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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예술과 생활2

조회 수 481 추천 수 0 2015.05.28 12:30:32

김성룡 천일야화프로젝트.jpg김성룡천일야화 프로젝트 



 1.

역사는 거창한 비전과 계획이 이룬 삶이 아니다.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구성원들 일부가 대량살상으로 인해 혹여 절멸 된다고 해도, 나머지 개인들이 비참한 생활로나마 생존할 수 있다면, 역사는 생존자들의 핍진한 이해관계의 긴장으로 무장돼 미래만 바라보며 나가게 된다. 굶주림과 학대가, 살상과 모반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은 새벽위로 떠올라 밤사이로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일상에서 몇몇 극소수 개인들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도 기획하고 생의 미화도 만끽하면서 나머지 개인들의 삶을 고갈시키며 한순간에 죽음에 이르게도 하지만, 이들 극소수가 행하는 압제와 만행을 중지시키려면, 나머지 전체는 자신의 일상과 일생을, 생명을 바쳐야하고 이 싸움은 수십 년, 수 백 년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오랜 인류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다양한 인종들의 생존능력에도 불구하고 생활 가운데서의 사는 마음, 그 속사정과 속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슬프다든지 기쁘다든지 하는 반응 외에는 제대로 밝혀진 내용이 없다. 학문과 일부 문화예술 작품들에서 그 내용이 개별적으로 확인되고 있긴 하지만, 학문과 문화생산물도 부와 명예의 적극적 수단이 되고 산업화 추세도 반영되면서 마음이 감추고 있는 생활론, 마음이 행하는 대사회적 전략전술에서의 진지전의 양상과 양태는 세간의 눈에 잡히지 않는다. 그 양상과 양태가 표현을 얻었다고 해도 추상화로 표현돼 구체적이지 않거나 외재적 시각으로만 보여진 이론적 설명으로 비슷하게 더듬어 질뿐이다.

실제 생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방식으로는 넌픽션 도큐멘트 형식도 가능할 수 있으나 여기서도 사회를 구성하는 시스템에 관한 기록이거나 개인의 일생을 구성해 보여주거나 개인의 마음의 주장을 담으면서 마음 속 진실의 진면목, 한 인간으로서의 인간 전체로서 느끼고 있는 생각들이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온전히는 드러나지 않는다. 일부 진실일 수도 있는 문제가 일 뿐이다.

학문과 예술은 개인의 범속한 속사정을 그가 살고 있는 일상체계와 연관해 낱낱이 헤쳐 내는 일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사실주의적이든 자연주의적이든 계급전형으로 개인을 표현하는 경우는 있으나, 그의 뱃속 모나드같은 밀실 창을 통해 시커먼 혹은 가여운 시민으로 외부정세를 파악한 결과로써, 겉으로 드러난 그의 말과 행동과는 다른, 달리 어떻게 결정했는지는 본인조차도 해명할 수 없는 그런, 마음가짐의 속사정은 시각적 재현상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우리 근현대사에서 우리 미술이 이러한 바의 리얼리티에 접근하지 못했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인간관계는 가짜라는 의미가 된다. 진실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진실을 제대로 본적이 한 번도 없다는 뜻이다.

마음의 궁리니 심사니 하면서 거론하는마음이란 일반인 혹은 대중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는 그저 일 개인의 마음이 생각하는(心思) 것이거나 마음이 생각하고 있는 일(心事), 그래서 마음의 역사(心史)라고 할 만한, 개인마다의 마음 속 작동내용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오형근의 아줌마사진에서 얼핏 보여지는 아줌마마음의 작동 소리요, ‘중간인시리즈에서의 중간인의 심사(心思)인데, 문제는 마음이 복잡하게 작동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정도로 이미지는 마음에서 어떤 착잡한 소리들이 나고 있음은 보여주지만, 그 마음의 소리의 실타래 같은 엉킨 갈래들이 어떤 숨긴 마음을 반영하는지, 얼굴 뒤로 가려진 숨긴 마음의 구체적 내용의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재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마음은 논리로 인식되고 배운 사물에 대한 생각이나 인식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취하게 된 마음의 생각이고, 이 생각들이 생성, 소멸되고 마음에 쌓이기도 하면서 나는 마음의 착종 소리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간지(奸智)라고도 할 수 있는데, 프로이트나 라캉 등이 이를 상징계나 실재계 등의 개념과 구조로 밝혀보려고 하지만 마음 속 깊숙이 안착되어있는 더럽게 리얼한, 마음에 간직된 삶의 개인적 체험내용들은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남아있다.

 

2

권력의 가장 근본은 먹이’, ‘생계를 보장하는 능력이다. 권력의 시작과 끝은 생계의 보장과 보장의 약속이다. 일상은 이 권력이 개인 외부에서 개인 내부로 전달되는 매개체이다. 모든 이러한 미시권력이 작동되고 있는 일상체제는 개인이 일상적으로는변화시킬 수 없는 레바이어던(Leviathan)의 세계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일반인들은 권력 자체의 명운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도 않는다. 전시체제 같은 현실아래서는 개인과 사회의 내적 결속력은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다. 개인의 내면에서 외부를 바라보고 있는 생존본능이 내심으로는 어떠한 작심에 이르게 될지는 사실 본인들에게도 명쾌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은 일상이라는 바다에 떠있지만, 체계에 매개된 숙명적 사회적 존재론의 특정 분절에 불과하지만, 그러면서 사회적 실제에 맞물려 생존할 수 있지만, 개인의 마음의 역사는 곧 개인의 내면의 삶은 수면으로부터 가려져있다. 가라앉는다.

일상생활에서는 본심이 담겨지지 못하고, 그리하여 본심은 세계를 비인칭화 한다. 본심은 다른 정복을 통한, 마음이 행하는 무림병법의 승리를 기획할 뿐이다. 다시 말해 본심에는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다. 본심은 오로지 전략과 전술로만 자신의 사회적 존재 곧 개인성을 현현한다.

이러한 것으로서의 일상체제는 물화의 세계요, 개인은 마음 안에서 범속성으로 자신의 진지를 지탱하며 생존을 모색한다. 겉으로 드러난 역사에 비해 이러한 마음의 역사는 인간극의 부록이고, 심사가 뒤틀린 지형에서의 진지를 마음 안에 구축한 것이지만, 사실상의 역사의 실제적인 유일한 영속적 담지자이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결의된 개인의 행위는 최후의 총괄이고, 전면적이고 최종적인 결론이다. 행위는 의미와 사실, 보편과 개별, 현실과 이상을 단일하고 유일한, 그리하여 마침내 최종적인 콘텍스트에서 연결하고, 관련시키고, 해결하는 바의 행위이다.

때론 결의된 행동은 친일로 나아가게 하거나 전향에 이르기도 한다. 그가 존재함에는 더 이상 알리바이가 필요하지 않다. , 전향은 상황=대중에 대한 대처방법의 기능적 변화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에 따른 자기비판과 반성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친일과 전향은 자기 숙고의 오랜 계산이기도 한 것이다.이러한 전향노선은..., ...근대 일본에서 제도 통과형 수재들에게 많이 보이는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 중소 수재들이 메이지 이래 일본의 얕고 빠르게 회전하는 진보코스를 담당해왔다.”

즉 체제 보다 질긴 것이 개인의 자기 생의 영위 본능이고 생의 번영을 찾는 마음의 행동이다. 이익을 위해 노예처럼 굴 수는 있으나 시키는 일을 뭐든 다 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개인이 그 체제를 자신의 생의 모든 것이라고 믿게 하지는 못한다.

체제의 동요로 불안하긴 하지만, 일상을 영위해가며 체제의 살인에 직접 관여하거나 연루되지 않으면 그뿐, 일반적으로 개인적 생의 의미는 개인의 삶에만 있다. 그리고 마음속 심경에는 이러한 그의 태도가 인간의 보편성이라는 생각이 후손대대로 명심해온 규범이다. 생은 계속 진행되어야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저 생활을 계속 버텨내도록 하는 생활의 묘한 수()가 제일 좋은 수() 곧 치부(致富)구멍으로 알고 섬길 뿐이다.

심경(心境)에는 개인적 우여곡절이 낳은 수많은 그림자들과 풍경소리와 못다 큰 아귀들이 울부짖는 소리들이 어른대고 있다. 그리고 개인의 심경에 비친 외부세계의 반영상들은 매우 공격적으로 사회생활의 당위를 고한다. 개인은 이런 의 위력이 얼른 지나가는 것이기 만을 바라지만 심경에 비춰진 세상의 후경(後景)은 초자연적 위력으로 그늘을 드리운다. (김성룡, <천일야화 프로젝트(2007)>)

한일합방이든 한국전쟁이든, 4.19 혁명이든 유신체제든 흘러갈 역사였고 거기서 단지 생존만 해도, 아니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부귀영화를 누리면 좋고, 자신이 위해를 입거나 손해를 입지 않으면 좋은일이다. 이러한 개인들이 좋다'고 믿는 것은 권력자가 좋다고 하는 바로 그것대로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생존의 안위를 보장하고 생의 번영의 가능성을 더 열수 있도록 하는 일이 좋은 일이고, 옳음에 대한 기준도 이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 옳은일이다.

이들은 중산층이거나 중산충이 되려고 하는 우리들 자신들이다. 개인은 이런 점에서는 서로 전혀 다르지 않는 개인들이다. 개별성은 존재하되, 개인이 겪는 체험이 사소하게는 다르되, 이러한 심경에서는 동일자들이다. 개인은 이런 면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 개인의 다양성과 차이는 사실상 구별하기 어렵다. 모든 개인들은 동일인이다.

그 심경의 구경(究竟)에 펼쳐진 스토리가 각양각색으로 구구절절 하다는 점, 그래서 대 사회적 관계에서의 심사(心思)의 진() 구축방식이 다르지만, 이 진의 모양새, 전술과 전략이, 소위 생의 기획 상의 취지와 의도가 다르지만, 모든 개인들의 마음에 있는 이런 부분들이 세상에 드러난 적이, 노골적으로 공론화된 적이 거의 없기에, 생활자인 개인은 심적으로는 동일한 이미지로 환유(換喩)될 수 있고, 문화적 정체성의 차이라는 구분으로 은유(隱喩)적으로만 구별될 수 있는 개인들이다.

그래서 모든 개인관계는 그 틀어 앉은 내면의 시선이 조금씩 엇나가는 다른 곳을 향하는 배열 군을 이루면서 인간관계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스펙트럼화된 경관을 이루고, 일상체제에 스스로를 암묵지로 배치하면서 전체사회의 부분을 이루는 불안정한 인자(因子)로 매개된 사회상(社會相)의 파노라마로 연출될 수 있다.

모든 사회의 개인은 다양한 주체들이 아니라 동일한 주체들이되 다른 몸을 갖고 있고, 동시에 동일한 한 몸의 각기 다른 영혼을 지닌 작은 아귀들로써 다를 뿐이다. 사회적 생명의 못난 몸을 동시에 공유하는 사회적 존재자들로 무수한 동일자 계열들을 낳지만, 각 동일성의 마음이 다른 무기를 은닉한다는 점에서 각개격파 병법이 필요한 원혼의 주체들이다. 이들 개인들이 지구 위에서 펼치는 개별적 생의 모습은 우리가 우주인을 상상할 때의 바로 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첨단 기술로 체제를 무장시켰지만 고성(固城)같기도 하고 음울한 지하생활 세계 후미진 동굴에서 공동체 일원으로 냉랭하게 사는 모습이다. 상투적인 우주인 이미지는 사실 우리 지구인 자신의 모습들이다. 그 우주괴물 안의 마음의 지경(地境)에 있는 그림이 다를 뿐이다.

 

3

하지만 우리 미술에서의 일상묘사는 개인 외부의, 개인을 옥죄는 일상체제를 시각화해 비판하거나 전통적으로는 주변 실내 모습이나 실내정물과 인물 그리고 거리나 경관풍경을 그리면서 일상의 세계를 재현해왔다. 친일작가로 알려진 김인승이 식민지 시대 그린 <화실>(1937), 김중현의 <실내>(1940), 전쟁 직후 나온 박상옥의 <한일>(閑日, 1954), 장리석의 <소한>(小閑, 1956)은 모두 한가로운 일상을 표현했다. 우리 근대미술의 주류 작가들 대부분은 이렇게 일상의 모습을 표현하면서 그 일상의 모습으로 자신도 표현한다.

이병상의 <아침 길>(1956), 배동신의 <>(1958>, 장욱진의 <나무와 새>(1957), 박득순의 <미사 후의 스케줄>(1960)과 도상봉의 <개나리>(1972), 성재휴의 <임간수로>(1977)등 모두 소재별로는 거리와 풍경, 정물과 인물이지만 사실 일상의 한 부분으로 본 것이지, 소재별 미적 궁구대상은 아니었다. 우리 작가들은 자신 밖의 외관의 세계, 기존하는 상투적 일상의 모습으로만 자신의 심리를 드러낸다. 정치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였고 그렇게만 살아온 미술가의 일상이어서 그렇게 그리는데 익숙해졌다. 이우환의 관계시리즈의 경우 일상은 일본식 정원의 한일(閑日)로 다가온 것인데, 그 정원 모습이 질릴 때마다 스스로 정원에 놓인 돌과 오브제의 배치를 조금씩 바꾸는 것으로 자신과 자신의 예술을 표현한다.

남관의 <회고-1>(1983), 조양규의 <창고-31>(1956), 신학철의 <갑돌이와 갑순이>(1991)등은 앞서의 그림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가 덧붙여진 일상에 대한 생각을 담는다. 조양규의 작품과 신학철의 작품은 일상의 생활현장을 그리되 계급적 시선으로 재현한다. 남관의 작품은 회고된바 일상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했는데, 회고된바 체험의 기억이 어렴픗한 추상으로 남는다. 그 추상에는 심정의 칼 같은 것은 제외되고 본 바 외관, 그 중에서도 전통에 대한 문화적 기억의 잔여물에 대한 느낌만으로 지나간 시절의 일상을 표출하고자 하니 추상화 된 것이고, 그 추상 속에서 자기 마음의 구경(究竟)에 동정심을 표한다.

한국 근현대 미술을 정물이든 풍경이든 인물이든 소재별로 굳이 나누고는 있지만, 사실 우리 작가들은 자기 주변의 일상적 대상을 그 외관상의 정감에서만 느낀 대로 표현하는 작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중섭과 박수근, 장욱진, 그리고 이밖에도 대부분의 잘 알려진 한국미술은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일상의 외관, 특히 작가가 속한 시대의 시대풍조에 따라, 곧 누구나 좋아하고 무리 없이 수용하는 생활상의 모습들을 표현소재로 삼았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그리기 좋아했고, 이런 그림들이 또한 콜렉터들이 좋아하는 그림인 것은 분명했다. 작가들은 그림에 자신의 일상에 대한 느낌과 자신의 정서는 넣되, 자신의 진짜 마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자신의 번민과 고통스러움에 대해서는 혹은 욕망에 대해서조차 일그러진 상이나 뻔뻔한 외관으로만 표현한다.

이들이 진정 자기 자신의 생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그 속마음의 리얼리티는 그림에 표현된바 그대로 일 수도 있지만, 그대로라고 우리는 믿어왔지만, 사실 좀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없다. 이들의 작가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작가들은 식민지 시기에도 한국 전쟁에 임해서도 개인의 일반적 고통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은 거기서 삶의 궁여지책이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각오로 살면서도 실제 그 마음 안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는, 복수(複數)의 무수한 구경(究竟)들이 있는지는 말을 하지 못했다.

1970, 80년대 이후 들어 미술은 일상체제에 대해, 그 리얼리티에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이 들춰낸 사회적 리얼리티조차도 사실상은 자신의 외부에 보이는 일상의 장면들을 통해서만 말을 했다. 일상에 대한 이러한 비판에도 작가의 마음의 역사가 실재계를 접하면서 터득한 혹은 축적한 무수한 간지들, 상흔들, 개별적 생존전략과 전술의 목록과 효과는 작품이라는 전장에 이름도 못 내밀었다. 작가의 심사(心思)가 매개된 실재계를 귀환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듣고 보지를 못했다.

비디오 아트나 복합매체 작품에서는 일상체제와 개인의 심사(心思, 心史)의 동시매개를 통한 생활론의 재현이 보다 구체적이고 전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뮌의 <습관적 열정>(2009)에서처럼 개인과 만나는 일상의 문제지평 혹은 일상과 만나는 개인의 심경을 보다 수직적으로 해체해 단말마적이면서도 구조화된 삶의 개별적 전투들의 양상과 양태들을 꺼내 확인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미술에서는 마음의 실상(實狀)은 한번도 제대로 표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전향의 변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가능하다. 계급의식상의 갈등이 어떻게 자기 생의 구체적 문제들에 부딪혀 해소 될지는, 그 길에는 여러 가지 전망이 놓여있고, 이 중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는 스토리일 뿐이다.

정정엽의 <kitchen>(1999)과 박진화의 <무모한 어둠에 혹은 붉은 나무와 자상>(2000)은 시간적, 공간적 틈 사이로 한 순간 감춰진 일상의 심연이 열리듯 개인의 숨겨진 심경들을 드러낸다. 일상은 일상체제와 개인의 심경이 매개된 전략적 지점으로 혹은 경관성의 해체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80년대 이후 작품들이 시스템을 드러냈지만, 사실 시스템은 시스템이자 곧 사람이기도 하기에, 사람이 운영하는 시스템이자 사람을 규제하는 시스템이기에, 일상체제만을, 일상의 정치경제학만을 전형적으로 객관화해 드러내는 재현방법만으로는 실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실제는 사람의 생활의 실제이므로 사람과 함께 드러내야한다. 하지만 지난 근현대의 삶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드러난 범죄를 통해서만 개인이 궁리하고 있는 바는 공공영역으로 매개되고 표현된다. 사람 속에서의 행동하고 선택하고 판단함에서의 갈등, 심경의 진면목이 시스템의 언어로, 생활론의 공적 차원으로 번역되지 못했다. 마음은 복잡한데, 고뇌의 끝에 복잡함을 총괄하고 결단해서 해결의 길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서용선의 작품 <생각중>은 생각하는 중이다.

오형근의 중간인은 서용선의 생각중인 사람이기도 하다. 서용선의 도시 군상의 일상 그 너머 후경은 어지간히 화려한데도 알 수 없는 맹목과 허무가 느껴진다. 허무는 허무 개그로만 이런 아이러니를 생활론으로 포착 할 수 있지만, 보완이 가능하지만 서용선의 일상은 개그를 허용하지 못한다.

서용선이 거칠게 파악한 개인의 머리들’(두상 조각들)은 거친 만큼 동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은 우리 삶의 시스템이자 그 시스템에 의해 거칠게 조각된 개인적 생의 양태와도 같다. 각 두상 조각의 차이는 동일계열의 반복이면서도 전체로는 심계(心界)의 차이를 지닌 스펙트럼의 일부들이다. 이들은 제작날짜로만 시스템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전시에서는 파노라마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진 생각 중인 인간 두뇌들이다. 두뇌로만 생각하기에 사실상 시스템들의 부분들이다.

우리 근대미술에서의 일상의 표현은 피상적이다. 우리 미술은 우리 개인들이 내보이는 유사한 심경과 의견의 지속을 반증한다. 근대미술의 역사는 그만큼 솔직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우리 근현대 미술은 우리 인식의 질()을 보여주는,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은 것을 표현하는 것에 미숙한, 개체성이 서로 간에 분리되지 않은 전체, 누구나의 시선으로 자신의 시선을 삼은, 그야말로 20세기 우리들의 초상이다. 개인의 심사(心史)는 아직 암묵지 상태로 웅성댈 뿐이다.(월간미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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