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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조양규31번창고.jpg  조양규 <31번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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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예술은 삶에 대한 예술가의 거울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신을 포함해, 결국 자신의 생의 과정과 생의 현상이 끊임없이 자신의 의식에 되새겨지며 반사된다. 이렇게 새겨진 내용은 체험과 경험에 대한 개인적 판단을 통해 세계와 자아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예술가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이 특수한 관계를 느끼고, 거기서 경험한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지닌 주체들이다. 동시대의 예술만 보더라도 그렇다. 숱한 예술가들이 '삶의 문제'를 주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런 고민들은 결국 자신의 의식에 반영된 현실과 거기서 느낀 '문제적 삶'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둘러싸고 생겨난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평가는 다른 기준에서 수행돼왔다. 물론 사람마다 사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소재와 주제가 얼마만큼 예술적으로 '형식화' 되었느냐의 문제를 기준으로 해왔다. 즉 예술적 창조물의 예술적 형상화 가치(탁월함, 우월성)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삶의 문제들을 주제로 작품을 해왔음에도, 예술가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진실' 문제는 비평가의 시선이 향하는 주요 문제가 아니었고, 예술의 진리내용은 예술계나 대중의 쑥덕공론으로 떠돌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아니면 예술 경향의 하나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몇몇 작품들을 보면 인생을 대하는 전망perspective과 가치론value theory에서 비판적 지성을 형성하기는 하나, 계열화seriation되고 축적되어 인류 전체를 위한 지혜가 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예술가의 '인생을 위한' 발언들은 마치 시시포스sisyphus의 행위 같은 것이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은 끊이지 않고 삶에 대해 비판 한다. 삶의 고통과 배후의 진실에 대해, 우월한 능력을 추앙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며, 금지와 장애로 인한 고통, 정직함과 교활함의 대결, 생활의 아이러니와 비루함, 굶주림과 학대의 공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모습은 인류 영혼의 거대한 신화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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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René Descartes 이후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사는 '판단'judgment and decision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판단의 문제는 경험을 분석해서 사회적 이성의reason의 효율성efficacy을 찾자는 것이고 경험의 총체상總體象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옛 사람들은 경험에 대한 판단을 초능력에 의탁했다. 초월적, 선험적 세계관에서 보면, 판단judgement 은 신적인 힘이고, 인간 능력faculty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판단력 향상을 통해 경험한 것의 내용을 진실에 가깝게 이해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들이 있어왔다. 경험을 분류하고 분류된 경험에 과학적 인식cognition & evaluation을 부여하기 위해 연구방법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서구문화를 이끌었다.

칸트I. Kant는 <순수이성비판>The Critique of Pure Reason의 머리말 첫 구절에서 이성reason의 특수한 운명 곧 해답도 없고 종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면해 있는 상황을 언급한다.  1) 그리고 상황에 대면해 진실과 허위, 동일성과 차이, 동의와 반대 등을 위해 필요한 특수한 이성 능력에 대해 밝혀나간다. 서구인들은 이렇게 눈앞에 주어진 끝을 알 수 없는 무한대한 세계와 세계의 사건들을 파악하기 위해 공식公式, schema들을 만들었다. 시각적 표현에서는 원근법으로 눈 앞에 보이는 대상의 전모를 재현하고자 했고, 의회민주주의는 전체 인구의 정치적 의지 재현을 위해 고안됐다. 원근법과 의회민주주의는 속성상 동형同形의 것이다. '질'質을 '양'量으로 표현하는 근대적 '표현의 정치학'의 양면兩面이다.

하지만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표상된 公式공식의 '대표성'은 대표성을 상징한다는 것 때문에라도 사실상 억압기재로 전화轉化된다. 부여된 '대표성'은 실제 경험된 삶의 표현되지 못한 진면목에 대해 판단할 기회를 남기지 않는다.

현대 기호학과 언어학에 이르러서는 경험과 판단의 문제를 보는 시야가 달라진다. 기호학은 경험을 구성하는 언어와 대상을 모두 약속에 의한 것으로 보기에 실제 삶의 내용은 다시 불가지의 것이 된다. 말과 표상체계도 임의적이고 결국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사실 이 때쯤이면 사람들은 세계와 사물에 대해 전하는 모든 말들, 말의 수사修辭로 돌아가는 현실세계를 쉽게 믿지 못한다. 모두를 위한 규범(Common good 혹은 Good sense 혹은 sens commun)이 과연 가능한지도 확신할 수 없다.

기호학과 언어학은 구축적 학문이 아니다. 현상現像의 모든 것에 속고 있음을 알게 된 학문이다.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표리부동'表裏不同, treachery이 실제 세계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간파하기 시작한 시대정신의 학문이다. 기호학은 아주 어려운 개념들로 표현되고 이론지형들 안에 변별점도 있지만, 포괄해 보면 일종의 해체주의Destruction 학문이다. 언어로 전달된 기존 지식내용(기의, signified)의 해체요, 이것을 표현해온 지식형식(기표, signifier)의 해체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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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술비평과 미술사학에서는 예술가의 경험과 판단의 응집체Coherency, Collection of entities를 예술에 내재된 '형식'Form, Eidos 이나 '양식'Style 개념으로 파악했다. 주로 독일에서 사용된 '형식' 개념은 실체적 리얼리티로 잡종적인 현실에 대한 우연적인 지식이 아니라 의미있는 경험과 가치판단의 담지체를 뜻해왔다. 경험과 판단의 모든 실체적 진실을 확립해줄, 의미가 말뚝 박을 수 있을 절대기준의 닻이 '형식'개념에 있었다.

'형식'이란 단순 '질료'Material, hylē인 체험과 경험을 천재적 인식으로 통찰하고 승화시킨 새로운 '리얼리티'를 의미한다. 새로운 '리얼리티'가 창조해낸 자연과 역사, 인간과 사회의 이미지는 신화적 인물들의 치열한 인정투쟁 장이 된다.

경험주의 전통이 강한 영미권의 형식개념은 조금 더 자의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지각perception 상의 '형태'(Gestalt:독일어)로 취급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형태Forme를 '이미지'Image의 '구조'로 다루었다. 뵐플린H. Wölflin의 '예술적 비전'Artistic Vision 개념에 이어 파노프스키E. Panofsky와 아른하임R. Arnheim과 곰브리치Gombrich의 미술사학 개념들은 미학과 더불어 '아름다운 형식'을 근·현대 의미론의 주인공(중심기표)으로, 다시 말해 서구 인문학의 가치기준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규정했다.

신이 없는 세계, 인간끼리의 세계에서도 '의미'는 존재해야 했고, '의미가 작동하는 이유'가 될 곧 닫혀져서 완결적이며 자율적인 '의미체계'가 필요했다. 그 기능을 담당한 것이 인간이 창조한 가치였다. 미술사학은 근·현대의 문명사적 요구를 가시적으로 담보해낸다.

정치학과 역사학, 사회학에서 형식 개념에 상응하는 것은 '구조'와 '이념', '시대정신'과 '문화'개념이다. 인류는 '가상적 실체'virtual reality, 즉 '구성체'(social Formation)의 개념 매개 없이는 사회적 인식론과 존재론을 작동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해답도 없고 종결되지 않는 경험에 직면해' 2)훈련된 관찰기술과 창의적 비전으로 예술작품 속에 '의미'meaning가 생성된다. 그리고 의미의 해석을 위해 작품 속 '의미'가 형성된 배경, 다시 말해 시대와 작가의 총체적 경험내용과 그것이 의미화 되는 과정, 의도를 추론할 수 있을 일종의 개념공식들이 제시된다.

결국 '의미'는 행위의 '의도'intention 가 목적하는 뜻이 된다. '의미'의 '의미'는 욕망의 산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미'와 이에 따른 '가치' 개념은 개별적 지각상의 주관적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이미지'와 '형태'개념은 '기호'Sign 개념에 자리를 내준다.

초월적이거나 선험적인 실체의 존재를 부정한 인류사회는, 사실상 이런 개념들을 신적이기까지 한 '가치'의 담지자로 삼아 경험과 판단의 기준을 삼고 대상평가와 행위평가의 우월한 기준으로 정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지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진공에 떠있을 수 있는 자기중심적 자율적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체'를 발판으로 현실경험의 기준을 삼고 이것들에 담겨진 모든 고투의 정당성을 전파했다. 역사를 지배했다. 하지만 '모든 개별적 경험과 의지'를 '질'로 재현하는 방법과 체제가 구축되기 전 까지는 '대표적 가치'가 행사하는 헤게모니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가치기준과 평가기준의 투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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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優生學, Eugenics, 사실 일반인들은 낯설어하는 단어이지만, 인류사를 관통해온 개인적, 사회적 현실경험과 판단 배후의 '숨은 신'이자 가치평가와 행동결정의 근거이다. 우생학은 사람들이 원하는 더 우수한 형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선별해 더욱 더 개선하고, 반대로 원하지 않은 형질을 제거하기 위한 연구이다. 우생학은 열등한 '질'을 죽이기 위한 노동, 다시 말해 특정 집단이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다른 가치기준을 지닌 것, 그래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 곧 타자성을 죽이는 노동에 기반해 생의 활력이 증강되는 사회의 생철학을 대변한다. 이로 부터 우월함과 열등함 혹은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을 둘러싼 진실게임은 시작된다.

'질'質의 개념, 곧 원래는 모든 개별자의 속성가치를 지시하는 개념이었던 질의 개념은 가치 위계의 상층부의 속성을 지시하는, 좀 더 바람직한 것을 가리키는 개념 곧 '우성'優性을 가리키는 개념이 됐다. 그래서 생활의 '발전' 개념도 공동체의 우생학적 기준을 소유하는 엘리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의미하게 됐다. 지배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의미론' 의 주인이 원하는 더 높은 수준의 '질'(사용가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 더 많은 '양'量(교환가치)의 투자가 필요해졌다.

'질'의 본래적 개념은 각각의 고유성으로 인해 스스로 평등한 속성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평등이란 모든 개별적 질의 동등한 가치를 의미했는데, 현실에서는 각각의 고유성으로 인해, 고유성이 다양화되는 그 만큼 모든 개별적 질은 철저히 계급화 됐다. 경험과 판단의 질도 계급화 됐다. 교육도 우생학적 경험과 판단기준을 학습하기 위한 것이 됐다.

'우월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실크로드가 비록 비단과 향료 등 귀한 물건을 구하고자만 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경험상 '귀하다'고 여겨진, '필요하다'고 판단된 우수한 물건들에 대한 '욕망'이 뚫은 길이다. 우월한 사람과 물건이 만들어낸 '문명'이나 '문화'는 모방할 필요와 지배 욕구를 일으켰다. 우월함은 크고 작은 영웅들의 역사가 됐으며, '생산력 발전'은 우성화 교육을 받은 엘리트의 욕망이됐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기실 계급의식이란 사회주의적으로 우월한 종자의 선택과 거세 기준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건 우월해야 살아남는다면, 경험과 판단의 인식요구도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그래서 어떻든 우월한 자가 됐다면,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제거하고 파괴하는 것이 인간의 장, 단기적 삶의 전망에서 볼 때 더 훌륭한 선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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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역사는 사실 이런 우생학적 선택과는 다른 많은 이야기들도 들려준다. 보건데 인류사의 대표적 서사들은 이 문제를 들러 싸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 서사들에 나타난 주제는 세상을 두루 경험하면서 들은 영웅담이나 지배적 힘과의 갈등으로 인해 겪은 의미심장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역사가 진행되어 온 모습, 삶의 이같은 복합적 단면들에 대한 궁극적 판단의 실마리들을 얻고자 하는 이야기들이다.

루카치G. Lukács가 <소설이론>The Theory of the Novel에서 분석하듯 '이야기'narrative는 경험의 총체적 양상을 전달하거나 경험 판단을 관객에게 맡기면서 '사건'에 숨겨진 뜻을 묻는다. 몽골의 서사시 <장가르>Jhangar와 인도의 <바가바드기타>Bhagavadgītā, 고대 아이슬랜드 서사시인 사가Saga에서 <여우 레이너드 이야기>The History of Reynard the Fox 뿐 만 아니라, 초서G.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와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와 <프루아사르 연대기>Jean Froissart Chroniques, 사보나롤라G. Savonarola의 <속세를 경멸하며>On Contempt for the World와 카벤디쉬G. Cavendish의 <토마스 울지경의 생애>The Life of Thomas Wolsey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라비안 나이츠>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와 단테A. Dante의 <신곡>La Divina Commedia과 라블레의 <우화집>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물론이고, 코울리지와 윌리엄 블레이크의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적 시들 조차도 크게는 이 범주에 속하고,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와 발자크의 '인간 희극' 연작도 그렇다.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 잡지 라 페유(La Feuille)를 창간한 조닥사 (Zo d'Axa)가 개인주의적, 심미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서 행동이 곧 예술이라고 믿었던 것도 이 전통에 속한다. 호가트와 고야와 그랑빌과 도미에, 반 고흐와 동시대의 무정부주의적 반자본주의자들이었던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시냑 Paul Signac 도 이런 작가에 속한다. 이들의 작품들은 지금의 '문화이론'Cultural Studies의 전사前史라고도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티 담론이 해체해버린 세계를 뒤로하고,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체계 바깥에서 다시 의미에 대한 담론을 구성하고 나선 이론이 현단계 '문화이론'이고, 경험과 판단에 대한 지구사gloval history적 관점에선 통섭Consilience과, 삶에 대한 복합문화적multicultural 전체상을 그려내는 것이 문화연구의 학문적 과제라고 할진데, 전통적 표상체계에 포함되지 않았던 현실경험의 진실표상들을 탐구했다는 차원에서 보면, 앞서 언급한 서구 비판적 인문주의 전통은 당시의 문화연구에 속한다.

경계 밖 경험에서 보면 경계 안의 힘들은 구조화된 견고한 권력으로 작동되는 가상의 힘일 뿐이다. 자본과 제도의 힘으로 작동되는 힘이다. 하지만 이 힘들은 이해관계의 우생학적 기준이 변하면 해체 가능한 구성체의 힘이다. 그런데 내부에서 보면 현실이 지닌 힘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든 카프카(Franz Kafka)의 '성채' The Castle처럼 보인다.

오늘날 진보적 예술은 전통적 예술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 여전히 제도예술 개념 틀에서 생산되지만, '성채'에서 경험한 것의 내용과 경험한 내용에 대한 판단을 묻는 것을 작업의 목적으로 한다. 작가들에게는 경험한 '사건'event, événement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질문이 동시대 예술의 주요 과제요 창작 동기가 된지 이미 오래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왜 이들의 발언과 행위는 아직도 예술 영역 내에서만 언급되고, 전시와 작품은 매일의 신문기사 속 사건처럼 기사화됐다 잊혀지고 마는가? 아니면 미술관에 보존되어 우성형질의 계보로 기록되겠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해안가에 부딪히며 거품이 되는 억만, 만만의 포말처럼 거대한 우주의 역사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우주와 죽음의 소리에 이들이 소통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은 한 순간의 꿈도 아닌 채 삼켜진다. 언젠가 부터 전시나 작품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예술이 현실경험상을 그려내고 판단하며 현실을 보는 눈을 심화시키고 다각화해온 역사는 인류사만큼 오래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숱한 작가들이 다채로운 작업들로 현실을 직시하고자 했으며 현실의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유명, 무명의 작가들이 수많은 작품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재현해냈다. 전 세계 모든 공동체마다 예술의 역사가 있고, 현대사회에 들어서면 거의 모든 지역마다 전업예술가들이 있다. 이들이 묘사한 현실 속 리얼리티도 각양각색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의 역사가 있다. 이 밖에도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과 삽화 등의 영역에서도 개인들이 경험한 세계와 보고들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작가들은 세계를 해석하며 현실을 분석하기도 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 고발도 넘쳐난다.

인류가 겪어온 세계, 살아온 경험 그 가운데는 기상천외한 이야기에서 천인공노할 이야기, 비밀스럽고 혼란스럽고 흥미로운, 그야말로 희노애락이 담긴 비극과 희극의 사건들이 존재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의미의 논리>The Logic of Sense에서 '사건'event을 '의미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특이성'le singulier 이라고 부른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건의 특이성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더 이상 작품을 '순수예술'Fine arts 차원의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예술을 자유롭고 개별적인, 특수한 언어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장이자 룰이라고 여길 뿐이다. 예술이라는 '방식'을 통해 사건으로서 특이점을 보이는 현실상을 드러낼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들이 밝혀낸 그 숱한 사회적 리얼리티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아직 현실의 총체상, 경험의 총체상에 대한 그림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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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서양예술의 역사와 그 안에 묘사된 숱한 삶의 이야기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서구인들에겐 우리의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낯설다. 한편 비록 우리와 이웃해 있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예술사에 담겨진 그들의 이야기, 나아가 근동과 중동 아시아 각국과 각 지역의 예술사가 반영하고 있는 삶의 경험, 그들의 시선에서 파악된 그들의 경험들은 한국인들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예술사에 반영된 그들의 경험과 우리 예술사에서 파악된 경험을 동시에 매개할 수 있었다면, 나아가 전 세계 각 지역의 경험이 예술을 통해 서로 매개되고 인식되며 경험적 전체상으로 파악된다면, 각국의 자국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이웃을 보는 눈, 세계와 인류 보편사를 이해하는 관점은 달라질 수 있을까? 자국만의 현실을 중심으로 자신의 개인적 삶의 경험을 파악하는 것과 그 현실과 동시에 벌어졌던 인접국, 나아가 세계 전체 속에서 개인의 삶이 연결된 지점에서 부터 각자의 삶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인류가 살아온 경험에 대한 판단과 이해는 달라질 수 있을까?

알프레드 히치콕은 한 인터뷰(선댄스 채널)에서 모든 공동체 마다 고유한 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3)각각 상이한 선과 악 개념을 지닌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이 겪은 특이한 경험들을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런 경험들에 대한 각 사회마다의 판단은 미 연방 법무부를 Department of Justice라고 부르는데서 알 수 있듯, 굳이 예술이 아니라도 이미 각 공동체의 숱한 판례문들과 경찰의 사건 기록으로도 나와 있다.

그렇다면 각 공동체의 판례와 경찰의 사건기록과 예술가들이 지어낸 개인적 경험담과 자서전, 평전, 일기 등을 사건유형과 사건의 해석별로 모아 볼 수는 없는가? 세계 모든 예술의 주제, 예술이 그려낸 경험의 의미와 사건을 통합하고 분류해서 예술가들이 행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 경험이 의미하는바 인간과 사회의 본질, 그래서 그 굴레와 가능성의 지점들을 살펴 볼 필요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목적의 아카이브는 있을 수 없는가?

하지만 또 이런 아카이브가 존재한다고 해도, 경험에 대한 '우생학'이 아니라 사회적 지평에서의 '반성적 판단력'Reflective Judgement 이 실현될 수는 있을까? 반성력이 최소한이나마 사회기관과 사회정책상의 판단에서 가능해질까? 곧 보편적 진리, 만인에게 최선인 행위방향이 주어져 있지 않은 현실에서 특수한 것(particular, 특수한 개별적 사건, 행동, 죄악, 열성劣性)을 만인을 위한 선(보편universal, 공통선)의 방향에서 종합적으로 포용하자고 할 때 필요한 판단력, 지구상의 모든 개별적 사회와 삶이 당면한 가장 인간적인 어려움의 양상들이 안고 있는 특이점들, 그 지점을 전 지구적 보편성의 요구로 매개시킬 수 있도록 하는 판단력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해서, 그렇더라도 민주주의의 질적 완성, 모든 개별적 질들이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완성시킬 수 있는 정치적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해질까?

하지만 만일 비슷하게라도 가능하다면, 반성적 판단력이 행하는 진리치 다시 말해 공공성의 새로운 보편성 확립을 위해 예술가들의 발언은 서로 간에 매개되고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어하지 않을까? 만일 이렇게 해서라도 새로운 보편주의를 확보할 수 있다면, 해체주의를 극복해가는 새로운 보편주의, 실제로 칸트가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류학>Anthropology from a Pragmatic Point of View에서 말하는바 인간에 대한 경험과 인간의 경험에 충실한 보편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또 한편으로 보자면, 이런 목적과 체계를 지닌 예술아카이브만으로 이런 일들이 그렇게 간단히 가능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 지구적 예술사의 통섭과 거기서 읽어낼 수 있는 예술학제 간 연구로만 인간 경험의 총체상과 이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인류사의 민주주의적인 보편적 욕망에 대한 총체성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학문은 어떨까? 학자들도 학문의 융, 복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경우만 본다면, 학문의 융, 복합 이론 자체가 새로운 학문분과가 되어있거나 동시대에 체험한 것을 여러 학문적 관점으로 나누어 검토한 다음 이것을 모아 보는데 머물러 있다.

어쨌든 예술아카이브를 예를 들긴 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아카이브든 다른 무엇을 통해서든, 인류가 해온 진지한 성찰들이 올바르게 축적되어야 할 필요에 대한 것이다. 학문과 예술이 학문과 예술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험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위해, 그리고 학문과 예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탐구로 함께 매개되어, 인간에 대한 판단의 질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통섭을 위해서는 학문체계가 예술을 인간에 대한 연구 결과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통섭에 나서든지 하는 일이 우선 전제되어야한다. 조금 더 얘기 하자면, 통섭은 분과학문의 통섭에 앞서 전 지구상의 모든 전통적 학문 간의 통섭이자 각기 전통 속 학문별 내적 통섭이요 학문간 외적 통섭이라야 하고, 각국의 근, 현대 학문성과의 국가 간 지구사적 통섭이요, 개별 사회의 공적 판단사례들과의 통섭이라야 의의가 산다. 각각의 공동체가 발전시켜온 학문 속 경험과 판단에 대한 이해가 예술과 사회공론의 세계체제의 범주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 같은 것이다.

앞서 말했듯 서구학문과 예술은 경험과 판단에 대한 연구였다. 하지만 그 결과들이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삶의 총체상을 그려내지는 못했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보면 영미학계는 실용주의 전통이 강해 '경험'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효율성efficiency 을 위한 실증주의학을 하고 있고, 유럽 대륙학계의 영향을 수용해서는 '반성'이나 '판단' 같은 개념을 다루면서 철학의 우월함, 숭고함을 논하고 있다.

우리에게 '경험'과 '판단'은 각각 다른 곳에서 온 학문 용어로 둘은 분리된 용어이다. 그래서 우리 학문은 시, 공간 속의 인간 삶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은 상태일 뿐 만 아니라, 남과 북 학문체계도 너무 상이해 한민족 공동체에 대한 공통된 역사인식 조차 불가능하다. 단지 민족성의 우수 형질에 대해서만 이해를 공유한다.

글 서두에 밝혔듯 예술가들의 작업이 시시포스 신화 속 행위처럼 보인지 오래다. 그래서 나름대로 어쩌면 공상적일 수 있는 방법 까지 동원해 이런 상태를 지양 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보다가 결국에는 학문과 예술을 통섭할 필요와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데 까지 왔다. 글을 정리하자면 예술과 학문과 사회적 공론의 현실논리가 총체성에서 매개되고 학문적 인식을 이뤄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전체 질의 차원에서 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과 예술은 어쩌면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다. 현재의 국가적, 민족적 혹은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인식과 이해가 아니라, 희미하나마 인류를 위한 희망의 구체화를 위해 삶이 겪는 문제들에 대한 이 같은 축적된 지구사적 경험과 판단의 문제 틀이 공공적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학문 간에, 학문과 예술 간에, 그리고 예술과 개별적 특이한 경험들 사이를 매개할 수 있어서 모든 '질적인 것', '질적인 것'의 전체상이 놓여있는 문제 상황을 일정정도나마 인식할 수 있어야한다. 이런 일이 현실화되면 예술가의 작업들은 마치 경전 속 경고의 목소리처럼 인류가 귀기울여야할 참다운 자기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시 말해, 신의 한수로 지켜져서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비전의 목록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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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스탄불에서의 전시 <미지의 힘_아트선재센터 기획>전 도록에 실린 글이다)




[1] Kant, Immanuel. Trans. J.M.D. Meiklejohn. "Preface to the first edition, 1781." The Critique of Pure Reason (2013): 3. A Penn State Electronic Classics Series Publication, 14 Apr. 2010. Web. 14 Jul. 2013. <http://www2.hn.psu.edu/faculty/jmanis/kant/critique-pure-reason6x9.pdf>

[2] Ibid.

[3] The Men Who Made the Movies : Hitchcock. Dir. Richard Schickel. Perf. Alfred Hitchcock, Cliff Robertson. The American Cinematheque, 1973. Televisio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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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판단의 아카이브_필요하지만 없는 것에 대한 단상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319

  조양규 <31번 창고> * 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