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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조회 수 547 추천 수 0 2015.05.07 14: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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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정도로 알고 있지도 않다. 전지구인의 모든 개인들이 살아온 삶의 과정에서 이들 각각의 민족과 국가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졌었는지, 어떻게 죽음을 대면했는지, 우리는 아직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지구 위 인류의 역사, 개인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학문적 업적이 인류에게 가르쳐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 모든 학문적 업적들을 총집합하거나 꿰매도 사실 우리가 인류의 생활에 대해, 우리들의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은 파편적인 정보일 뿐이다. 결국 한정된 대상의 표면에 대한 한정된 특정관점에서의 일시적 이미지들일 뿐이다. 우리가 부분적 사실로서만 인간의 생활과 사물과 사건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데도, 학문에서 얘기하는 ‘사실’들은 그것을 대상의, 논의주제의 ‘진실’로 구성한다. 그래서 언제나 기록되지 않은, 관찰되지 않은 대상들의 소위 잉여의 삶은 해석의 배경에서 제외된다. 삶의 사실성은 삭제된다. 

아감벤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란 주제의 글에서 “하이데거 사상의 위대한 새로움은 ... 바로 그것이 단호하게 사실성에 기초하고 있다는데 근원을 둔다.”, “하이데거에 있어 존재론이란 애초부터 사실적인 삶에 대한 해석학 ... 사실적 삶의 본래적 경험의 정식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하이데거 철학과 히틀러주의와의 몇 가지 유사성과 차이점을  밝히고자 레비나스를 인용해 “... 히틀러주의 철학은 ... 영혼과 신체, 자연과 문화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응집력으로 간주되는 역사적, 물리적, 물질적 상황들의 무조건적이고 단호한 수용에 기반”하고 있고, 히틀러주의에서는 ‘사실적 삶의 경험을 일종의 생물학적 가치로 변형’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적 삶의 실제를 실제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의 정치화는 나치즘에서 인종주의의 전체주의적 강령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굳이 하이데거 철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사실적인 ‘삶의 전체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의 일반은 전체주의적 체제에 얹혀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적 삶에 대한 인지불가로 인해 ‘생활’은 전체주의적으로 작동된다. 사실적 삶은 전체주의적으로 작동되는 생활환경을 구성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삶의 사실적인 자유를 누린다는 것인데,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의 거울상일 뿐이다. 자본주의체제는 이념이기에 앞서 사실적 삶의 인간적 모습이고 그래서 가장 근원적으로 파시즘의 양상을 띤다. 정치적 미술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건설자의 윤리적 태도를 지니지만,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전체주의의 거울상을 해체하기를 멈추지 못하지만, 그럴수록 거울상에 자유주의의 유일한 주체로 남는 것은 인류성애자인 자신의 이미지이다.    


2

존 하트필드가 이미지와 텍스트의 몽타주기법으로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을 때, 몽타주기법은 구태(舊態)의 표시체계인 기존 시각언어를 대체할 새로운 창조적 시각언어체계를 만드는 방법으로 시도됐다. 실제로는 전체주의적으로 작동되고 있지만 이미지 상으로는 자유스러워 보이는 현실 이미지들을 고발하고 페기 하고자 하는 정치적 시도에서 나온 방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발생한 새로운 시각언어도 태생적으로 굳은 언어로 물화 되는 운명을 지닌다. 점차 자기문제의 바깥외연들에 대해서는 전체주의적 관계를 지니게 된다.

시각언어 이미지는 특정한 체험과 인식을 상징하고 그 언어를 대체해 생성된 또 다른 새로운 시각언어의 체계로 축적, 전이되면서 개별적, 시대적 시각언어가 담아낸 체험과 인식은 역사가 된다. 물화는 지양과정을 거친다. 역사가 된다는 것은 그럼으로써 상징언어가 현실의 재현물로 소통될 수 있는 의미론의 땅이 다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불완전한 인식과 재현이지만, 실체의 가상적 상징을 상징할 뿐이지만, 이 한계를 극복하는 미적 장치는 이미지 생산자의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문제의식의 호소력은 이미지를  강력한 발언을 담는 구축물로 살려낼 수 있지만, 구축물은 역사적 근거 없이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치적 이미지가 발언하는 문제의식의 역사가 현실의 문제지평의 복합적 지층들이 발생하는 문제적 현실지평에 맞물리면서 작가의 ‘문제의식’은 이렇게 해 비로소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데에서의 인정투쟁에서 승리한다. ‘말의 권리’를 쟁취한다.

이미지의 역사, 메타포의 문법을 구축하지 못했거나 메타포 사용의 전통을 이루지 못한 시각언어는 표현상의 비전이 없다. 사실 이미지의 태생적 기능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 하는 데에 있다. 인간은 존재(현실의 본질)와 존재자(현실의 현상)의 간극을 뛰어 넘을 수 없다. 절대자에 대한 인식상의 불능성을 보충하는 혹은 대체하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사용해왔는데, 이미지는 메타포(은유와 환유법)의 상징체를 통해 불가지의 ‘존재’(혹은 불가지의 사회적 실체)를 가리키고자 했다.

현대미술은 텍스트와 이미지 몽타주로 ‘사실적 삶’의 구태를 새로운 삶의 관계로 이끌어 내왔다. 이미지의 힘은 이미지의 내력과 은유와 환유의 문법에서 생겨난다. 이미지를 메타포로 사용해온 역사와 체계에서 물활론으로 작동된다. 미술의 참된 역사도 구축된다. 미술도 현실구속력을 지닐 수 있다. 미술사가 작가나 작품의 역사가 아니라 이미지 언어의 발생론적, 정치적 기술방법의 역사여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 미술사와 미술비평에는 작가들이 사용해왔고 사용하고 있는 언어(메타포)에 대한 인식이 없다. 작품론이거나 전시서문 등에 메타포들을 분석하는 일은 있으나 근현대미술사를 관통해온 메타포 사용방법의 계통인식도, 체계도 없다. 작품의 시대적 시각언어로서의 표현내용은 작품이 눈앞에 존재할 때만 감각상이 된다. 작가가 실제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는 역사의식이 있을 수 있으나 작업상에는 현실의 역사적 연관이 견고한 실체로 매개되어 있지 않다. 작품들은 뿔뿔이 저마다 우쭐거리며 그럼에도 또 바로 그래서 작품의 (정치적) 효과는 대동소이하다. 이러할 진데 누가 작가적 성공의 반열에 오르느냐는 작품 외적 역량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누가 봐도 공예적인 완결성을 지니거나 감각적인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의 면모를 보여주느냐의 문제로 남겨진다.      


3

실제적 삶이 복잡계를 형성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미술계의 실제 모습은 매우 협소할뿐만 아니라 표층적이다. 우리의 근현대적 삶은 지구 위 어떤 지역에서보다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해 왔지만, 미술계(미술계에 한정해보자면)는 작가들을 유혹하는 세이렌(Seiren,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의 노래 같다고나 할 만큼 치명적으로 상품물신주의적이고 반인문주의적이다. 일제 시대 이후에도 말할 것도 없지만 일단 해방 이후 오늘날의 동시대 미술계도  이 같은 상황을 넘어서 본적이 없다.

너무나 잘 아는 미술계 구조라 새삼 설명할 바도 아니지만, 그래도 거론해보면, 작가들은 미술생산의 주체들이고 미술교육기관은 작가를 배출하는 기관이다. 나머지 미술계 기관들은 기본적으로 ‘평가기관’이다. 평가자 층인 비평가와 큐레이터 나아가 미술저널리스트가 활동하는 공간이 미술관과 화랑, 미술잡지와 일간지 등 미디어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부터 미술계의 평가 작업은 알 수 없는 힘들이 작용하는 콤플렉스로 기능한다.

지극히 평면적인 피층적인 우리 미술계 구조이지만, 즉 뻔하게 드러나는 우리 미술계의 전체 양상들이지만, 그 구조의 각 부분(미술제도)에서 하는 가치화 작업(전시기획, 비평, 리뷰, 기사 등)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의 장 바깥에 있는 구성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힘들이 움직이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제도의 힘들을 움직이는 외적 계기들은 비교적 근거가 추적되기도 하나, 내부적으로 작동되는 가치평가의 이해관계는 그 맥락이, 본질이 사실상 은폐되어있다. 미술계의 그야말로 몇 안되는 지배적 평가기관들이 내리는 결정의 궁극적 이해관계가 물신처럼 유혹적으로 포장된채 흑막에 가려있다. 평가의 근거가 문화적 용어들로 채워져 있지만, 문화적 선택은 권력게임이고 자체 ‘필요’의 맥락인데, 권력게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추측만을 해볼 수 있을 뿐이고 그렇다고 정확히 기관장의 취향대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때, 어떤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의 조우가 그 안에서 일어난 것인지는 안개 속 움직임처럼 불투명하게만 그려진다.

“나쁜 머리로 고민해본다면, 한 사회가 돈에 종속되지 않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판가름날수 있는게 아닌가 싶고, 예술은 자본에게 종속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미에서 상업화랑이 아닌 공공미술관의 역할이 있는게 아닐까”(정재호)고 작가는 믿는다.

하지만 공공미술관이 보여주는 예술적 평가의 비예술적 작동은 작가의 존재근거 자체를 옥죄고 들어오는 부조리로 작용한다. 하지만 지배체제는 이러한 사실 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배워 온 교과서가 가르쳤던 순수미술개념과 미술관의 공공성 개념은 실제하는 삶 속의 공적 미술제도의 진면목 앞에서 허위의식임이 드러난다. 작가들이 이같은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이들이 매일 몸으로 체험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단순한 작품 제작자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주는 사람이다. 그것이 보들레르가 말했던 시선의 모더니티, 시선의 정치였다. 관점의 변화는 양적인 근대가 아닌 질적인 근대의 시작을 알린다. 이것이 현대미술, 모더니즘 미학의 탄생이다. 예술가는 현실의 물리적·양적 권력에 맞서 현실의 진부함을 반성하고 삶의 비범함을 복권하는 고귀한 임무를 띠게 된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현실이라는 편집된 시스템에 맞서는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술가가 존경받는다면 바로 이런 예술의 역사를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영민)

작가의 이러한 믿음은 우리 미술계 현실에 대해 무지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알고 있어서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해 볼 수밖에 없는 자기최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공간에  다른 기준으로 평가된 작가들이 들어간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는가?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공간에 들어간 작가들의 작품의 정당성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의 질에 대한 우리 미술계의 평가에도 공통의 기준이 없다. 물론 공통의 기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합리화된 각자의 작품의 변을 제외하곤, 결국 세인들의 혹은 미술계 평가그룹들의 개인적 심정 속에 느껴진 평가가 쑥덕공론으로 떠돌면서 미술계의 공공성을 연기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미술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더욱 가중시키고 그럴수록 시장은 단색화 작품들처럼 공예처럼 숱한 붓질을 덧칠하며 잘 만든 미술품을 예술적으로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게 되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우리 미술계의 예술평가행위에는 평가내용들을 중층화, 맥락화 할 수 있는 역사적 문화적 토대로서의 예술가치론이 바탕에 없다. 그림을 읽어내는 평가적 언어규칙이, 가치기준이 전혀 없다. 우리 미술사와 미술비평, 예술학과 미학과 큐레이터학에서 이 문제는 외국의 철학적 분석적 기준들이 소개되어 예를 들면, 학위논문들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 현장에서 걸러내진 경험적 통계도 종합적 판단도 없다.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통사적, 공시적 비교, 맥락화 작업도 없었고, 전시기획의 역사에 대한 비평적 접근도 부재한다. 작품의 의도와 열정의 미학적, 윤리적 태도를 삶의 문제 전체 연관에 매개해 생활과 역사, 동시대성과 작가의 예술성이 미술계를 어떻게 작동시키며 풍부하게 하는가에 대한 분석도 없다. 작가적 노력을 삶의 문제지평의 맥락 속으로 매개, 의미화하지 못하는데, 미술계에 떠도는 세계적 예술담론과 감각의 얼리 어답터를 소개하듯, 우리 미술계에서 작가와 그의 예술은 이런 공간들에서 나열되고 아티스트 톡으로 소개되고, 토론이나 세미나로 한번쯤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지속적으로 연구된 적은 없다.

연구라고는 석사학위나 박사학위 논문으로 행해지거나 소식지나 학회지, 기관의 정간물에 실리는 정도거나 수장고의 분류체계로 귀속될 뿐이다. 그것도 대개 외국의 기존 연구물들에 대한 편집과 주석과 간략한 요해와 형식적 종합으로 행해진 연구물들이다. 연구가 축적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함경아의 말처럼 “전시장에 진열된 것만 작품이 아니에요. 북한 사람이 자수를 놓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떠도는 외부의 그림과 텍스트를 어쩔 수 없이 읽고 보게 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삐라’와 비슷한 기능이 아니었을까요? 제한적이지만 공간적 거리와 이데올로기적 장벽을 뛰어 넘는 소통의 시도 자체와 그것을 둘러싼 전 과정 모두가 작품”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대한 인식의 축적과 축적 역사, 축적내용의 공공화가 비로소 진정한 정치적 실천에 이르게 되는 길이다. 그러니까 미술사 학위논문 등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작품내재 비평으로서의 작품연구 위주의 우리 미술계의 연구평가 행위는 미술의 정치적 실천을 가로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치적 현실비판에 대한 반정치적 바리케이드의 확실한 진지를 구축하는 셈이다. 결국 인류 전체의 문화사로 내려다 볼 때는 헛소동일 뿐이다. 인간활동에 대한 인식은 축적되지 않고 각자 해당 기관과 제도 주체의 경력으로 기록될 뿐이다. 


4

국립현대미술관이 하는 일의 내용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자본주의 사회건 사회주의 사회건 ‘국립’ 미술관이 국가의 시각적 정체성을 세우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역할은 그만큼 공공적이어야 하는데, 그런데도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행해지는 결정과정이 투명한 적은 없었다. 거기에 매개된 갖가지 이해관계의 유래들에 대해서는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다. 그 결과만 기억된다.

이 불투명성의 비밀마저도 ‘국립’의 아우라로, 알레고리로 당연시 되는 공간이 국립현대미술관이다. 그렇지만 사실 국립이나 리움 미술관, 아트선재센터 같은 대형 사립미술관들의 번득이는 사이비 아우라는 자본력,  물적, 인적  동원력에서 나온다. 그 기관의 문화적 능력의 질에서 나오지 않는다.

리움 미술관은 로댕갤러리 전시를 포함해 한 번도 예술적 평가로 전시를 한 적이 없다. 이 곳에서의 모든 전시는 정치적이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에서는 유명 작가들이 해야 한다는 선택이 정치적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순수미술도 인문학도 최고를 향한 감각과 지성과 테크닉을 갖춘 전사 곧 삼성문화의 용병이 된다, 이곳은 ‘예술가 문화’를 기업의 전략무기로 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다는 것은 국립 미술시장의 예술가로 영구히 재생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리움 미술관에 작품이 보존된다는 것은 문화용병의 게임전투력을 ‘공예’적으로 철저히 위상화해 보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용병의 박물관 전시품화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잃어버리게 된 것은 이곳에 참여한 작가들의 생의 공적 정당성이다.

아트선재센터는 미술관으로서의 공공성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곳에서의 전시 작가들은 대개 공공성을 주제로 한다.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표현방식과 주제를 통해 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요구를 담아냈다. 아트선재센터의 모순된 행태는 스스로를 아방가르드 진지처럼 포즈를 취하되, 전위정신은 얼리 어댑처처럼 향유하고 가신화하면서 자신의 공공성의 얼굴로 삼는데에 있다. 치밀하고 치열하기까지 한 파시스트 심미학에서처럼 ‘정치의 예술화와 예술의 정치화’를 동시에 추구한다. 그러면서 정치경제적으로 문화계를 지배하는 것을 마치 우수한 문화적 헤게모니로 미술계 정치경제권력을 지배하는 것으로, 문화적 엘리트주의로 보이게 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는 보수적이든 진보적인 입장에서든 작가연구나 작품연구가 전혀 없는 기관이다. 문화적 축적자산이 없는 기관이다. 그래도 있는 것은 수장품들 뿐이지만, 수장품 연구는 전혀 행해지지 않는다. 기관 종사자들은 전부 용병들로 기능한다. 형해(形骸)만 남은 기관인데도 물자(物資)들은 들락거린다. 그리고 무기는 해외에서의 국내외 작가평판과 국내에서의 작가평판, 작가문화에 대한 얼리 어댑터같은 촉감적 반응과 이에 관련된 고속 정보망이다. 작가 자신이 제출한 작가자료와 정보이다. 자체 전시기획의 자기정당성도 빌어온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미술문화를 대표하고 지배하고 있는 이 같은 대표적 미술관들이 이렇게  존재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그간 우리가 옳든 그르든 국정교과서 등에서 배우고 믿었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미술, 진정한 창조정신과 작가정신은 진정 존재하기라도 한 것인가, 존재 한다면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미술과 미술의 진정성은, 이들 미술관에서 전시한 작가든 아니든, 유명한 작가든 아니든, 미술이라는 아름다운 문화를 실현해보고자 한 모든 작가들과 작품들 중 어느 한 작가에게나 작품에게서만 유독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존재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이들 작가들의 한 시절 한 어느 생활의 순간, 어느 특정 작품의 한 층위에, 그리고 이들 작가들의 행위와 말과 작가들과의 연대와 관계에, 이들의 움직임 어느 계기에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흘러 들어갔다 흘러나오며 흩어지기도 하면서 존재한다. 한 순간 머물다가 사라지며 그 울음과 발자국과 영광과 연대감에 창작의 한 순간의 기쁨으로 산화되고 빠져나간다. 미술비평과 미술사는 그 출현과 상실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작가들의 ‘미적문화’는 비빌 언덕 없이 근현대성의 수수께끼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한 치 앞 길, 살 길,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길. 바로 앞에 놓인, 궂은 일 투성이고 땀흘려 살길이고 타자의 도움 없이는 살 길이 막막한 자갈 길. ...먼 길,  ...목숨 길, 피처럼 진하고 따듯하고 돌고 돌아 작은 실핏줄 길. 소리 소문 없이 뛰는 맥박 소리 나는 아주 작은 핏 길. 목숨을 싣고 목숨을 걸어야 가는 아주 작고도 분명한 그 한 치 앞 길.“(김봉준)

하지만 이 고백에서처럼 작가적 생존의 위기상태가 평생토록 지속 될 수 있는 이러한 상황은 벗어나야한다. 모든 작가들의 미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없었던 것이 되는 상황, 그 끝 모를 추락의 우울함과 분노로부터 작가적 생명이 활로를 얻을 수 있도록 길을 터나가야 한다.

(월간미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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