄마가 되어 보지 못해 생때 같은 아이들의 죽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래서 세월호 문제가 미궁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조마조마했지만 모두가 무안해질까봐 어물쩡 넘어갔다.  ...

  • 2015-09-14
  • 조회 수 1321

시를 배반하고 사는 시인들이여! file

  • 은유

시월 이후 내 하루 일과는 ‘문단_내_성폭력’ 검색으로 시작됐다. 자고 나면 터져 나오는 증언을 식후 30분 이내에 챙겼다. 꼬박꼬박 듣기로 말하기를 지지했다. 모 시인, 모 시인, 모 소설가, 모 시인은…. 술자리에서 가해지는 너절한 희롱의 말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이 어린 습작생에게 등단을 미끼로 “여자는 남자 맛을 알아야 한다”며 접근하고 성적 탈선이 미학적 실천인 양 꼬드기고 금품 갈취를 행했다는 기함할 증언까지 나왔다. 이런 일들을 마음에 쟁여두고 살았다니 그 삶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무수한 성폭력 사건을 접하...

  • 2016-12-15
  • 조회 수 1185

어머니와 밥

  • 은유

몇 년전 한 여성 소설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서울의 한적한 동네에 아담한 정원이 있는 단층 양옥집으로 찾아갔다. 거실 책꽂이 한칸에는 무슨 무슨 문학상 상패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집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은 주로 밤 10시부터 새벽 서너시까지 쓴다고 했다. 그에게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새벽까지 글을 쓰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괴로웠던 터라 개인적인 질문이라며 아이 아침밥은 어떻게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침밥 안 먹는 아이...

  • 2015-09-14
  • 조회 수 1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