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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조회 수 428 추천 수 0 2017.04.01 16:50:52

월간미술 4월호 연재 글(그간 반년 가량 개인사정으로 중단 했다가 다시 시작)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1.

맥 컴퓨터와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한 텍스트나 이미지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호환을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연결해야 한다. 호환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단은 결국 상품으로 구입해야 한다.

구글 시트(Google Sheets)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 워드로 쓴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호환이 안 되면 텍스트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 작업들을 메일로 전송하고자 할 때, 상대방 컴퓨터의 설정(personalizing) 상태에 따라 한번 더 모종의 변환단계를 거쳐야 한다. 간단하게 해결되기도 하지만, 이미지 저장형식이 달라 다운로드가 안 되거나 읽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능력과 컴퓨터 운영체제 업데이트 상황에 따라 변수가 있어, 컴퓨터로 작업한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는 상대방 설정과 내 설정과의 매개관계 설정에 따라 달라진다. 유에스비(usb)나 웹하드(webhard), 드라이브 공유 등 다양한 소통전달 장치들도 나와 있지만,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언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는가에 따라서도 상대방의 메시지를 수용해서 이해하고 해석에 이르기까지의 리코딩에 드는 경제는 달라진다.

이렇게 인터넷 세계에서 정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해졌고 거기서 보게되는 사람 사는 모습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각양각색이지만, 원시시대 동굴벽화를 그리던 사람들이 그들이 아는 모든 것, 알고 싶은 모든 것을 동굴벽이라는 이차원의 평면세계 앞에 앉아 정리했듯, 컴퓨터 앞에 앉아 자기의 세계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은 비슷하다.

동굴 벽을 마주하고 거기에 말하고 알고 싶은 모든 것을 그들이 깨달은 실제의 이미지와 터득한 기술로 옮겼듯, 지금의 우리도 여전히 화면이라는 이차원 앞에 앉아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동굴벽에 비해보면 정말 작게 환원해 실제를 본다. 모나드 창 같은 모니터 구멍 속으로부터 정보가 끊임없이 이리저리 매개연관돼 밀려 나오지만, ‘실제에 대한 정보들을 매개해주지만, 말을 건네지만, '실제는 창’(윈도우) 표면 밖으로 그 총체상의 모습에서 다가와주지 않는다.

세계에 대해 지각한 내용을 드러내는 포맷에는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에 상응하는 시스템 장치라는 상수가 있고, 상수에 맞추어 개발, 계열화된 장치제도제품그리고 이를 이용할 수 있는가, 구입할 수 있는가 하는 개인 능력에 따른 변수들이 생긴다.

원시 동굴벽화를 통해서든 컴퓨터 속에서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드러내고 인류의 필요에 맞게 인식을 장치화, 제도화하는 일에는 일정한 항수가 있고 변수가 있다. ‘항수변수는 이 둘을 하나의 아이디어(관념, 개념)로 한 단계 더 높게 매개가능성 장치로 만드는 기제 혹은 기회의 힘(개인적 능력과 우연한 연상같은)에 의해 매개되어야 새로운 장치’, 새로운 상품, 새로운 제도로 안착된다. 결국 이 기술도 능력이든 우연이든 일종의 변수인데(화가들의 천재성에서처럼), 기술은 필요라는 상수에 의해 추동된다.

매개가 되어야 프로그램이든 사업이든 제도든 새로운 장치가 되어 작동될 수 있기에 그렇다. 매개가능성을 찾아 역사를 뒤지거나 가능성을 쥐어 짜내기 위해 학문을 동원하는 일은 구체적으로는 필요를 조절하고 발견하고자 하는 정치경제행위에 의해 발현된다. 행위를 추동하는 정치경제상의 어떤 의도’(아이디어), 그리고 여기에 개인의 능력과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기회여부가 보태져 장치가 개발된다. 미술사는 시대별 이런 장치 개발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사는 인류가 장치개발을 해온 역사의 상징이다.

이때 개인이 동원, 사용할 수 있는 기회란, 인류가 그간 만든 여러 장치를 개별적으로 전유해 개인 일생의 안녕과 복지를 얻는 능력이란, 개인의 자질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능력이 배경으로 작용한 능력이다. 경제적 능력과 환경의 영향, 자기계발로 갖추게 된 능력 등이다. 게다가 자기계발의 부지런함이 없다면, 새로운 장치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무시한다면, 개인적 여러 의미에서의 조건이 불충분 하다면, 인생복지의 기회도 그만큼 줄어든다. 이런 매개변수들이 합쳐져 매개의 힘, 곧 매개를 위한 아이디어가 산출된다. 예술가의 독창성 운운도 인류의 장치들에 대한 예술가의 이런 리코딩 능력으로 볼 수도 있다.

동굴벽면에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 오랜 기간 기술을 축적, 연마해야 했던 것처럼, 컴퓨터 사용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시간과 숙련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기술을 습득한다고 해도 무엇인가를 만드는데 작용한 항수와 변수들을 개인이 낱낱이 알 수는 없다. 그것들이 매개된 방식과 방법, 그 변화의 방향을 그 실체사실에서는 알기는 힘들다.

사람들은 장치를 사용하는 한낱 기본 언어만을 알 뿐이다. 여러 매개관계가 연결된 특수 복합체의 각 부분들, 앞면과 뒷면, 윗면과 아랫면 등 각 부분의 단면이나 각 부분의 총체상에 대한 인식은 인식 전문가 일이라고 맡기지만, 그들이라고 장치의 계보 속에 조밀하게 은폐, 가공된 경제와 정치의 요구들, 이렇게 구성된 인류 역사의 모든 장치들의 음모, 거기에 축적된 계열의 불협화음과 그 연관 관계의 한 귀퉁이에 비밀리에 붙은 일그러진 욕망의 특수 복합, 그 매개의 역사적 특수 성격의 의의를 볼 수는 없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사실상은 이미 어찌어찌 항수와 변수가 매개되어 형성된 시스템이나 어떤 변화된 현실국면에 놓여 살면서도 그게 그건지 잘 모르고 살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제도화된 관념이나 개념, 조직 속에서 관행적으로만 살게 된다. 이런 굴레가 보통의 삶이 살아지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이런 과정의 결과,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프로그램의 특정 기능들이 작동되지 않을 때,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그 특정 사항들에 대해 무슨 계약을 했고, 그로 인해 갑자기 컴퓨터에서 사용 가능했던 기능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일에 대해 개인이 제 때에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다.

장치의 속성이 부분적으로 변한 것이고, 장치에 매개된 상수와 변수들의 함수가 달라진 것이며, 이런 상태를 장치의 변화 혹은 장치의 분화와 기능변이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이런 변화를 일으킨 법적, 정치경제적, 사회적, 기술적 요인들에 대해 다 알면서 적응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것을 개인이 열심히 이리 저리 리서치해서 결국 대충 알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의 기술적 변화를 빨리 파악해야 되는 집단 조직 곧 여러 유형의 사회형식’(시스템 혹은 제도, 구체적으로는 학교나 회사 등의 여러 형태의 집단들)에서 보다 재빨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정보가 집단 내에, 집단들 사이에 퍼지면서 제도화된 새로운 설정 혹은 그 설정의 변화된 세부구성들에 대해 개인들도 점차 나름대로 파악을 하게 된다.

제도제도를 통해서만 정체를 드러내기 쉬운 법인데, 그래서 제도라는 조직 속에서 생을 영위 할 수 없다면, 갈수록 세상에 대한 지각은 '무리'(無理)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세력', 조직에 소속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 중 하나일 것이다. 제도의 이런 경향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실정성에서는 무리라고 평가되는 자신의 상태에 저항하는 방식이 전적으로 별난 감각의 논리로 제도화를 보는방식이다. 개인에게는 대상을 새롭게 응시하면서 자신을 제도의 주체로 확고히 세우는 방식만 남는 것이다. 원시인이 동굴벽화에서 했던 일도 이런 일이었다.

컴퓨터를 다시 예로 들어보자면, 컴퓨터의 연식과 운영체제, 파일 확장자의 종류와 보안시스템 등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따른 시스템과 프로그램 등 각종 장치들은 일종의 ’(Way)이다. 지식이 돌아다니는 길이자 타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길이요, 생계방식과 방법이 구(,)해지는 길이자 도덕과 예의와 감정이 운반되는 터미널이나 로터리 장치이다.

도덕은 터미널이나 로터리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길이란 장치 설정의 매개관계, 계약관계가 형성한 통로로 사람들은 그 길로만 다녀야 제도(장치)를 잘 이용할 수 있고 복지에 이를 수 있다. 도덕은 이 길을 따르는 유연함이다. 도덕은 장치에 대한 무식함으로 장치를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사용설명서 같이 사용된다.

장치에 대한 무지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장치를 내 마음대로 조작하게 되는, 다뤄보고 싶은 충동을 낳는다. 남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감각의 논리로 길을 헤쳐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개인적 감각의 논리에 의해 장치를 대하게 되는 순간 개인에게 장치는 적대시, 안하무인의 대상이 된다.

장치는 오브제로 존재가치가 격하된다. 사실상 인생의 비싼 댓가가 요구되며, 세상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면서 얻는 맹목적 폭력이거나 하층계급으로의 전락이다. 자기 무리수에 자기 서사라도 곧 거짓말이라도 동원할 능력이 없다면 그는 자폐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각각의 장치들은 그 안에 각각의 계열상의 특수 매개관계가 있고, 각 매개관계들 밑으로 또 다양한 매개 변수 계열들이 종속돼 있다. 모든 매개관계들은 그 또한 저마다의 장치들로, 이런 장치의 계열들이 복합적으로 매개연관되어 하나의 사물이나 프로젝트, 영업행위나 교육제도나 정치제도 등 인간이 만들어낸 각각의 제도를 구성한다.

그 각각의 매개장치 또한 서로 다른 기능목적으로 별도의 서로 다른 각 장치들과 수평적, 수직적으로 범주화로 매개되어 다시 또 하나의 다른 목적지향의 장치형식으로 갖춰진다. 장치가 컴퓨터라는 외부 형태가 품은 그 내부의 전체 기능이고, 사회구성체 형식이라는 시스템이다.

인간이 필요해 길을 개척했지만, 모든 길이 특정 사회의 법적 통제와 관리 아래 있듯, 알고 보면 컴퓨터와 인터넷에 연관된 모든 장치’(Apparatus)들도 사회적 통제 하에 존재한다. 통제를 통해서만 메시지 기능이 발현된다. 컴퓨터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래밍 설정의 길에 절대적으로 종속적이어야만 한다. 컴퓨터가 요구하는 순리대로 컴퓨터를 다뤄야 한다.

컴퓨터의 장치는 컴퓨터로서 기능하기 위한 컴퓨터의 형식으로 장치의 세팅과 설정에서 상수와 변수가 있되, 기능의 최종심급은 국가나 특정 사회 내에서의 법적 사용규정과 사용자가 지불하는 경제요, 컴퓨터를 개인화’(personalizing)한 잠재 변수의 고차원적 능력이 컴퓨터의 능력’(capacity)으로 평가되는 사회의 성격을 반영한다.

 

2.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장치란 무엇인가? : 장치학을 위한 서론에서 장치라는 단어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사유전략에서 결정적인 전문용어라는 가설을 제안코자 한다면서(1), 푸코의 생각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고 있다. 옮겨보면, “(1) ‘장치는 그 이름에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잠재적으로 무엇이든지(담론, 제도, 건축물, , 경찰조치, 철학적 명제)포함하는 이질적 집합이다. 장치 자체는 이런 요소들 사이의 네크워크이다. (2) 장치는 늘 구체적인 전략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늘 권력관계 속에 기입된다. (3) 장치 그 자체는 권력관계와 지식관계의 교차로부터 생겨난다.”(2)

아감벤의 장치(dispositif/apparatus) 개념을 컴퓨터라는 장치를 사용하면서 느낀 개인적 감각들과 연관해 보면, 장치를 제도(Institution)의 개념으로 이해하기가 더 수월해진다. 아감벤은 장치 개념의 계보를 찾다가 푸코가 장치 대신 그와 어원적으로 가까운 실정성’(positivité) 개념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감벤은 푸코의 장치 개념의 계보를 이폴리트(Jean Hyppolite 1907~1968)에서 찾는데 이폴리트에 따르면 실정성이란 청년 헤겔이 역사적 요소에 부여한 이름이다. 그것은 외부의 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부과되어, 이른바 신앙이나 감정의 체계 속에 내면화된 규칙, 의례, 제도가 주는 모든 부담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푸코는 이 용어를 빌려와(이것이 나중에 장치가 된다) 어떤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 입장을 취한 것이다. 푸코 자신의 가장 고유한 문제, 즉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개인의 역사적 요소와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여기서 역사적 요소란 무릇 권력관계가 구체화되는 장으로서의 여러 가지 제도, 주체화 과정, 규칙의 전체를 의미한다.”(3)

이 글에서 아감벤이 말하는 바 제도가 주는 모든 부담 이라고 하는 바는, 예를 들면 일상적으로 우리가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겪게 되는 장치로 인한 여러 불편함 같은 것으로 우선 이해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생산 주체들의 고유 형식(장치) 유지고집으로 인해 생기는 어려움이거나 생산 주체들 간의 이해관계 상충 혹은 서로 간의 매개 형식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부담들이기도 할 것이다.

컴퓨터가 제공하는 기능이라는 이 너무 제한적이어도 부담이 느껴지지만, 너무 기능적이어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사용자가 망설일 틈도 없이 기능이 먼저 돌아가는데, 프로그래밍과 세팅 자체도 그렇지만, 사용 단계마다의 일종의 일방성으로 인해 혹은 설정이라는 조건과 하드웨어 형식의 복합성과 복잡성으로 인해 코드들이 엉키고 불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불화로 인한 부담감은 장치가 구성된 형식에 관련된 모든 외적, 내적 조건들로 인해 생겨난다. 하지만 장치에 매개된 조건들 자체가 장치의 속성 본질에 다름 아니므로 부담은 장치 자체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존재 수밖에 없다는 식의 부담일 수 밖에 없다.

프로그래밍이 뻗어 있는 길을 제대로 알아야 소통이라는 복지에 경제적으로 유쾌하게 이를 수 있는데, 모든 장치 곧 세팅(제도화)은 무엇인가의 필요와 조건의 매개이면서 그래서 그 자체 곧 부담이된다. 이것을 일러 그 장치의 실정성이라 부를 수 있다.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면서 그려진 관념이나 이미지, 지식도 그 인식장치의 부담으로 인해 불화의 산물이 된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정신간의 인식적, 존재론적 불화의 기록이요, 일종의 기록이되 장치로 새롭게 고안되지만, 결국 인류의 부담이요, 인류의 실정성이다.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재현은 불화를 정치적으로만 다룰 수 있을 뿐이다.

기능을 재현하는 모든 사물도 결국 불화의 계열들을 자기복제하면서 발전하지만, 사물은 그 원래의 형상상의 기능을 재현하지 못한다. 인간의 감정에 추억으로 완성 될 뿐이다. 혹은 구체적으로는 대개 자본의 착오로 인한 과잉투여거나 축소로 발생되거나 예를들면 사회건 제품이건간에 목적 디자인이나 필요 개념구상에서 온갖 형태의 미시권력들이 작동되면서 무엇인가 그 내부에 합목적성이 불충분해져서 생기기도 한다.

푸코 개념의 뉘앙스에서처럼, ‘부담이라는 것이 있고, 그 부담을 넘어가는 것이 되어야 제도의 실정성을 이상적 제도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된다. 비유하자면 최고선의 기능을 지닌 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고 이상적으로 다룰 수도 있게 된다. 민주주의나 자유, 평등 같은 개념들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는, 컴퓨터를 만드는데 연관된 모든 역사적, 정치경제학적, 문화적 제도들 등의 실정성이 컴퓨터라는 현재의 부담으로 구현된, 특정 인간적 필요의 형식이다. 이 형식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세부시스템들 간의 조합과 개인화된 설정이 담합해 작동되는 (기능)‘장치형식인데, 컴퓨터 기능의 개인화된 기술상의 문맥적 설정으로 사용가치의 고저가 생길 뿐만 아니라, 개인이 살아온 과정과 상황에 따라서도 소통의 복지에 이르는 메시지 전달 루트가 세부적으로 갈라지거나 무시되거나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는 상태의 형식이다.

개인또한 일종의 장치인데, 이 장치 자체의 부담’(실정성)으로 인해 개인의 사용가치와 사용상의 질의 가치편차, 강도도 달라진다. 개인도 일말의 자기 고유의 부담을 지닌 형식체이다. 개인 자신도 일종의 장치로 부담의 형상이기에, 컴퓨터를 사용할 때의 기능상의 한계로 작동한다.

개인이 내재한 부담의 종류와 상태가 표현된 것이 말하자면 개인의 가치이다. 개인은 부담이라는 실정성의 특수 개별 형식들이다. 개별 형식이기도 하지만 개인은 인간성의 보편적인 코딩도 내재한 존재자이다. 그래서 개인은 그 자신 또한 보편성을 포괄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유사 합목적적 제도’, 인권법이기도 하다.

세팅된 코딩(coding)의 원리 없이 형태화된 것은 없다. 제도나 인간의 행위, 예술 등을 제도의 구성 원리나 인간 행위의 원리 혹은 예술의 구성 원리에 대한 인식 없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원리를 알고 해석을 해서 그 원래의 목적 곧 본질을 이해 할 수 있다. 이런 원리들을 보편성이라고 한다면, 원리들을 개별적으로 구현하는 각각의 변수조건들을 지닌 개별 장치나 개인들은 보편성에서 떨어져나온 특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편성의 언어습득 후 행해지는 해석들은 인간이 수놓는이해상의 무늬들이다. 이 이해(理解)는 이해관계의 정치의 일종으로 모든 장치 혹은 개인은 그 자체로서거나 수단을 사용하는 방식에서거나 그 능력에서거나 일종의 계열화된 장치들로 다시 모양새를 잡은 어떤 형태들이다.

제도는 사회를 위한 특정 목적과 인간에 대한 경험적 통계치를 기준으로 법적으로 설정된 일종의 (기계)장치가 외화된 형식이다. 컴퓨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 저러한 기능을 실현하기 위한 아이디어(관념, idea)가 특정한 장치 곧 제도로 형태화 된 것이다. 컴퓨터도 일종의 제도요 장치이며 형식이다. 컴퓨터 언어의 이해와 세팅의 해석을 통해 컴퓨터를 이해하고 사용하지만, 컴퓨터 사용자의 자의적 컴퓨터 언어 해석으로 인해 각자가 사실 어떻게 컴퓨터를 쓰는지는, 그에게 컴퓨터의 본질이 어떻게 수용되는지는, 어떤 부담이 그에게 작용하는지는, 그래서 그가 컴퓨터라는 장치와 대화하는 길 그 위에서 그의 능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타자에겐 거의 오리무중에 가까운 것처럼, 제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하고 제도 속의 개인이 어떤 형태로 사는지는 모두에게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제도 각각도 실정성이지만 그 제도에서 사는 개인의 삶 모두가 각기 다른 실정성을 상징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결국 제도는 일종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미지로써 제도도 일종의 부담에 찬 메시지’(message)이다.

형태를 지닌 사물은 이미지로 메시지나 관념을 드러낸다. ‘형태란 실정성의 본질이 현현된 이미지인 것인데, 실정성은 구조화된 기계의 형식으로 작동되기 위한존재물의 실제적 현상태를 이른다. 혹은 메시지 실현기능을 그 형상의 목적으로 하는 특정한 형태의 속성이다. 곧 모든 사회적 존재자의 정체를 가리킨다. 사회적 존재자에는 개인과 사회도 포함되고, 온갖 사물과 제도와 예술 그리고 비가시적인 의지나 관념 등도 포함된다. 자유 혹은 희망, 평화 같은 관념도 포함되고, 인간의 행위 마음가짐, 가치관도 포함된다.

다시 컴퓨터로 비유해보자. 컴퓨터는 일종의 형태이다. 겉모양이라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컴퓨터의 기능 곧 개념(아이디어)이 있고, 그 기능을 현실화한 것이 지금의 실제의 컴퓨터 형태이다. 그리고 컴퓨터의 기능으로 얻고자 하는 바 목적 효과가 곧 컴퓨터라는 형태의 메시지이다. 컴퓨터도 이렇게 구현된 사회적 존재자로, 컴퓨터 제조에는 다양한 실정성의 조건들이 하나의 복합체로서 기계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얻는 각자의 효율성은 컴퓨터에 대한 각자의 이미지이다. 개인화되어 차등적으로 전달되는 효율성은 컴퓨터 사용자 개별에게 전달된 컴퓨터 내의 실정성 체제가 전하는 메시지를 수용할 능력(capacity)만큼 그 컴퓨터를 사용하는 개인에게 형상화된다. 다시말해 각자가 갖는 컴퓨터에 대한 관념 이미지를 컴퓨터의 형상(목적, 실체)로 안다.

 

3.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기를 하는 방식은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는 인간의 이미지 언어로 번역되고 표현되면서 세계상으로 혹은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 보존된다. 각각의 이미지가 내포하는 형상의 의미는 곧 그 이미지가 가리키는 대상의 본질이다.

()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이미지로 형성되면서 비로소 획득되는 것인데, 이렇게 인지된 속성들은 물자체에 대한 관념’(idea)을 형성한다. 이미 물 자체의 본질로 부터는소외된 개념이다. 이렇게 쌓여진 인류의 개념들과 이로부터 다시 새롭게 구축된 개념들이 대상의 본질적 속성이라 추정되는 질(quality)에 대한 인류적 인식과 평가의 세계이다. 인류의 인식과 평가는 그 자체 부담감이라는 소외형식이다.

세계를 이해하고 이해된 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달될 내용 곧 내용에 형식을 갖추어야 전달방법을 찾을 수 있는데, 전달 수단을 갖추어야 전달 내용의 의미화가 가능해지는데, 전달내용을 수단화 한다는 것은 이미지를 장치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이미지 언어는 그 자체로, ‘기능표상의 형식이고 개인화된 내용이라는, 또 다른 (형식적) 장치이다.

언어 혹은 관념은 개인화된 메시지 장치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 형태를 지닌다. 이 말은 그만큼 말과 말의 내용은 외화되면서 소외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거리가 있는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말해 이미지 형태는 실정성을 간직하며 그런 만큼 개인의 부담감을 표현한다.

어떤 정보가 '이미지'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해석을 위해 그 속에 내재된 개인화된 설정과 세팅(setting) 코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코드는 특별한 장치들로, 개인화된 설정내용 뿐 아니라 그 특수하고도 보편적인 시공간에서의 항수와 변수들을 프로그램화해서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상황의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상황의 본질 자체는 불분명한 어떤 상태의 것으로 인지되는 무엇이다.

이미지는 애초 발생한 관념 형상이 형식화 과정을 거치면서 특수한, 다시 말해 개별적 인상을 유발하는 개별적 내용으로 대상의 본질이 이미 전화된 존재상태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실의 외연적 총체성이란, 이러한 차원의 것으로 발생한 인상내용들의 총화이다.

실제의 모든 제도도 일종의 이미지이다. 제도는 메시지로서 이미지인데, 그것은 특정 제도를 만들 때의 목적관념의 형상상에 비춰 볼 때는, 이미 일정하게 무엇인가 소외된 형식으로서만 현실에서 기능하기에 이미지이다. 이미지라 함은 결국 사물에 대한 인식의 의미화작용에서 기표와 기의가 분리화된 존재물이라는 의미에서이다.

기표와 기의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은 매개하기 나름으로 하나의 다른 존재물로 만들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서사'로 매개되게 된 근거이며, 그래서 문명은 발전할수록 거짓이나 왜곡이나 변명에 취약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명은 본질적으로 거짓말과 개발에 취약하다. 거짓말과 개발로 인생서사를 장착해간다.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는 이미지 기표와 기의를 연결시키는 미술적 장치를 일러 관습이라고 지칭했다. 미술사는 관습이 된 장치가 발달하면서 환영(illusion)의 기술, ‘진짜처럼 보이는 기술을 전개시켜온 역사가 되는 셈이다. 곰브리치나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 등의 미술사학자들은 이에 이미지를 읽는 장치, 도상학이라는 학문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미술사 장치도 장치인 만큼 그 만큼의 실정성을 지닌 것으로 대해질 수 있다. 즉 일체성의 본원적 결핍을 안고 있다. 즉 하나의 도상해석학만이 진리일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관념이 환영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그 방식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맞춤형 독해기술이 필요하게 된다. 도상해석학의 해석 범주들이 달라지게 된다. 미술사와, 미술비평사, 해석학과 언어학, 현상학의 역사가 맞물린다.

특정 작품의 형상 형성원리가 되는 장치 내부의 메커니즘(형식)은 해석을 통해 (작품)형태로 노출된다. 형태가 되면, 형식은 기표와 기의로 분리되는 이미지로 지각된다. 작품의 형식은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본질이지만, 그 형식의 지각 가능한 형태는 요소로 해체되고 환원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 작품에 내재된 내용의 실체성, 내용 그 자체는 절대적으로는 인지 불가능 한 것으로 남는다.

19세기 이후 서구 미학과 미술비평, 미술사에서의 형식개념과 형태개념, 20세기 이후의, 예를 들면,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말하는 이미지 존재론은 이러한 인지불가능성에 대한 하이데거식 멜랑코리(Melancholy)를 드러낸다.

작품에는 실정성 장치가 장치로 내재되어 있지만, 작품의 진실은 '이미지'로서만 남는다. 예술은 그 안에 부담을 안은 그 무엇으로써 인간의 인식에 투여된다. 그래서 부담은 감각의 논리가 닻을 내릴 수 있는 아무 것도 아닌 장소가 된다.

김범의 임신한 망치(1995)무인 목성 탐사선(2002), 박이소의 개념의 여정(2002), 양혜규의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2009) 같은 작업들은 우리 주변의 일상적 개념과 혹은 일상 사물의 형태에 내재된 부담,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에 대한 작가의 개념의 여정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작가가 개념이나 사물 같은 특정 설계물의 형식을 이미지로 파악하게 되고, 그것을 형태요소로 전치시키게 되는 것은 그 형식 안에서 부담을 느껴서이다. 작가가 대상이 주는 부담의 강박성, 부담의 피로에 짓눌린다면, 그는 특정 개념이나 대상에 내재한 ‘(관습)장치, 장치의 목적적 메커니즘을 장치로부터 소외시키려고 한다. 대상세계를 감각의 논리로만 대하는 방식으로 그는 장치가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장치에 대한 이해와 해석, 즉 사물 속 프로그래밍의 속성(부담)과 그 사물이 작가 자신과 맞닥뜨리면서 인지하게 되는 부담의 메시지를 개인화된 자기설정으로 극복해야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메시지는 메시지 일뿐이지 사물의 본성이 아니므로, 그가 그렇게 얻은 이해와 해석은 이미지로만 아이디어(관념)화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그냥 이미지 일뿐이다. 즉 인식론적 행위 끝의 이미지 감각이지만 존재론적으로 볼 때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구성행위의 결과물일 뿐이다.(다음호에 계속)

 

각주:

1)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 장치학을 위한 서론,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난장, 2010, 15.

2)위의 책, 17, 18.

3)위의 책, 21.

 

(이미지는 박이소, 양혜규, 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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