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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자기만의 세계상

조회 수 1364 추천 수 0 2015.07.29 17:39:05

자기만의 세계상 _  새로운 체험의 초현실

1.

누구나 한번 쯤은 살면서 권태롭기까지 했던, 아귀다툼 같았던 일상이 지상의 행복이구나 하며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의 일상이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이 반복되는 생활리듬에서 나왔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별별 이유와 고통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벼터내는 것은 나날의 생계(生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목격하고 체험한, 피해 입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평가와 투지(鬪志)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은 일상에 파묻힌다.

일상은 자신의 원래의 마음은 묻어버리라는 생활의 명령이 내재된 사회 시스템이다. 일상 시스템이라는, 나 밖의 타자적 힘, 외재적 힘이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그 틀에서 삶의 평온함을 느끼는, 나를 일상적으로 살도록 하는 힘인 것이다. 나의 고유한 생명력, 내 마음의 평가적 판단력의 자생적 생명의 힘이란 알고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생활이란 이렇게 마음을 감추고 살아야하는 허접한 존재형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생명체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더 좋은 방도를 탈취하고자 하는 공격적 노림수를 견뎌야하는 질기고 공고한 시공간 체계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잔인함이 무수히 자행되는 살생의 공동체가 곧 일상이기도 하다.

시대와 지역과 체제마다 삶을 꾸리기 위해 취하는 수단은 달랐을지언정 생활을 위해 의심과 환멸을 누르고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보존해야한다는 사실은 당위요 상식과 책임으로 대해졌고 일상이 개인의 살아남기 게임 룰들이 학습되는 전투적 판톰 성채라는 점은 공통적이었다. 지극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터전이자,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류의 압력과 변화의 여지들을 떨쳐내기 위해 기만과 살상과 사실과 역사 조작도 불사하며 달려드는,‘개인이라는 인류사의 용병들이 지배하는 역사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일상의 물밑으로는 나날이 전장이다. 그리고 생활의 갈등 전선이 대치되는 바로 위로는 온갖 회유로 다양한 풍요로운 시장이, 시장체계를 생명의 터전으로 하는 모험에 찬 듯 영업이, 사업이, 연구의, 창조의 성취가 불나방처럼 명멸한다.

이렇게 생계의 이름으로 개인은 마음을 감추고 생계를 제대로 꾸릴 수 있기를 갈구하지만, 생계는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꾸미고 만들고 하는 일에 어떠한 식이로든 관계가 형성될 때만이 보장된다.‘사업성이 있거나환금성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임노동이든 그밖의 어떤 (계약)관계로든 매개 될 수 있을 때만 보존된다.

그래서 인생의 사업들과 인간의 활동들, 관계들의 움직임을 보고 느끼며 또 그로부터 새로운 사업성, 이해관계를 간취할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움직일 수 있다. 세상에 대한 평가의 눈’, ‘관찰의 눈이 있어야 살되 마음의 비밀은 감추어야 태연자약하게 저열하게나마 생존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비루한 생존이나마 가능해야 비로소소비자가 될 수 있다. 소비자란 시장의 자유로운 개인으로 소비자와 생산자의 생활은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일상이라는 하나의 체계, 한 개인의 활동들인데도 생산자로서의 개인의 꿈과 계획, 소비자로서의 개인의 욕망과 계획은 다른 문제적 차원에 속해 있어 보인다.

소비는 일상의 은폐된 모순과 적대적 관계들에도 불구하고 생산, 전시되는 문명의 여러가치들을 맛보게 한다. 그래서 상품은 숭고하고 소비는 실천적이다. 착취의 결과는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배설된다.

소비력을 갖추면 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고 혹은 구애받지 않고 최고로 평가되는 모든 것들의을 소유할 수 있고, 질에 대한 평가기준도 바꿀 수 있다. 생활관을 바꿀 수 있다. 그 모든, 불평등하게 주어진 능력(Quality)과 기회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이의 인간적 편차를 없애고 오로지 소비능력으로서만 평가받는 인간의 삶은 평가기준과 평가의 투명성이 명백하게 획일적으로 주어진 세계에서의 삶이다. 소비자에게 일상의 구태의연한 면면은 영원토록 존재해야 할 자신을 위한 쇼윈도이다.

 

2.

원하는 대로 소비하고 그래서 제대로 살고 있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인간에게 조차도 자신이 딛고 선 일상이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를 부패’(腐敗)의 땅이라는 사실이 가끔 회고될 때가 있다. 앙드레 브르통처럼 삶에 대한, 삶이 지닌 것 가운데 가장 덧없는 것에 대한 믿음, 그러니까 내 말인즉슨 현실의 삶에 대한 믿음이 계속되다보면, 결국에는 이 믿음이 망가지기 마련이다. 인간이라는 이 돌이킬 수 없는 몽상가는 날이 갈수록 그만큼 더 자기 신세를 불평하고,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물건들, 무관심하게, 혹은 노력하여 떠맡게 된 물건들을 둘러보며 고통을 느낀다.”(앙드레 브르통, 황현산 역주,해설,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2012, 61)

그리고 누군가는 이러한 일상만이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특정 인류는 자연과 사물, 사회생활과 인간 군상들에 대해 체험하면서 스스로 평가하고 지니게 된 세계상을현실로 파악한다.

이렇듯 현실을 다른 것으로 감지하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이 가능해지는 것은 어떤 순간 어떤 체험이 지닌 내용에 관한 특별한 인지를 매개로 해서이다. 일상의 상투적 세계상과는 다른 세계상을 지닐 수 있는 것은체험의 전혀 다른 미적 차원, 흔들리며 떨리며 기존 경험을 해체시키는 새로운 경험, 그 경험과의 집요한 대면, 사투에서 가능하다.

발터 벤야민이 카프카 작품을 분석하면서 얘기한, 카프카가 관리들의 속성과 수줍은 소녀를 한통속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벤야민도 그렇고 카프카도 그렇고 이들의 독특한 인생 체험과 해석능력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카프카에 있어서 관청과 가정에서의 상황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접촉 한다 ....... 관청과 소녀가 공통으로 지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K<><소송>에서 만나는 수줍은 소녀들처럼 모든 것에 대해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는 일일 것이다. 즉 이 소녀들은 마치 침대에서 그렇게 하듯 그들 가정의 품안에서 불륜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발터 벤야민, ‘프란츠 카프카’, 임철규 편역, 카프카와 마르크스주의자들, 도서출판 까치, 1986. 42.)

카프카의 현실은 카프카의 체험 속 세계이다. 카프카는 일상에서는 혹은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성격의 대상으로 보이는 관청수줍은 소녀를 불륜에 순순히 몸을 내맡길 수 있는 동질의 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벤야민도 이 사실을 이해한다.

이들에게 이들 고유의 새로운체험은 새로운 현실상을 인지, 도모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다. 새로운 체험은 현실의 진정한 면모를 들춰 내 줄 수 있거나 일상이 허락하지 않는 새로운 현실을 마치 마술적 리얼리즘처럼 궁구할 수 있는 창조적인 초현실의 경계지점들이 될 수 있다.

앙드레 브르통 등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이러한 체험이었다. 구태의연한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다른 체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방법은 현실의 한 순간, 인식이 성좌를 그려내도록 하는 어떤 의식의 트임이다.

“... 이 운동에서 이론이나 환상이 그 주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경험이 주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이란 꿈으로만 ...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 범속한 트임(profane Erleuchtung), 즉 유물론적이며 인류학적인 인스피레이션에 들어있다,(발터 벤야민, 현대사회와 예술, 차봉희 편역, 문학과 지성사, 1980, 26.) 초현실주의가 그 창립자들을 거쳐 영감에 가득찬 꿈의 파도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그 당시에는...... 삶은 오직, 잠듦과 깨어남 사이에 위치한 문지방이 이쪽저쪽으로 흘러넘치는 수많은 상()들이 넘나들 때마다 인간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곳에서만이 살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위의 책, 25.)

발터 벤야민이 범속한 트임으로 명명한, 범속(凡俗)한 것, 진부함, 평범한 것으로부터의 계몽적 영감은 종교나 이념으로 대체해서가 아니라 일상 내부로부터 현실을 내파(內破)해서 그로부터 언어와 상의 새로운 미적 질서로 세계상을 새로이 세우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의 현실비판적 성격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비판과는 공격 지점이 다르다. 기존 체제의 현실을 부정한다는 의지적 차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으나, 현상의 본질에 대한 관점도 다르고 다시 새로운 공고한 일상체계를 건설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현실에서 순수하게 다른 미적 차원을 통해, 여전히 현실이라는 토대에 얹혀 있으면서도, 굉음도 내고 비명도 지르며 괴상하게 삐거덕거리면서도 현실의 정체가 현실의 부분 속에서 파편적으로나마 파악되도록, 혹은 섬광의 빛 사이로 어른거리듯 번득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부분 속 현실의 전체상을 포착하고자 할 뿐이다.

이렇듯 새로운 체험을 갈구하며 그러기 위해 현실을 새롭게 읽으려는 눈은 개인이 마음과 생각을 다해 본, 현실 각 부분들에 내재된, 기존 사회가 만들어낸 사업과 생산과 소비에서의 평가체계와 평가론에 대한 독해이자 이에 연관해서 자아의 인정투쟁에 나선 공포의 눈이다. 이러한 독해적 투쟁을 매개로 개인은 새로운 일상, 새로운 바벨탑을, 새로운 사회주의를 기획하거나 아니면 자기결론의 몽타주로 부조리와 모순 너머 몰합리성의 초현실적 세계 구경하기에 나선다.

누군가는 자연만이 현실의 유일한 실체라는 세계관을 지니고, 사회주의자 또한 다른 세계관을 지니나, 이들의 세계상도 현실의 일부이고 모든 사물의 체계와 사회생활에 관련되는 숱한 사건들, 국면들, 관계들, 나아가 천개의 고원으로 기다려온 역사와 미래의 계획과 비전들, 학문과 예술 등도 모두가 실제로는현실로 작동한다. 다시말해 현실의 실제하는 부분이다. 현실은 이토록 다양한 갈래와 범주로 작동된다. 인간들이 지닌 현실상들이야말로 무한한 개별적 의미체계,그 안에 내재한 언어문법(욕망과 역사)과 평가론 곧 가치론들이 매개된, 의미연쇄의 표현적 입자들이다.

이 모든 현실()들은 모두 특별한 전제를 가진 가치평가에 의해 형성된 현실들로 각 입장들에 내재된 평가론과 평가체계 곧 특수한 이해의 방식과 입장들로 존재한다. 그리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개인의 눈 또한 개별적 눈으로써 새롭게 결심을 낳기도 하며 개인적의미화충동으로 출렁이는 의미화 실천의 개인만의 현실이다. 세상에서의 자기 자신의 총체적 이미지를 알고 싶어하지만, 남들로부터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도 알고 싶지만, 사실상 객관적으로 제대로 알기 힘들어 늘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그리워하는, 이미지 평가를 늘 구하고 다니는 개인의 현실이다.

이렇게 현실로 작동하는 모든 자연적, 문화적 세계의 층위들은 본질적으로 평가체계의 층위들이고, 이러한 현실을 보는 개인의 눈은 평가를 구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 둘의 매개에 의해 형성된, 개인이 배우고 보고 느끼면서 갖게된 개인만의 현실상도 또한 제3의 현실로 기능한다.

개인에게 가장 구체적인 현실은 이 제3의 현실상이다. 실제하는 세계를 자신의 인정투쟁에 따라 그려낸 그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현실상으로, 이 현실상이 지닌 도덕감 혹은 플라톤 식으로 표현하면 진리에 대한 사랑, 곧 인간적 고뇌의 질과 도덕감은 가히 플라톤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피라미드 처럼 위계적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이 아닌, 도덕감의 계급들간의 인식투쟁이 존재한다.

이 세계상의 모습은 누구도 실제 그대로는 공유하지 못하는 개인이 간직한 세계상이다. 개인의 고유한 현실이다. 이 현실이 앙드레 브르통과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의 체험적 자아를 형성한다.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의 세상에 대한 각()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누구나는 나 만의 현실이라는 것을 품고 있으며 그 현실에 비추이는 자기 위상학을 연구한다.

3.

개인은 자연을 감상하면서, 사물을 보면서, 주변 환경을 보면서 자신을 본다. 인간이 만든 모든 가치관에 저울질해서도 자신을 가늠한다. 자연도 사물도 주변 환경도 개인의 주변 현실이자 개인을 비추이는 거울이다. 이 거울을 통해 보는 자아는, 거울 속 자기 위상학의 배치에 따라 동요하는, 개인으로서의 존재론적 위상이 규정되고 평가되는 자아이다. 눈에 보이는 것, 읽은 것 모두가 일종의 평가된 이미지라는 거울로 작용하고 거기서 자신의 위상을 쥐구멍 파듯 파들어 간다.

즉 자연이든 문화이든 의식에 대하여 거울로 존재하는 바탕이라는 의미에서 현실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현실에 반사된 자아상은 자연이라는 거울 뒤 무한과 거울 앞 유한한 실제성이 서로 연결되는 통로에 걸친 반사상이다.

생활자로서의 개인은 일상이라는 면죄부의 두께를, 면죄부로도 외피로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면죄부의 행간과 면죄부의 신화, 그 안에서 조우할 수 있는 우연이라는 사건의 두께, 의미의 표리가 부대끼며 떠돌면서 만들어내는 방향, 악의 소환을 두려워한다.‘거울은 평가체계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개인은 평가적 체계인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에 자기인생의 합목적성을 구축한다.

합목적성과 초현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기능한다. 사실상 일상의 진면목은 초현실적이지만, 이에 합목적성을 부과해 개인과 사회는 가까스로 세계상을 유지한다. 짜라투스트라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은 평가체계라는 거울 앞에서만 산 사람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이 평가체계는 인류 의미화 실천의 총체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 면전의, 개인이 바라보는 자기만의 거울이다. 자기 기만의 거울이 되기 쉬운 거울이다. 이 관계는 초현실주의적으로만 그 병존성을 가시화할 수 있다.

평가체계는 사실 막연한 상징위계이자 그래서 알레고리로 논리적인 본질의 것이 아니다. 개인에게 비춰진 평가체계로서의 세계라는 거울은 거울이되 명증하지 않다. 거기에 비추인 것은 불멸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시기심과 소설같은 자기서사로 엮은 자기의식이다. 아무도 그 속에 들어가 본적이 없는개연성으로서의 개인의식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 거짓에 대해 규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절치부심(絶齒腐心)의 세계이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때로는, 그러니까 현실상의 평가체계 속의 자기 위상학인 세계상은, 개인을 새로운 삶의 형식 곧 일상의 새로운 영위방식을 찾아 보도록도 한다. 소위 일상에서의 자기혁명이나 사회혁명을 꿈꾸게도 하는데, 변화의 결과가 개인적 삶의 전향이든, 사회체제의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한 헌신에로 이끌든, 기존 일상체제를 깨쳐내어 삶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느끼고 알고 싶은 것이고, 새로운 자기 위상학의 삶, 새로운 가치평가체계의 생활을 살아보고자 한다.

이렇게 삶의 새로운 모색을 위해 서구 지성사에 나타난 가장 체계적인 방법이었던 마르크시즘은 계급의 혼을 당성으로 소환하고자 한 초월적 명령체계였다.‘초월적이란 계급적 이성의 정당성이 초월적 당위처럼 작동했다는 의미에서이다.

하지만 계급투쟁 등 혁명과 순수 정치투쟁의 수단에만 의존하지 않는 생활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인간에게 남겨진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어쨌거나 초월자를 눈앞에 내걸면서야 가능했다. 종교나 절대규범 같은 것으로 행해졌다. 혹은 예술에서는 이러한 시도들은 초현실주의에서처럼 아방가르드 예술정신을 표방하는 진보적 예술운동으로 나타났다.

초현실주의에서처럼 초현실적인 것을 통해 일상의 변화를 꾀하는 일은 인류의 오랜 수단이기도 하다. 원시 인류에게 자연재해 등 초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에 대면했을 때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초현실적인 것의 소환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만일 체제가 일종의 절대적 난공불락의 요새라면, 결국 내 의식의 변화를 꾀하면서 현실과의 관계설정을 새롭게 하는 방법만이 내 삶의 변화가능성으로 남는 것인데, 내 의식의 자발적 변화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의식은 초현실적 수단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있다. 초현실적 세계상은 인간의식의 마지막 자기보존 수단이요 위로의 무기이다.

어떨지 모르는, 제대로 된 삶에 대한 계몽의 과정은 감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그 감각으로 새로운 현실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상에서의 모든 류의 정치적 저항은 본질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이다. 초현실적인 것은 계몽적이고 미적이요 정치 투쟁의 고고학 문법으로 작동한다.

예술가가 체험한 자연은 그에게 자연의 눈으로 본 세계가 어떤지 가르키며, 예술작품들도 그에게 예술작품이 평가한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예술가의 예술세계는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거울상이다.

예술은 세계의 질적 차이들에 대한 평가기록이다. 예술가에게는 사물도 일정한 가치평가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이며 그래서 그 가치평가기준에 따라 개인을 비춰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 한다. 사람도 사물을 바라보지만, 사물도 사람을 바라본다. 사람에 대한 사물의 평가로 인해 사람은 사물의 질()의 위계에 갇혀있음을 느낀다. 사물의 가치는 나의 초라함의 근원이다.

김경인의 <공포>와 신학철의 <묵시-802>는 무엇인가를 보는 장면들이다. 보는 사람도 불특정 다수이지만 보고 있는 대상도 화면상에는 명시돼 있지 않다. <공포>의 작가는 어두운 시절 문맹의 모습으로 살아야했던 지식인의 자화상을 그렸고 <묵시-802>에서는 경직된 채 한 곳을 동시에 응시하는 개인들에 대해 보여준다.

신학철은 한 방향을 바라보며 한없이 떠올렸던 절규들, 하지만 비겁한 방관자요 구경꾼, 기껏해야 비명이나 지르고만 묵시? 침묵?”에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저 구경꾼 속에 내가 신은 신발의 입”, “그것이 잘난 구두이든 요염한 부츠이든 한 사발 막걸리 고무신이든 뚫린 입으로 더러운 냄새가 나는 입을 막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각기 80년대 초와 90년대 초에 제작된 두 작품은 보고 있어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지경들을 주제로 한다. 어떤 지경이라 함은 현실의 어떤 구조요 힘인데, 두 작가가 보는 현실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현실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현실 속에서 취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입장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두 작품은 기록한다.

김경인의 자화상이라고 하는 <공포>에서 개인은 냄새나는 맨홀의 더러움과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몸을 숨기고 웅크린채 세상을 놀란 눈으로 공포에 차 바라본다. 몸을 숨겨 현실에서 도피해 있지만 바라보기를 멈추지 못하고 온몸과 마음이 맨 홀 밖의 현실에 집중돼 있다. 김경인에게 세계의 모습은 이렇게만 존재한다. 그가 보는 세계상 속에서의 자신의 위상은 공포와 경악으로 겁에 질린 맨홀 속 개인처럼 표현된다. 현실은 여러 층위의 동력으로 그를 압박하고 맨홀 하수구에 몸을 은페하고 있는 개인일지라도 이미 현실은 그의 코 앞에 다가와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상태를 즉자적으로 표현하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고 <공포> 시리즈 전체 작품들은 이후 공개적으로 전시된적이 없다. 작가와 우리 미술계의 현실관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가 여전히 맨홀에서의 세상보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적 위치로 자신을 두는,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에게 현실은 자신의 사회적 삶을 평가하는 기관이고 그는 이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맨홀 속으로 은폐시켰다.

그래도 맨홀 속 공포감에 휘둘린 개인은 세상이 바뀌면 언제든지 세상 속으로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고 싶어 공포 속에서도 세상을 지켜보고 있지만, 세상의 구체적 상은 그리지 못했다. 작가는 그런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렸다. 김경인에게 세계는 자신과 자신의 코 앞에 까지 근접한 붉은 현실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신학철의 <묵시>속 개인들은 각기 무언가를 주장하는 듯 곧 각자 움직일 듯 해보이지만 이들은 불투명한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속한 존재들이다. 이 작품은 이들을 바라보는 신학철 자신의이 주제이다. 일종의 현실 속 개인들에 대한 입장표명이다.

신학철은 작품에서 그가 보는 80년대 개인들의 삶의 양태를 보여준다. 보여준다기 보다 이 양태들을 응시한다. 화면속 각각의 사회계급적 유형별 구두 캐릭터가 보는세상이 있다. 그 세계는 다양한지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구두로 입을 막고 있는 점으로 보건데 김경인의 맨홀 속 주인공이 보는 세계와 다르지 않다. 개인들은 이 세계를 응시하고 있되 스스로의 사회적 존재에 걸맞게 자신을 가린채 그 만큼의 시선에서만 현실을 응시한다. 현실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그림 속 인간들은 아이콘으로만 재현이 가능한 얼굴없는 대상들이다,

신학철의 <초혼곡>에서도 개인은 민족구성원의 일원으로 즉 사회의 일원으로, 구성원 전체는 동일 경험의, 고통의 개인들로 집단화되어있다. 작가는 이들을 집단으로 불러내 위로하는 초혼곡을 부른다. 달리 생을 각성할 방법을 모른다.

주재환의 <검정 잠바 다리를 건네다> 또한 작가의 자화상이기도 하지만, 갑을관계의 굴레에 놓인 을의 퇴근 길 모습을 기린 작품이다. 주재환과 신학철에게 개인은 현실의 부분으로 작동되는 일정한 실체들을 의미한다. 검정 잠바 사나이는 그의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로 불안하고 고독하기 그지없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생활자의 모습이다. 그의 고독은 한껏 부푼 잠바만큼이나 커지고 있지만 인생살이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부풀려진 잠바는 우울과 분노의 거대한 회한으로 표현됐는데, 잠바 안으로부터 무엇인가 초현실주의적 번뇌의 세계가 열릴 것만 같다. 검정 잠바가 건너는 다리는 전혀 다른 세계, 가까운 죽음이 아니라면 검은 구름 장막 너머 불가능한 현실, 꿈의 초현실적 어느 세계로 나아가는 다리일 수도 있고, 이흥덕의 <>에 드리운 알지 못할 어둠의 무게로 인해 파탄에 이른 가장이 건너야하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일수도 있다.

검정 잠바 사나이의 고뇌는 사실상 그 자신이,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에 비추어 자신을 평가한 내용으로서의 고뇌이다. 그에게도 세계는, 김경인과 신학철의 작품들에서처럼 일정한 사회적 압력의 실체로만 작용한다. 하지만 세계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평가하는데서 절대적 압력을 느끼지만, 평가당하는데서의 고뇌의 봉우리가 거대해질수록 고뇌는 자율적 힘을 얻게 된다.

주재환의 <엄마! 저 왔어요>도 신학철의 <초혼곡>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흩어져 사라져가는 피눈물의 집단기억을 위해, 역사를 위한 초혼(招魂)을 위해 사실로서의 역사를 현재로 재귀토록해 역사를 기억하고자 한 작업이다. 남한의 보편사에서 기억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현실이지만, 주재환은 자기만의 역사 평가체계를 작동시킨다. 이 체계에 의한 보편사 서술에서 보자면 역사의 저 장면은 그의 인문학에선 매우 상징적인 역사의 한 장면인 것이다.

그는 우리 시대 전형적인 일상공간을 상징하는 아파트 현관 모습을 엄마가 있는의 의미로 대체했는데, 그에게 아파트 현관은 집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의 경계였던 것 같다. 아파트 현관은 바깥의 현실과 집안의 현실을 구분하는 경계의 문지방 같은 것으로 죽은 아들의 귀환은 그 경계를 넘어온 사건인데, 역사를 재평가해 기억하고 다시 쓰기는 초현실주의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신학철과 주재환에게현실은 자신의 그림이 가리키는 진실속에 있다. 이들의 예술관에는 강력히 살아 계승되는 특정한 현실 평가의 인본주의적 체계가 있다. 이것을 우리 인문학 전통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전통이 여전히 움직이며 개인사와 보편사를 동시에 매개할 수 있는, 현실의 참담함의 구경(究竟)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다. 현실이라는 거울 곡면이 비춰내는 각기 다른 다양한 세계의 질을 드러내고자 예술에 임하고 있다.

월간미술 연재 20158

   이미지, 주재환, 검정잠바 다리를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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