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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사회시스템과 미술1

조회 수 226 추천 수 0 2015.05.07 14:39:35

서용선단종복위모의.jpg서용선<단종복위모의>


최경태-겨울아침일을기다리는-사람들.jpg  최경태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활로를 얻기 위해 움직인다. ‘생활’(生活)에 나서야 나날의 일상과 자신의 생애가 보장되고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태어나자 마자 생활에 나서지는 못한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경험해야한다. 경험을 위해 배워야한다. 초기 인류라면 생활을 위해 무작정 걸으면서 보고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역사 시대 접어들면서는 생활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배워야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체계(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가 경험하고 그가 조우하는 생활환경도 조직적으로 작동하는 체계(시스템)이다. 일생의 시스템은 하루 24시간의 생활주기가 반복되어 개인에게 허용된 개인사를 구성한다. ‘일생’은 각자의 생명의 길이만큼 시간적으로 다른 연속체이지만, 24시간이라는 나날의 단위 시스템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이 생활을 구(求)하기 위해서는 격랑 위에 걸친 각자 앞의 생(生)의 외나무다리 위를 그냥 조심스레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일생이라는 개인사의 한계에는 숱한 타율적 상황들이 매개되고  작동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들 외에도 자의와 자유에 의한 기제들도 있다. 모든 인간은 어디에 걸려있는지 모르게(형이상학, 이념, 전통, 공상 등) 머리 위, 하늘 위로부터 내려오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남의 죽은 목숨이라도 이어받아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고자 한다. 통틀어 ‘가치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동아줄, 거기에는 온갖 인간적인 감정의 숲, 이념의 깃발, 관념의 늪, 이런저런 관념들과 비전의 관계에 대한 비교우위 계산, 질시와 환멸 , ‘보다 많은 양’과 ‘보다 나은 질’, 그리고 양과 질의 교환능력과 교환의 본질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인정투쟁이 묻어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은 늘 불투명한데도, 생의 활로를 보다 더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도 덩달아 작동한다. 마음의 시스템이 특히 더 발달된 개별자들은 ‘진보’나 ‘번영’을 쫓아 생의 활로를 찾는다는 개인 생의 프로젝트를 완성하기를, 동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개별자의 생활에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은 전부 다르게 나타난다. 

개별자들마다 자기만의 특이점으로 굳은 자기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개인을 둘러싼 시스템들과 시스템들 간의 비적응성은 개인에겐 전적인 타자성이다. 개인이 가장 날카롭게 타자성과 동거하는 나날의 알레고리이자 그 나날의 일생을 공유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개별자들의 사실상의 우상의 동굴이다.

우리가 살고 움직이는 실제계, 생활세계는 직접 지각할 수는 없지만 생활현장의 모든 장면들, 상황들에 의미의 힘으로 작용하는 필연과 우연의  시스템들이다.

이것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서 헤엄칠 때 작용하는 저항, 힘들과 같다, 여기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의 힘, 곧 바다에 던져지게 됐을 때까지의,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내 몸이 기억하는 숱한 나날들의 방향이 중요하다. 기억(역사적 정체성)과 정서상태의 길항작용의 결과는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될 수도 있고, 앞으로 나갈 의지를 포기하게 하는 물귀신 처럼 작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바닷물의 온도와 파도의 세기와 방향 등 이 모든 조건들이 이루는 힘의 시스템은 내가 헤엄쳐 나아가야 할 곳의 저항의 시스템인 것이고, 이에 처해서의 나의 상태들이 나의 여력의 시스템으로 작동된다.


2

현실을 재현하고자 하거나 세계의 특정 모순이나 갈등에 대해 개입하고자 할 때, 작가가 주목하는 ‘특정 리얼리티’는 모든 시스템들이 그곳에 매개되어 있는, 작가가 보는 하나의 특이 지점들이다. 동시에 이를 바라보는 작가능력 곧 작가의 시선도 하나의 시스템 방향에 의해 설정된 장치와도 같다. 그런데 작가의 이 능력은 사실 타인들 뿐만 아니라 작가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있는 은폐되어 있는 리얼리티의 것이다. 작가자신도 자신의 전체능력소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각하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저절로 창작 중에 개인의 역능이 다 발휘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문화적 표상 시스템들을 작가가 접하게 되는 ‘과정’도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특정 시스템인 정보의 유통과정이라는 시스템에 따른다.

어찌됐건 작가가 생활하는 환경과 작가자신이 지닌 성향과 능력의 시스템, 작가의 정보접촉의 과정 시스템, 이 모두가 어떤 각도에서 어떤 강도와 정도로 작가의 작업과정에 매개되는가는 작가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더군다나 상당한 경우 작가 자신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상 작가 외부의 시스템의 동력 자체는 인간에게는 여전히 불투명한 존재이며, 작가가 사용하는 숱한 이론과 관념과 상징체계도 그 인식론적 존재론적 소여 자체는 인간 능력의 본원적 ‘염려’(care)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 모든 시스템들 간의 혹은 이러한 시스템들의 작가에 대한 영향에 내재한 진실치의 면면은 여전히 불가지 상태이다.

그래서 작가적 역능과 불능의 어처구니 없는 숱한 교합은 발생된다. 이 교합의 정체는 복잡한 계산(비평)을 거쳐서도 침투되지 못할 범주의 것이지만, 작가론과 작품론 뒤로, 부정교합의 사이에 놓인 비진리의, 실제와 실제상의 간극은, 어처구니 없음은 소실된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이라는 복잡계(시스템)에서 작가의 캐릭터(개별성 시스템의 역능)가 공중에 떠다니는 표상체계를 건져 올리면서 제작한 미술작품은 이가 맞지 않는 돌쩌귀로 세운 건축물과도 같다. 작가들의 사회정치적 개입과 참여의 그 지난한 세월과 경험 역사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의 작업만으로는 현실의 진면목, 그 총체상은 전모가 밝혀진 적이 없다. 작가들은 현실을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작가들의 정치적 발언이 더욱 풍부해진 오늘날의 우리 미술계는, 작가들의 작업에서의 사회적 발언은 결과적으로는 그만큼 더 공허해지고 있다. ‘사회적 발언’이라는 허위의식의 가중된 방향을 시스템으로 만들고 굴려가고 있다. 사회를 일정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미술적 실천들은 오히려 세인들의 판단장애를 일으킨다. 일부 세인들은 세계가 혹여 이들이 원하는 것처럼 바뀌고 있는 중인 것처럼 불안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술계 내부 사정으로만 본다면 이들의 작품은 잘해야 우둔한 미술사에 등재되는 것으로 존속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은 미술에서는 특히 작가의 사회적 발언, 미술의 정치적 효과는 작가의 작품이 아닌, 작가가 실제 자신의 작가적 생활을 이끌어내는 작가적 태도에서부터 생겨난다. 작가로 살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방식의 선택과 이러한 선택으로 일관된 일생이 그가 사회에 하고자 하는 발언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보다 행복한 공동체의 삶을 위한 진정한 정치적 힘이 될 수 있게 한다. 그가 헤쳐나간 모순과 부조리, 희생과 인내의 생활은, 생활 속에서 인식의 간극을 넘어 가는 것이기에 투명해지고, 그의 투명한 목적은 그의 수단인 그의 작품이 미술계에서 만이 아니라 일반 세인들에게도 수용되는 언어가 되게 한다. 특히 미술이 현실에 개입하려 할 때, 작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작가의 사회적 발언내용과 작품 자체를 독자적인 언어로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승인의 힘으로 작용한다. 


3

고전주의 문예비평가 레싱(G. G. Lessing 1729-1781)은 <라오콘_시와 회화의 한계에 대하여>(1766)에서 조형예술을 병렬적 예술 곧 공간예술로 규정한다. 레씽은 공간예술을 시간의 한 순간을 포착해 대상을 묘사해야하는 표현적 한계를 지닌 예술이라고 분석했다. 시간예술인 문학장르는 진실을 포착하는데 유용해서 생활의 진정성을 보여주면서 예술적 감동을 준다면, 조형예술은 작품상의 미(美, 레싱에게는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가, 아름다움의 표현이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형예술의 근본적 한계라고 레씽이 규정한 ‘순간 포착의 조형적 구현’이 지닌 표현상의 한계는 알다시피 현대미술개념에 이르러서는 일정하게 극복되어 왔다. 비디오아트 등 현대미술에 이르러 사용하게 된 새로운 미디어들은 미술을 탈장르적이거나 장르복합적인 또는 총체적 예술로 발전시킬수 있는 방법들로, 미술 개념의 새로운 발전도 담보해왔다.

근, 현대미술은 조형예술적 미술의 한계 너머 다른 예술장르(문학, 영화, 음악, 퍼포먼스, 디자인 등)를 자신의 표현방식으로도 수용하고, 이제는 타 예술장르의 특성과 한계를 작품내의 내용과 형식으로 큐레이팅하는 예술작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술에서도 문학에서와 같은 시간적 연속성을 담을 수 있게 됐지만, 레씽이 언급한 공간예술인 미술의 한계는 여전히 미술의 가장 뚜렷한 범주적 특성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면 우선은 비디오아트에서의 시간성도 일정하게는 문학의 시간성과 다른데, 영화와 문학의 시간성 차이만큼 혹은 마치 연극무대에서의 시간성 표현방식에서처럼, 비디오는 특정 장소와 장면의 연속적 편집이나 발췌를 통해서만이, 시간 속 장면 이미지들을 비디오 필름에 투영해서야 작품이 생성된다는 점에서이다.

더욱이 문학작품은 비가시적인 내용과 형식(가상)에서 형상화되는 것으로 작품에서는 모든 시간대의 묘사가 가능하고 독자는 비록 가시적인 문자를 통해서이지만, 작품은 감상자의 상상력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무엇인가 사물을, 말과 의미를, 진실을, 혹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아무 것도 없음을 실제상으로 ‘디스플레이’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다, 이 일이 누군가의 ‘세계’에 대한 ‘발언’, ‘표현’ 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 실현됐다면, ‘디스플레이’ 행위 자체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언술적 큐레이팅 행위, 곧 미술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레씽이 말하는 그리스 조각 같은 조형예술에서의 순간 포착보다는 시간이 조금 연장 된 것이긴 하지만, 미술은 여전히 실제상으로 존재하는 ‘순간 포착’의 예술일 수 밖에 없다.

문학도 이런 표현의지의 ‘디스플레이 행위’이지만, 차이는 미술상의 표현의지 곧 ‘디스플레이’ 행위는 실제 생활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전시공간 뿐만 아니라 일반 생활공간에서도 예술적 목적의 디스플레이 행위는 가능한데, 어떤 공간에서 벌어지든 미술은 공간 속에서 ‘공간의 규정된 시스템’을 전도(顚倒)하는 것으로 ‘공간에 존재하는 예술’이고 그래서 스스로 동시에 공간적 한계를 지니게 되는 예술로 여전히 남은 것이다.   

작가들이 장르적 한계에서 탈피하고자 해온 시도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 배경은 근대화 이후 점점 더 복잡계의 시스템들로 중층화되어온 사회생활의 과정에 연결된다.

근대사회는 사회시스템과 사회시스템들의 전지구적 영향관계의 복잡성을 특징으로 한다. 근대 사회가 일정하게 진행되면서 작가들의 작업방향은 크게 3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우선으로는 근대화 이전부터 서구미술의 주요기능은 이념의 표현 혹은 달리 말해 사회의 중심가치(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를 시각화하는 일이었고, 특정 진리가 중심가치가 되도록 시각화는 작업은, 근대 이전에서처럼 기득권의 중심가치는 아니지만, 공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사회적 발언을 중요시하는 미술가들의 비판적 작업들로 이어지고 있다.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이든 체제옹호적 기념화이든 사회의 공공영역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충동은 작가들에게는 가장 대표적인 미술의 흐름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인상주의 태동 전후한 시기 오히려 작가들은 비로서 뚜렷하게 자각을 갖고 미술을 통해 순수하게 자연을 재현하고 자연을 통해 낭만주의에서처럼 자신의 내면적 비전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표현하게 된다. 이런 경향의 작가들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감정과 세계관의 이입을 얻는다. 사회에서 보다는 자연에서 이념을 얻고자 하는 미술도 발전시켜왔다.

정물화 뿐만 아니라 풍경화의 발전 이면에는 미술작품에 대한 ‘사적 소유’와 작가와 작품 구매자의 ‘사적 표현’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현실’이라는 복합계에 대한 정치적 시각상을 얻고자 하는 작업과는 달리 풍경화와 정물화에서는 ‘현실’이라는 복합계 네트워크 시스템에 대한 정보와 시각언어의 상징체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풍경과 정물을 단순한 재현 대상 이상의 새로운 상징체계로 표현하고자 하면 복합계 시스템 언어상의 대상접근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작가는 풍경화와 정물화에 작가 눈에 비추이는 것과 그 안에 작가자신의 상태에 깃든 정조(情調)를 주관적으로 표현해 넣은 것으로 미적 충만감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의 풍경화와 정물화에도 표현충동과 표현방식은  현대사회 진입기의 풍경화와 정물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정물이나 풍경은 지금도 근대미술 다운 화풍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미술가들이 취한 또다른 방향은 미술이 미술자체에 대해 말하는 데에 대한 관심에 놓여있다. 현대사회의 복잡계가 외연을 넓히고 심연의 실체를 은폐할수록 일부 작가들은 자연도 사회도 인간도 아닌, 자신의 순수 개인적 행위이자 동시에 사회적 행위이기도 한 ‘미술’이라는 생활에서의 어떤 실제계 내에서만 고민하는, 그러면서 거기서만 ‘인간과 미술’, ‘자연과 미술’의 관계를 고민하는, 결국 인간과 자연과 미술 모두를 미술 속에서만 고민하는 ‘태도’를 ‘윤리계‘로 끌어들인다. ’미술적 행위’만으로 실재를 표상하며 그 행위의 의미를 ‘시스템’화 한다. 결국 자신이 왜 미술을 해야 하는지, 하는 것인지에 대한 내적 필연성의 답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자연이 좋아 ‘그리는’ 사람, 주변 일상의 사소한 사물들과 분위기가 좋아 ‘그리는’ 사람에게 미술은 일정한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방식이다. 한편 사회적 이념을 담아내고자 하는 미술가에게 자신의 미술행위는 늘 강력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찾는 미술가에게 미술은 본질적으로 공허함이다. 자신의 생활을 살리지 못하는 하찮은 행위라는 인식이 뿌리에 있다. 다양한 복잡계로 둘러싸인 거대한 사회조작의 번화함에 다가가지 못하는 ‘미술’을 생활의 도구로 삼고 있기에 공허하게 느껴진 것이고, 그렇지만 아니 바로 그래서 ‘미술’의 의미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이들 작가들에게는 그나마 의미있는 위로가 된다.

이러한 미술작품이 동시대성을 획득한 절정은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가 지속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의 작가들 모두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발언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을 때였다. 사회주의체제에서만 예술에 대한 통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체제에서도 예술가에 대한 통제는 동일하게 작동했다. 미술의 미술에 대한 고민은 이럴 때 더욱 커졌고 그러자 자유로운 예술가의 창조로 사회적으로도 크게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북한에 공훈미술가가 있듯 남한에도 이들 공훈미술가들이 남한미술을 대표하게 됐다.   

풍경이나 정물을 그린 작품과 ‘미술에 대한 미술’ 작품이 아닌 나머지 작업들은 사회적 리얼리티에 개입하는 (정치적) 미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이 사회적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모든 방식들은 전부 ‘몽타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미디어를 사용하든, 탈장르적이고 미디어 복합적이든 평면화이든, 현실의 리얼리티를 확인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 복합체의 시스템과 그 네트워크의 특정 양상, 내적 채널, 구조와 접힌 면들을 열어보이고 뚫고 들어가며 해석한 것, 말 던지기, 말걸기의 정치적 언술이자 비판들이다.

풍경화나 정물화나 회화성 자체에 대한 작업과는 달리, 이러한 정치적 작업의 의도는 결국 부분을 통해 전체 시스템을 들추어 내보이고 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전체를 전체로 그 온전한 복합체 시스템에서 들추어내는 것은 앞서 언급한 미술의 한계로 인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몽타주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향에서의 작업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의도는 침몰한 배의 선체 파편을 통해 배의 침몰 원인을 찾는 일과 비슷하지만, 발견된 원인에 대한 설명(작품내용)은 발견된 사실에 대한 보고와 관련된 기록들, 증거물들을 시각적으로 압축해서 구성하고 배치하면서 실현된다. 이때의 보고와 기록 텍스트들은 르포르타주 문학의 기능을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술에서 텍스트는 문학 작품이 문학으로 소통되는 방식과는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문학은 대중이 원하면, 비록 비가시적 가상의 시간예술이지만 그럼에도 구체적인 피부 접촉이든 작품과의 생활적 대면이든 실제상으로 작품과의 만남(吟味)이 수시로 가능한 예술이다. 하지만 미술은 실제 생활상 공간에 펼쳐지고 작품자체도 공간예술로 현대미술에 들어서도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못 벗어난다고는 했지만, 그리고 현대미술은 일정 정도로는 시간예술의 특성도 갖추게 됐다고는 했지만, 미술은 특정 시간적, 공간적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볼 수 있고, 더구나 작품과 실체 피부로 접촉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기시하는 예술이다.

여하한의 미술이라도 예외적인 몇 경우를 제외하곤, 작품을 전시할 때나 작품을 볼 수 있고, 그것도 유일한 한 공간에서만 볼 수 있다. 동일한 미술 작품 한 점이 동시에 두 공간에서 선보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음미는 문학 같은 가상의 예술도 아닌데 가상(이미지)으로만 가능하다. 작품이 소장되기라도 하면 대중이 더 이상 작품을 직접 마주할 공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미술이 평면회화나 조각으로서는 사진으로나마 비교적 실제에 가깝게 대중에게 이미지가 전달 될 수 있지만, 비디오 아트와 복합매체를 사용한 설치나 퍼포먼스등의 작품들은 더욱더 표피적으로만 이미지가 되어 떠돈다.

비디오아트등 영상작품도 복제예술로서의 특징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이 영상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회화나 조각작품 볼 수 있을 기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의 복잡계를 몽타주로 드러내는 탈장르적 복합매체의 (정치적) 미술은 그래서 어떤 미술 작품 보다 더 추상적이고 비밀스럽게 존재하게 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작가론과 작품론으로만, 다시말해 작가의 정치적 의도와는 별도로 미술계내의 ‘순수예술작품’으로만 ‘순수미술의 형식’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사족, 작품의 형식을 보증하는 종복으로만 기능한다. 복합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정치적 시선 자체가 복합적 현실의 ‘간지’(奸智)로 복합계 시스템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장식하는 상징자본이 된다. (월간미술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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