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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자연의 우울_사실성의 우울

조회 수 522 추천 수 0 2015.12.25 10:51:43

1

자연이 합법칙적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된 관내(管內) 학문, 곧 근대과학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문범주에서자연으로 범주화된 세계는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자연도 분명 존재한다. 곧 인간의 생활세계로 근대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세계를 자원으로해인류 발전이라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인류생활로서의 세계이다.

사실상 개인이 몸담고 있는, 개인에 관여되어 있는자연세계자연으로서의생활세계이다. 과학 연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세계는 추상적인 법칙에 의해 인간과 상관 없이 운행, 스스로 실체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세계내 존재자로서의 우리 인생의 필연적 한계로 주어진 세계이지만, 개별 인생의 문제에서 볼 때자연은 인류의 생을 번영과 향락, 굶주림과 공포로 몰아넣는, 생활세계의 이름으로 인류의 삶에 매개돼 나타나는 현실이다.

가장 리얼하게 우리에게 존재하는자연세계는 생활세계로 변용된 자연세계이다. 생활세계는 그러므로 구체적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있는 그대로’(as it is)의 자연적 생의 모습이다.

자연의 시, 공간적 불가항력성, 규정 불가능성은 인간의 생활적 이해에서 본다면, 자연재해나 불운, 장애, 악마성에 가까운 자연현상으로 생활에 작용한다. 자연현상은 인간의 인륜 감정을 넘어서 작용하므로, 자연이라는 생활세계는 혹은 생활세계라는 자연은 미지의 불합리성이요 결핍과 결여로 주어진 세계이다. 이로써 생활세계는 자연합목적성과의 긴장체계를, 생활에 주어진 모든 소여(所與)상의 갈등과 사유(思惟)를 근본으로 한다. 자연은 사실상 인간의 전체 생활과 역사에 보편원리로 작동하고 있고, 그리고 생활이라는 인간의 목적에 전면적으로 매개되어 있다.‘생활은 인류의 합목적성 이념을 지배하는 소여생활세계는 생활의 목적과 자연의 원리가 매개되는 인류의 현실적 소여 장소이다.

자연은 문명사회와의 접촉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광대무변한, 무한한 우주적 보편자처럼 인간 앞에 군림한다. 하지만 이용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인류 문명으로 들어오는 순간, 자연은 언제 폐기될지 모르는 산업제품으로 그 모양새가 한순간에 바뀐다. 그리고 자연의 이용가치는 인간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구비된 사용가치도 아닐뿐더러 생활세계에서의 모든 사용가치는 이용가치 곧 교환가치의 변신결과이다.

자연은 산업제품과 생필품과 사치품 등 만유(萬有) 욕망의 형태로, 결핍과 결여의 보족물(補足物)로 인간의 몸과 감정과 오성에 필요한 모습으로 변용된다. 상품과 제품을 산업제품이라, 인공물이라, 문화라 부르지만, 사실상 모든 인류의 생산물은 자연의 변신 형태들이다.

문명은 생활 속으로 들어온 자연의 외관이요 체계이다. 실내 풍경이나 산업도시의 풍경도 자연의 모양새이고 지지부진한 민주주의도 자연의 자기모습이다. 일상의 개인적 게으름, 성격 장애 조차도 자연의 결과물이다.

생활의 시각에서 볼 때, 자연은 잉여이기도 하고 때로는 결핍이기도 한데, 잉여와 결핍을 배치하는 인간의 오성 또한 무엇인가 결핍의 고리라면, 생활세계는 낙오자의 가난과 부끄러움을 경멸하고 경시하는 계층심리를 본성으로 하는 세계가 된다.‘자연의 문명화 과정은 노동을 매개로한 자연의 사회적 가치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자연이라는 결핍적 소여는 결여감 속의 문명의 불안으로 전화(轉化)된다.

제도는 결핍감과 불안감의 소산이다. 제도는 권력 집단의 욕망과 이해관계 실현을 위한 기관이다. 욕망의 칭의(稱義) 시스템으로서 보다 발전된 자연의 변신 형태이다.‘제도의 조직과 기능은 자연 법칙을 바탕으로 한다. 제도는 권력적 상상력이 인간에 대한 지배와 관리 방법을 행정적 프로세스로 구축한 자기목적적 기관으로, 인간과 인간사회의 자연적 본성을 관리, 통제한다는 자기정의(正義)를 위해 인간의 본능과 사회의 자연적 상태에 따라 조직적 대응체계를 구축한, 일종의 가상적 실재로서의자연체계이다.

자연체계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과 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자연스런 유기적 맞춤 기관인척 하기에 그런데, 거기에 더해 동시에 반 인간적이고 반사회적으로 오로지 조직 자체의 자기보존 목적만을 위해, 인간과 사회의 자연적 본성과는 전혀 다른 물리적 기제(자연법칙적 합법칙성)를 시스템 구성과 운영의 기본원리로 한다는 점에서, 다시말해 이중적 환상적 기능에서자연의 법칙을 원용한 체계이다.

제도의 시작은 인간과 사회의 자연본성의 관리적 대응책이고 제도의 끝은 인간과 사회의 자연본성의 예측과 통계이다. 결국 제도는 자연체계의 환상적 유사물(類似物)이다. 환상으로 실재성을 대변하고 유사물로서 정책의 비전을 변명한다. 제도는 인간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속된 이해를 전제로 인간의 현실로 매개된 자연법칙의 자기정의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자연법칙 자체는 자기정의(正義)를 목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제도는 정의의 개념도 참칭(僭稱)하고, ‘자연의 진리도 참칭하게 되는 본질을 멋어나지 못한다. 제도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인간과 사회도 그래서 가짜 의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개인에게는 제도이든 인간의 본성이든 사회의 본성이든 혹은자연 법칙이라 부르든 아니면 구체적으로 정의’(正義)라 부르든 이런 개념이나 본질, 대상들 모두는문명이라 불리는 생활세계 속의 개념범주요 대상세계들이다.

문명은 인간화된, 생활세계화된 자연으로, 개인 자신도 자연의 일부 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문명을 자신으로부터 추상화시겨 생각한다. 개인에게는 자기 앞의이 있을 뿐이다.‘생활에의 강박이 있을 뿐이다. 과거의 비참하거나 화려한 생활이 기억될 뿐이다. 자연은 들과 바다에서 느끼고, 취미생활과 여행으로, 그림이나 시, 풍경과 사진을 통해 느끼고 알 뿐이다.

이런 상태를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하는 속세의 껍질(Mundane Shell)‘ 개념과 비교해 비유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속세의 껍질은 시간과 공간의 3차원으로 된 세계를 말하며, 블레이크는 이 세계를 속세의 계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 속세의 계란의 하반부는 불투명의 한계, 즉 사탄이며....그런데 이 속세의 계란, 즉 속세의 껍질은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서 오직 그의 신체적 오관에만 의존함으로써 빚어지는 온갖 과오의 총체를 의미한다.”(강엽,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사상, 382-383, 부산대학교 출판부, 2004)

 

2

자연은 인간을 부자유하고 불평등하게 만드는 결핍의 근원이다. 자연은 물자의 한계와 행위가능성의 한계를 본질로 한다. 자연은결핍을 본질로 한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할때는 자족적이고 자율적 세계이다. 하지만 자연이 환경으로, 생활자원이자 생태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인지될 때, 자연은 인간의 삶의 실현을 위한 경제적, 정치적 자원으로 파악된다. 자연은 전쟁터가 되고 구획으로 나뉘어진다. 개인과 민족과 국가의 자산이 된다. 자연은 풍요의 땅이자 그러면서도 결핍의 땅이 된다.

인간은 인류로서 자연의 일부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필요의 욕구를 지닌자연이다. 인간의 욕망은 결여감을 통해 자연에 투사된다. 이러한 상태가 모든 류의 인간적 문제 상황을 낳는다.

자연은 사회적 생명에게는 긴요한 한계상황이다. “자기유지라는 척도가 인도하는데에 따라 성장한 오성이 삶의 법칙을 자각하는 한 그것은 강자의 법칙이다. 이러한 강자의 법칙이 이성의 형식주의 때문에 인류에게 어떤 필연적인 모범도 내놓을 수 없다면, 이 법칙은 기만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해 사실성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약자는 유죄라는 것, 약자는 자연법칙을 간사하게 비껴가려 한다는 것이 니체의 교리다.”(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144, 문예출판사, 1995)

 자연은 인생의 강자를 자연의 사실성으로 구축한다. 민주주의 이념이 배제한 것은 아쉽게도 이러한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은 죽음의 법칙이기도 하다. 죽음의 법칙은 절대적 생활한계의 필연성의 법칙이다. 살아있는 모든 개체에게는일생’(一生)만이 주어진다. 한 생명으로서의 필생의 영화(榮華)의 기회를 잡는 일이 일생의 개념이다. 일생의 생명은 죽음충동으로 문명으로 내달린다. 일상은 그래서 필연성을 띤다. 생명은 고뇌도 감내한다. 문명은 자연의 패착이자 고뇌이다.

'생자필멸의 법칙은 생활의 모든 원리에 숨겨진 미래이다. 생활을 생활답게 하는 것은 죽음의 허무함이다. 공허감을 완성하는 것은 삶이다. 생활의 미래상이다.

죽음이라는 배위에서의 삶인 일상체계 속 인간에게 자연은 수만가지 결핍의 다양함과 한계상황, 모순, 이율배반의 화려한 입장들을 전한다. 이런 상황이 삶에서의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다. 그 결핍과 공포로, 장르적 생명의 천태만상의 자연성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상 있는 그대로의 것이기에,‘자연사실성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로 접근해야하는 생활과 죽음의 이중 경계 영역이다.

자연은 경계 영역의 개념을 의미한다. 치명적 생활과 사실적 죽음의 차안(此岸)의 모양이 자연이다. 결핍과 필요의 무한한계기들을 불러 일으키는 요지경의 차원에 존재하는 불멸의 개인적 결여감 곧 영혼의 모양이 자연이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의 문제도 조건적이고 한계상황적이 된다. 상품생산과 분배, 인류연대의 성장과 발전이 자연의 사실적 상황에 종속된다. 국가도 사회도 자연이다. 자연이 결핍이라는 사실적 상황을 근본으로 하기에 그럴수록필요이용가치에 대한 강박은 더욱 강력해진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하다 하는데, 자유란 자연이 간직한 사실성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니까 자유에 대한 의지는 강할수록 생명에 관한 사실을 은폐한다.‘자연은 사실상 결핍된 잉여이다. 그 중 가장 큰 결핍은 자연 안에 신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이다. 신은 잉여의 최고치이다.

있는 그대로의 결핍으로나마 자연은 삶을 풍요롭게도 해왔지만, 결핍으로서의 자연이 궁극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관외(管外) 자연의 영역에서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날 것의 가장 진부한 양상을, 가공할 생활적 공포를, 감추고 드러내기도 한다. 관내와 관외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상호 연결된 프로파간다로, 강령으로서 삶의 날것 그대로의 민낯을 감춘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극복할 수 없다. 사회적 리얼리티도 합목적성을 갖추기 어렵다.‘개인만 보더라도 각자는 모두 지독한 결핍들이자 잉여들이다. 각각의 자기 결핍과 잉여가 만나는 지점이 어떤 괴물적 양태로 개인의 인격과 생활을 빚어내는지도 일종의 장르 서사이다.

우주는머리 위에 빛나는 밤하늘의 별로서만 우리에게 존재한다. 아니면 자연은 알다시피 실험실의 관찰과 발견, 기술과 경영상의 통계와 통제를 거쳐 산업제품으로 변신해서만 오감으로 현현(顯現)한다. 자연에 내재된 보편원리는 가정집과 공장과 회사에 쌓인 도구와 제품, 조직원리와 행정원리, 개인의 행위 원리와 직능기능으로 전화(轉化)된 다음에야 인생 속으로 매개된다.

산업제품처럼 예술도 똑같이 자연의 산물이다. 모더니즘 미술이 회화의 회화성이나 물성을 알고자 하는 일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자연법칙과 세부원리를 연구해 산업에 활용하고 상품 생산기술로 발전시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 회화성의 본질도 스스로 연구하고 상품도 직접 만든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더 다른 부분이 있다면, 회화성의 본질을 찾기 위해 행한 케이스 스터디를 예술로 칭할 수 있고 그 모든 끄적거림을 작품으로 칭할 수 있다는 점이다,

회화성을 탐구하는 모더니즘 미술도 알고보면 원시시대 이래로의 장인적 기술자의 역할을 반복하는 중이다. 예술의 어원을 기술(ars)이자 공예(craft)로 삼는 문명은 여전한 것이다. 작품은 결국 공예품이고 본질적으로 상품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이렇게 상품으로 현현된 자연법칙을 알아채기까지에는 시간과 특별한 재능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지각은 자연의 전체적인 성격과 특수한 성격, 보편성과 구체성의 매개간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매 순간 지구 위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생활의 지독한 생태, 비참함과 저열함, 개인적 성격, 부딪히며 서로 빚어내는 갈등의 가중스러움은 영원히 회귀되는 인류의 어떤 예술적 진실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의 결핍과 잉여를 증거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인간의 다른 행위는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려 하지만, 예술적 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자연성 안에 내재한 결핍과 공포를 그 천태만상의 리얼리티로 들여다본다.

자연은, 자연의 피부는 그 자체로 인문적이다. 인문학은 인간의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인간의 사실성에 대한 학문이다. 자연의 비밀을, 자연 속에 묻혀있는 생활고의 존재론과 인식론과 가치론을 발굴하는 자연 고고학이다.

죽음의 강 위에 떠있는 섬 같은 것이 생활인데, 생활은 문명경계 밖으로 내몰리면 죽음의 강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관외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생활이란 다시말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삶이 문명경계 밖 거대한 자연과 흡사해진 것이다. 추락한 생활은 문명의 불빛을 시기했다 혐오했다 아득히 그리워했다하는심려의 진실체로 사형수의 기다림과 닮는다.

자연은 원래 풍부한 자원의 보고이며 인식하고자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약속하는 자비로운 세계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광할한 우주 속의 티끌 같은 한 점인 지구라는자연은 인류에게 생명의 개화를 약속하기만 하는 땅이었던가? 문명의 관외(管外) 지역에서 느끼는 자연은 차갑다. 우주의 음기(陰記)가 만들어내는 자의성을 생활의 본질이라고 믿게끔 하는 냉기의 자연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히스크리프의 자연이나 사뮤엘 콜리지가 <늙은 선원의 노래>에서 표현했던 바다의 전설, 윌리엄 모리스가 동경해마지않던 북구의 정기(精氣)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 관외의 자연관이다. 하지만 이곳은 홍루몽(紅樓夢) 주인공 가보옥(賈寶玉)이 찾아간 선계(仙界)일수도 있다.

과학은 자연을 보편적인있는 그대로의자연이라고 말하지만, 울타리 안과 바깥에서의 자연 경험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인류는 자연적 조건과 상황에 순종하거나 시달리면서있는 그대로라는 인생의 한계조건들과 싸워내야만 하는 그런자연스런인생 풍경, 그 바깥에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자연은 지구 인류에게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먹을 곳과 쉴 곳이 가득한 풍요로운 모태가 아니었다. 자연은 관내로 인클로저 됐을 때에는 경관으로 향수되지만, 관외의 자연은 모래바람이 소용돌이 치는 사막 한가운데 들어앉은 치외법권이다. 인간은 그곳에서있는 그대로의야생성의 기괴한 폭력과 야만의 세력화로만 버텨낼 수 있다.

 

3

잔목이 우거진 길을 산책하다보면 상큼하고 쾌적한 공기의 촉촉한 기운과 나무와 흙에서 나는 무언지 모를 생기와 나무 잎들 사이로 비추는 햇빛에 온 몸과 정신이 싱그러운 내음으로 가득참을 느끼게 된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하는 걷기는 생명을 다시 채울듯 활력을 돋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숲의 깊이와 무성함은 점차 미지의 불안감과 공포감을 준다. 그 해악을 다 알지 못하는 이름모를 무수한 벌레들, 낯선 울음소리, 작은 벌레의 생김새, 개천 바닥의 흐물거리는 생명체, 흔들리는 잡목들 사이의 풀 한포기 모두가 자신만의 고유한 불안과 공포를 지닌다. 그리고 이 불안과 공포의 완전한 소멸은 죽음을 의미한다.

자연은 사실 바이러스요 세균이요 기생충이기도 하다. 자연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도 해왔지만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써 치명적이다. 자연은 모든 사회적 고통과 결핍과 불편과 불안의 원천이기도 하다. 자연은 미지의 우연과 필연의 황망한 상황들을 내부에 감추고 있다.

이밖에도 자연은 또 다른 근원의 불안과 공포도 알고 있다. 자신을 숨길 공간이 필요한 동물들의 은신처인 자연은 또 다른 사회적 리얼리티가 침적된 역사의 대지이기도 하다. 이중환의 <택리지>나 정감록에 나오는, 난세를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김시습이 머물렀던 영산전 (靈山殿)이나 지리산의 백명의 무당들이 살았다는 백무동 계곡과 신선너덜, 그리고 피아골도 세상의 공포나 불안을 피할 수 있게 했던 땅의 역사를 감춘다.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는 이승의 못다한 꿈을 꽃피우기 위한 자연이다. 유배지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이상향은 겹쳐진다. 이런 곳의 풍경은 나카무라 요시오(中村良夫)대지의 시각상과 인간 정신이 만나는 곳에서 발생하는 수수께끼, “...풍경은 사물 그 자체보다 그 관계성에 의하여 태어난다...”고 한, 진저리치는 관계들의 증오와 시기, 환멸을 보존한다. 증오와 환멸은 피딱지처럼 자연의 피부로 굳는다.(나카무라 요시오, 강영조 역, 풍경의 쾌락, 효형출판, 2007, 86쪽)

기원전 3세기경 초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이 정치적 모략에 몰려 절명시 회사부(懷沙賦)를 남기고 자살한 강가는 이승의 꿈을 남기고 저승의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몸을 던진 자연과 인간사회의 경계이다. 또 굴원처럼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단테 알리기에리도 그의 정치적 원한을 <신곡>(神曲)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목마다에 경멸스런 장면으로 재현한다. 굴원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표현한 <이소>(離騷)에서처럼 단테도 자신을 괴롭히던 정적(政敵)들이 지옥과 연옥에 떨어져 고통받는 모습을 눈에 선하게 묘사하며 그의 마음의 구경(究竟)을 디바인(divine) 코메디(comedy)로 가시화한다.

자연은 신선과 귀신과 조상님, 병든 자들과 내몰린자들과 속을 알수 없는 자들, 그리고 버려진 동물들의 은신처이다. 그 속의 어둠과 미지의 움직임과 소리들은 예측불허의 미래의 비전을 자아낸다. 폐농가의 찢어진 창호와 쓰레기 더미의 구데기, 산비탈 급경사에 겨우 고추농사 지어먹을 거친 땅때기 정도 있는데서 매일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며 고달픈 몸을 이끌던 노부, 텅빈 야산과 들판 적막한 저 멀리 척박한 땅 어딘가까지 가서 하루종일 혼자 쪼그리고 밭을 맸을 어린 처자는 있는 그대로의 척박한 가난의 전체 역사의 일부이다.

가난도 오래되면 문화가 된다. 경관적으로는 숭고해진다. 그저 텅빈 들판 야산에 죽을 듯 숨을 쉬며 읍내의 치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고아(古雅)풍경이 된다.

일상의 경계 그 바깥으로 조그만 나가도 자연은 사회에서 추방된 생명들이 덤불 사이에 몸을 감출 수 있는 특별한 피난처로 존재한다. 자연의 본질은 피난처이다. 그것도 실은 그 자체 보편적 진실의 고착적인 결론에 저항하는,‘의미라고 일컬어지는 생의 최고도의 화려한 가치가 결핍되었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잉여가 산수화로 재현될 수 있는 의미잉여의 피난처이다.

읍내 산업 폐기물이 이곳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면 자연은 하드고어(hard-gore)나 오컬트 무비(occultism movie), 고딕 소설이나 느와르 소설 장르의 무대를 스스로 연출한다. 자연에 숨어든 생명체의 역사가 낙인찍은 자연 속 진실은 점차 시간과 더불어자연화되고, 자연의 미래가 되고, 그곳은 자연의 역사가 된다. 비전이 된다.

이러한 미래가 산업문명에 드리우는 그림자, 새로운 문명을 향한 싸움은 유배자의 고통과 더불어 시작된다. 자연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그 속에서 산책할때와는 다르게, 산업문명이 그 위에 서있지만, 문명의 밑으로부터 문명을 한 순간에 해체할 수도 있는 가면의 세계로 얼굴을 바꾼다. 바뀐 얼굴은 시간과 공간의 기억에 유적과 유물로 간직된다.

이렇게 자연은 미나토 지히로(港千尋)가 말한 일종의 생각하는 피부 가 된다. (미나토 지히로, 김경주, 이종욱 역, 생각하는 피부-촉각 문화론, 논형, 2014)생각하는 피부가 된 자연에 대해서는 우주론적 고고학으로 접근해야한다. 자연철학이나 자연과학은 자연이 간직한 인간의 외적, 내적 타락의 역사, 타락의 근원을 다루지 않지만, 그 근원에 대한 성찰은 결국 거룩한 질서의 전조 증상으로 개시된다. 전조증상은 복잡한 유예의 길로 나타나겠지만, 산업 고고학이 산업화의 유적과 유물의 폐허에서 산업화의 진실과 진실의 이면을 캐내고자 하듯, 자연도 생활의 진실을 캐는 가치론적 시선으로서의 우주론을 구축할 수 있다.

실내의 인테리어나 장식품들도 함께 어우러져 있으면 그들끼리의 풍경을 그려낸다. 개인마다의 취향과 사회적 환경과 생리적 조건이 서로 어울려 자아내는 아우라를 드러낸다. 이것도 일종의 성좌(星座)일터인데, 정물화가 그려내는 실내 풍경이나 실내의 자연은 사실상 산업 고고학의 경계영역에 걸쳐진 자연의 파편들, 알고보면 산업화의 사회사가 남몰래 떨군, 전체상으로서의 인간의 생활 그림자에 대한 연구이다.

산업화의 사회사적 모습이나 자연의 사회사적 이면에는필요결핍잉여의 자연사라는, 미나토 지히로가 <생각하는 피부>에서 말한 것과 동류(同類)의 가시가 박혀있다. 피부에 가시가 박힌자연은 산업 고고학이 그려내는 풍경 속 그림처럼 생활로 들어왔지만, 자연은 여전히 결핍과 공포를 간직한 유배지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가혹함은 영원히 회귀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의 존재론적 상황인 심려는 사실상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거처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 고리의 관계론적 절망의 어떤 상황을 함축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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