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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익숙한 것들을 뒤로 하고, 다시금 사유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게시판에서 나는 ‘독일’ 이야기를 하게 될 테지만, ‘독일’을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사회민주주의의 낙원도, 경제강국이라는 유토피아도, 그리고 ‘선진국의 문물을 배우고 전하는 유학생’도 이 공간엔 없다. 대신 (독일)사회의 ‘반대편’에 놓인 잡다한 것들을 다루는 사전, 기사, 보고서 등의 인용문들이 이 공간을 채우게 될 것이다. 사회의 풍경은 이 반사회적인 - 각각 asozial, unsozial, kontrasozial에 해당하는 - 것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베를린 유학생.

이 글은 지난 5월 27일 <피렌체의 식탁>을 통해 축약해서 공개한 의 원래 버전입니다. 

최근 나는 <피렌체의 식탁>으로부터 코로나와 유럽사회에 대한 또 하나의 기사를 청탁받고 관련 기사들을정리할 겸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있었다. 보통은 따로 코멘트를 달지 않기 때문에 마치 자료실처럼 기사가 쌓이고 있었는데 5월 초에 공유한 칼럼 <How Germany Is A COVID Failure> 에 뒤늦게 인류학 전공자인 독일인 친구 M이 상당히 분개한 어조로 댓글을 달았다. 원 기사는 스리랑카의 언론인 Indi Samarajiva이 영어로 쓴 칼럼으로 이 거친 논조의 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서구 언론은 독일의 코로나 대응을 가장 주요한 성공사례로 꼽고 있다.
  • 그런데 기사를 쓸 당시 독일의 사망자 숫자는 5,500명으로 이란보다도 많으며, 반면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베트남은 사망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의 대응은 무슨 신비한 아시아 전통문화에 기반한 게 아니라 그냥 방역의 과학적 스탠다드에 기초했을 뿐이다. 왜 베트남의 방역은 성공사례가 아닌가?
  • 이들 아시아 국가들의 사례를 다루지 않는 이유는 서구사회의 구조적인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 때문이다. 한국은 종종 ‘독일과 더불어’ 성공사례로 다뤄지는데 (기사 작성 당시) 240명이 사망한 한국하고 5,500명이 사망한 독일을 같은 성공사례랍시고 묶는 게 말이 되는가?
  • 독일의 대응도 실패 사례일 뿐이다. 메르켈 정부가 한국 정부였다면 벌써 정권이 뒤집혔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 미디어는 뉴질랜드의 총리 자신다 아던이나, 앙겔라 메르켈을 백인 영웅 (white heroes)로 만들고 있다. 

이 기사에서 시작해서, 밤 늦게까지 우리는 코로나, 감시사회, 아시아 문화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점에서 부딪히면서 논쟁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렇게 쌓인 댓글을 보다가 나는 이 대화가 오늘날 코로나 사태가 드러낸 새로운 세계상을 둘러싼 유럽인들의 고민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원래 청탁받았던 글 대신 이 대화를 조금 더 가공해서 대화체의 에세이로 쓰는 것이 오히려 이 글을 읽을 한국인 독자들에게 좀 더 친숙한 방식으로 많은 것들을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해서 조금은 산만한 이 대화의 일부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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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teve Webel on Flickr


M: 아주 이상한 논조네. 난 그럼 이 ‘구조적 인종주의’를 몇 개 더 던져주지. 이란의 숫자는 확실히 훼이크야. 사망자 숫자는 훨씬 더 많다고 알려져 있어. 그리고 서구 미디어는 적어도 한국에 관한 한 확실히 찬사를 보내지 않았나? 특히 검사와 추적에 있어서 세계 최고였다고. 구글에 “‪Südkorea Corona Strategien” 넣기만 해도 기사들을 쏟아져 나와. <‬Maßnahmen gegen Corona: Südkorea als Vorbild?>, <Südkoreas erfolgreiche Corona-Strategie: Ein Land wird getestet>, <Innenministerium dringt auf Strategiewechsel – massiv mehr Tests>, <Coronavirus: Was Südkorea anders macht‬>이런 기사들을 봐봐. 아무도 그걸 부인하지 않아. 아닌 기사 있음 함 찾아서 보여줘봐. 하지만 그 방식은 많은 이들의 사생활 개인정보를 완전히 희생한 결과잖아? 이번에 이태원의 게이골목 사례를 함 봐봐. 

기사대로면 서구사회가 해야 할 계몽된 탈식민주의적 코로나 대응이란 건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아시아인들의 “우월한” 집단주의 마인드를 수용하는 건가? 성공적 대응의 지표는 단지 사망자 숫자보다 더 다양할 수 있어. 오직 숫자만 따져보면야 한국, 대만 등이 분명 최고의 성과를 거뒀겠지. ‪‬‬
물론 대다수 언론들은 동아시아 각국의 대응의 안좋은 면들도 같이 다루고 있어. 하지만 이건 비판적 언론이 전체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선 원래 해야 하는 일이야. Indi Samarajiva는 그걸 전혀 인정하지 않고 “인종주의적 백인들은 오직 그들의 위대함만을 볼 수 있고 다른 인종들의 성과를 수용하는데 무능력하다“는 식으로 서구 언론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있어. 나는 이런 식의 “비판적 백인연구” 담론들이 지긋지긋하다. 물론 백인 우월주의 마인드가 분명 존재하지만 이런 식으로 탈식민주의 이론이 신-본질주의로 가는 건 세계의 복잡함을 전혀 무시하는 거 아니야?‬

김강: 아마 몇몇 지점에선 너한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사는 너무 거칠고, 필자가 비서구 국가들을 묶는 카테고리는 여전히 매우 자의적이야. 하지만 몇가지 들을만한 주장 때문에 나는 이 글을 공유했어. ‬
1. 저자는 여기서 어떤 “우월한” 동양 문화나 아시아적 문명에 대해 (네가 말한 “공동체/집단주의” 같은 것?) 언급하지 않고 있어. 사실 그건 그저 오리엔탈리즘의 한 요소지. 대신에 저자는 비서구 국가들의 코로나 대응이 그저 “서구(과학)의 복사물”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건 문화적이거나 문명적인 차이가 아닌 거지. 의학이나 행정, 거버넌스 같은 근대의 지식과 학문들은 기본적으로 어디서나 “서구적”인 것이야. ‬
2. 네가 잘 말한 것처럼 서구 언론은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선 충분히, 혹은 너무 많이 다루고 있어. 특히 대만이나 한국이 그렇지 (물론 많은 기사들을 보면 문화 본질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 적 시선이 많이 보이긴 해.). 하지만 난 여전히 이 한국, 대만 홍콩 등에 대한 칭찬과 비슷하게 방역에 성공하고 있는 베트남이나 태국 등을 무시하는데서 유럽중심주의를 의심하고 있어. ‬
여기서 작동하고 있는 건 비서구 국가들 간의 ’서구화’ 혹은 ‘자유주의화’ 정도의 차이 같아. 한국이나 대만을 언론이 선택하는데선 한편으론 ‘중국 혐오’가 읽혀. 서구언론들은 이 서구적 가치의 우등생들하고 사악한 권위주의적 적을 비교하고 있는거지. “Team Democracy” vs “Team Dictatorship”이랄까? 다른 한편으론 언제나 가난하고, 미발전되었고…하는 식으로나 서구 미디어에 나오는 베트남 같은 나라들에 방역사례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있지. 몇몇은 유럽 국가들은 물론 한국보다도 더 성공적으로 전염병을 막고 있는데도 말야. ‬

‪사실 서구사회를 그들의 유럽중심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건 되게 어려운 일이야. 왜냐하면 그건 ‘근대화’ 그 자체의 요소니까. (물론 ‘동양사회’를 유럽중심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도 어려워. 아시아 문화의 우월성 같은 걸 주장하는 다양한 근대적 형태의  아시아 민족주의들은 사실 유럽중심주의적 구조를 뒤집어 놓은 거울상 같은 거지.) 맞아. 비판적 백인성 연구 같은 거의 언어는 종종 별로 도움이 안 되고 모든 것들을 “백인성”에다 돌리곤 하지.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적 본질주의를 웃기게 미러링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하지만 나는 이 기사가 100% 이런 노선을 취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

M: 저 기사의 가장 큰 문제는 서구사회가 구조적 인종주의 때문에 아시아로부터 배울 마음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이야. “아시아 각국은 서구적 제도와 사유들을 수용하고 복제하면서 발전해왔다. 만약 서구가 너무나 자만한 나머지 아시아로부터 이제 다시 배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저 죽어갈 것이다.” 이건 무슨 헛소리야? 서구 과학자들이나 (특히 메르켈 처럼 전문가 말을 새겨듣는) 정부는 의심할 바 없이 다른 나라에서, 특히 남한에서 많은 것들을 잘 배우고 있어. 마스크의 효과나 접촉자 추적 같은 것 말야. ‬‬
하지만 “서구사회”는 “한국방역 패키지” 전체를 수용하진 않으려고 하지. 왜냐하면 그것은 곧 감시 국가를 말하니까. 한국식 방식의 추적방식은 서구에 그대로 복제 될 수가 없어. 왜냐면 핸드폰 GPS 데이터나 신용카드거래, 약구입 기록, CCTV 영상등을 감시하는 건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적, 자유지상주의적 가치들과 맞지 않으니까. ‬
여기서 나는 어떤 구조적인 인종주의도 못 찾겠는데? 저자는 서구 각국도 아시아 각국의 감시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고, 그게 아니면 구조적 인종주의라는 식인데 미안하지만 이건 믿을 수 없이 멍청한 주장이야. ‬
간섭받지 않는 자유(liberty)의 가치란 서양에선 때로 수천명의 죽음이나 경제적 손실보다도 더 중요하게 취급되곤 해. 이 저자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위기를 이유로 자유를 잃어버리면 위기가 지나가도 그게 결코 돌아오지 않아. 우리는 그걸 2차 대전 같은 걸 통해 경험한 바 있어. 그리고 CCC와 같은 시민단체들은 계속 그걸 지적하고 있어. <Corona-Tracing-App: Offener Brief an Bundeskanzleramt und Gesundheitsminister>


김강: M, 나는 “구조적 인종주의”같은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야. (왜냐면 실제 관계[Sachverhalt]란 인종주의같은 개념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팀 서구가치” vs “팀 감시사회”같은 도식은 분명히 애용되고 있어. 나는 이게 서구사회와 비서구 사회 사이에 있는 실제 갈등이나 차이들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해. 너는 대체 이 감시 테크놀로지들이나 근대 행정학이나 통치성 같은 것이 애초에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해? 

나는 꼭 서구 국가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심지어 한국)으로부터 배워야만 한다고, 혹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자유주의적 서구와 권위주의적 비서구라는 분석범주는 저자의 주장보다도 더 문제적이야. 오늘날 “자유주의적 사회들”과 “권위주의적 사회들” 사이의 구분선은 서구의 리버럴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모호해. 이미 푸코가 그의 (자유주의적) 통치성이나 생명권력 개념을 가지고 잘 분석한 바 있잖아? 

나는 저자와 똑같은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니야.  당연히 우리가 전체주의적 감시에 기반하지 않은 대책들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 내가 진짜 문제라고 보고 있는 게 뭔지 알아? 지금 서구 각국의 정부들은 말은 ‘서구적 근본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상 (중국 것은 아무튼 간에 아닌 한국 방식의) 감시대책들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에 more or less 굴복하고 있다는 거야. 왜냐하면 사실은 이런 감시 기술들이나 권위주의가 결코 서구적 근대성에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내가 무엇인가를 “인종주의적”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바로 서구인들의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것, 그리고 감시기술 등을 “아시아적 문화”라고 타자화하고 유럽을 마치 완전히 리버럴한 곳인 냥 재현하는 그 점에 있겠지. 
 
내가 이 글을 공유한 건 저자의 주장 때문이 아니라 이 글 안의, 그리고 이 글에 대한 (아마도) 백인 독자들의 반응들에 있는 몇몇 흥미로운 지점들 때문이었어. 너는 내 지난번 Merkur 기고글을 발표 전에 먼저 봤었잖아? 그건 한국식 경찰국가 해법에 대한 비판적인 에세이었지. 동시에 서구 사회의 스스로를 성숙하고, 자유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에 대한 사르카즘이기도 했고. <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 


M: 당연히 감시체제는 아시아의 발명품이 아니지! 하지만 감시의 테크놀로지들을 아시아적이라고 타자화하는 것은 분명 어떤 실제로 존재하는 - 그래 나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싶다면 ‘본질적인’이라고 하자 - 사생활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가 중국같은 나라나 독일같은 나라 사이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너는 이 차이가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고, 이 점은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네. ‘본질주의’를 부정한다 해도, 문화적 차이가 쉽게 그런 ‘구성주의’에 로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라구.

이 지점에서 넌 아마도 그럼 뭐가 문화적 단일체냐고 묻고 싶을테지? 물론 거기에 분명한 경계는 없어. 하지만 분명 차이들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야. 사생활을 둘러싼 이 문화적 차이는 판데믹 대처와 같이 “전체 공동체의 이득”을 명분으로 한 전면감시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디지털 결제 시스템 같은 기술에서도 볼 수 있어. 중국인들 다수가 사생활에 대한 일말의 고려 없이 이런 기술들을 받아들이지만 사생활에 환장한 독일인들은 도통 현금 거래를 포기하려 하지 않지. 마치 현금이 “인쇄된 자유”인냥 말이야. 이런 개념들은 중국이나 (아마도) 한국에서는 결코 독일에서와 같은 무게를 갖고 있지 않을 거야. 

‪이런 개념은 궁극적으로 서구의 사유 전통에 있는 개인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너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적 선에 대한 문화 간의 이 상이한 가치평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거야? 물론 이건 양단간의 문제는 아니고 두 극 사이의 어느 지점에 관한 것이겠지만 말이야. 집단문화는 당연히 서구에도 있고, 개인주의는 당연히 동양에도 있겠지. 하지만 분명 강조점에 있어서 대조적이라 할 수 있지 않아? ‬‬
그리고 지금 누구도 전면감시가 아시아적 형태의 거버넌스라거나, 아시아의 발명품이라고 말하지 않아! 나는 스노든의 폭로를 기억하고 있고, 또 전체주의 동독의 감시사회도 기억하고 있어. 또 근대 통치기술로서 통계학의 원천도 알고 있어. 전면감시는 집단주의적 형태의 거버넌스지. 하지만 아시아 문화가 오늘날 조금 더  집단주의적이라 더 친화적으로 감시 정책들을 받아들였다는거고. 지금 중국 등의 아시아 국가들은 집단적 선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조금 무르라고 설교를 하고 있어. 그리고 저 기사의 저자는 바로 이 노선을 서구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고. 나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우리가 그 개인의 자유라는 제단에다가 수많은 코로나 희생자들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야. 그만큼 중요하다고.  ‬
‪베트남 사례 역시 집단주의 이슈지. 거기선 사람들이 규칙을 따른다고! 그들은 국가 전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개인들의 필요를 희생시켜. 그리고 선의가 한계에 다다를 정도면 군사적인 제재가 전체의 안녕을 지키지. 물론 서구 기독교적인 “이웃사랑” 역시도 집단/공동체 문화의 한 형태일 거야. 이웃의 안녕을 깊이 생각하는 것. 미국에서 총들고 데모하는 사람들이나 독일에서 광장에서 모여서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건 감시 기술이나 경찰 국가를 다시 수입하는 게 아니야. 독일인들은 그걸 이미 해 봤고, 다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아. 베트남은 한편으론 발 빠르게 격리조치를 시행했고, 또 한편으론 전체 주민들에게 방역에 관한 훌륭한 캠페인을 했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짜뉴스”를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언론 검열을 심화하기도 했어. ‬‬
‪그리고 너는 대체 서구가 그래서 아시아의 전략에서 마스크쓰기 문화나 효율적 테스트 외에 무엇을 더 배워야 한다는 건지 대답해야 할 거야. 그게 기술을 이용한 전면감시가 아니라면. 뭐 군사적 억압이라도 배워야 하나?‬‬

솔직히 "Team Democracy vs. Team Dictatorship" 구도가 과연 그렇게 틀린 건가? 베트남은 분명 이 Team Dictatiorship에서 탑플레이어겠지. <Vietnam’s Coronavirus Success Is Built on Repression>그리고 인도의 극우 대통령 모디의 잔인한 록다운 정책 역시 같은 방향일거야. “아시아적 방식”에 대해 더 많이 읽으면 읽을 수록 내가 확인하는 건 이 성공적인 대책 안에 들어 있는 권위적인 본성이야. 물론 너나 나나 그런 걸 바라는 거 아닐 테고, 너나 나나 그게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 인도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판데믹에 대한 세계 각국의 대처는 한가지를 분명히 해 줬어. 집단주의적인 혹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권위주의적인 정책이 분명 방역에선 효과적이었다는 거야. 하지만 우리는 분명 윤리적 질문도 던져 봐야지. 서구가 과연 스스로도 이미 재앙적으로 경험한 바 있었던 이 권위주의적 리더쉽을 지금 수용해야만 할까? 


김강: 나는 서구가 아시아 국가들의 그런 정책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 그 질문엔 대답할 필요가 없겠지. 내가 이야기한 건 서구 각국의 정부들이 이미 이 “아시아의” 감시 정책들을 수용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바로 오늘날 서구 근대성이 보여주는 딜레마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서구 근대성 안에 있는 “역학疫學적 합리성”(‪epidemiological rationality)이 마찬가지로 서구적인 “자유주의적 정치적 합리성”(liberal political rationality)을 향해 방역에 효율적인 감시 수단들을 실행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지. 방역의 테크놀로지란 결코 외래적인 게 아니야. 푸코가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페스트 방역이나 천연두 방역의 모델을 통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애초부터 서구 자유주의 근대성의 핵심에 있는 거지. 동시에 유럽인들의 자기정체성인 “서구적 가치들”과 길항관계에 있는 것이고. ‬

그리고 솔직히 신용결제나 디지탈 결제와 ‘가치관’을 직접 연결시키는 네 이야기는 내가 보기엔 완전히 자의적인데, 유럽에서 가장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나라가 어디야? 스웨덴이잖아. ‘현금없는 시장’은 바로 어느나라보다도 스웨덴이 앞서 있는 정책이었다고. 사생활만 자유주의 가치인가? 한국식 감시체제를 정당화하는 “투명성”이라는 구호도 권위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자유주의적인 가치에 가깝다고!

그래서 내가 계속해서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를 “팀 자유주의 대 팀 권위주의”로 나누는 도식이 그저 밖으로 드러난 현상형태들만을 다루는 왜곡된 현실이라고, 그리고 얼마간 유럽중심적이고 인종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거야. 


M: “팀 자유주의 대 팀 권위주의” 이야기 말인데, 그래 전면 감시 정책이나 테크놀로지는 아까도 말했지만 서구사회에 있었고, 지금도 있어. 어디에도 완전한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너는 왜 그렇다면 홍콩 사람들한테 이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물어보지 않니? 거기선 “언론의 자유를 갖거나 그렇지 않거나”, “헌법에 따른 사법적 시스템을 갖거나 정치활동가들이 그냥 사라지거나”의 문제라고. 난 솔직히 니가 이런 현실들을 그저 유럽중심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기만 정도로 치부하는 게 충격적인 걸?
 

김강: 나는 중국이나 베트남 등의 정치적 구조나 사회적 분위기가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이런 감시 체제를 배우지 않으려는 것이 곧 서구사회의 인종주의라는 기사의 관점에도 동의하지 않아. 

하지만 유럽 각국의 록다운 대책들은 그럼 자동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서구적 가치”에 기초한 것이니? 제재, 금지, 그리고 벌금을 통해 코로나 파티나 여는 거만한 시민들을 길들이는 훈육국가적 정책들 말이야.  

팀 자유주의 대 팀 권위주의 도식은 내 보기엔 매우 자의적이야. 솔직히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럽 각국의 록다운 대처 모델은 타켓팅된 감시를 바탕으로 시민의 이동과 영업의 자유를 어느정도 보장한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모델”과 거리가 멀고, 이동통제와 출입/접촉금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식 “권위주의적 모델”에 훨씬 가까울지도 몰라. 실제 사태란 언제나 이렇게 더 복잡한 것이고, 우리는 신중하게 다양한 각각의 케이스들을 살펴야 하는 거지. 

‪전체 아시아를 “집단주의적” 문화로 범주화하거나 본질화하는 시선들을 함 보자고. 오늘날 다양한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적 공통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야. 어떤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전혀 공동체주의적이지 않고, 초-개인주의적이고 초-리버럴한 사회야. 거기서 지배적인 것이 있다면 그건 “투명성”이라는 정언명령이지. 서구사회에서보다 더 급진적으로 말이야. 개인들 뿐만 아니라 정부도 투명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정권이 뒤집혀. 물론 신자유주의가 아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지. 이건 그저 우리가 왜 여러 사회들을 몇 가지 재현들이나 현상형태들만 가지고 정의할 수 없는지의 한 예일 뿐이야.‬
‪나 솔직히 말해서 니가 확신에 차서 주장하는 본질주의에 가까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주장들에 매우 놀라고 있어. 그런 ‘문화’ 과연 정말 방역 정책들의 서로 다른 모델의 배경이나 원인인 것일까? 내가 보기엔 그것들은 배경이 아니라 전경,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까워 보여. ‬‬
‪그리고 내가 또 놀란 건 네가 유럽 국가들의 저 높은 사망자 숫자를 낭만화하고 있다는 거야. 감시와 추적 정책들을 외래적이고 악한 것으로 말하기 위해서. 인류학 연구자로서 너는 정말 차이점들에 대한 이 분석이 그렇게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M: 이건 인류학에 대한 게 아니라 정치적 신념 문제야. 그리고 꼭 같은 근본적 질문을 테러리즘에 대해서도 할 수 있어. 우리는 정말 경찰국가를 통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통해 테러리즘을 완전히 박멸해야 하나? 혹은 우리의 자유로운 사회를 지키기 위해 얼마간의 테러리스트 공격을 고통스럽지만 겪어야만 하는 걸까? 네가 만약 후자인 나의 신념을 “낭만주의”라고 가치절하한다면, 그래. 난 그 낭만주의와 더불어 살겠어. 만약 나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이 자유 사회에서 살 수 있는 대가라면 테러 공격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죽는 편이 더 나아. 물론 뭐 그런 일이 그렇게 높은 확률로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말해 보자면 그렇단 말이야. 


김강: 안 돼… 그건 너무 흑백논리다. 그래 그게 너의 유럽 리버럴로서 정치적 신념의 문제라면야 뭐 이해할 수 있어(근데 너 샌더스 좋아하는 좌파 아니었어?). 하지만 미안해. 그 신념에 도달하는 분석적 방법에는 전혀 동의를 못하겠다. 


M: 독일은 코로나 사망자 숫자를 평년의 독감 바이러스 사망자 숫자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어. 그런 점에서 보면 독일은 확실히 자유와 생명이라는 가치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어 잘 하고 있다고 봐. 한국도 그만큼 잘 하고 있지만 강조점은 자유보다는 생명에 있는 것 같다. 이게 내가 저 기사의 비판이 매우 일차원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야. 저 칼럼니스트는 자유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어. 생명의 가치란 분명 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자유는 그렇지 않지. 

그리고 네 질문 “유럽의 록다운 정책들이 유럽적 가치에 맞는 자유주의적인 것이냐?”말인데, 아 당연히 아니지. 그것들이 어떻게 자유주의적인 것이겠어. 내가 바보라고 생각함? 이건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억압이고, 자유의 제한이지. 부정적으로만 보면. 고전적 정치 이론에선 모든 정부의 법령은 억압과 강제력(Gewalt)이니까. 그건 아시아의 정부나 유럽의 정부냐와 상관없이. 

하지만 분명 좀 더 자유주의적인 행정의 형태들고 좀 더 권위주의적인 행정의 형태들은 분명 존재하고, 이상적 수준에서만 아니라 현실의 특정 현상형태들로 실현되고 있잖아. 어떤 사회는 자유를 더 제한하고, 다른 곳은 좀 더 자유를 주고 말이야. 너는 현실이 어떤 선명한 경계를 긋기에는 너무 복잡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독일과 중국의 통치의 형태는 자유주의 사회와 권위주의 사회 사이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충분할 만큼 급진적으로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김강: 그래 우리 모두 중국과 독일 사이의 차이를 꽤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독일과 대만, 혹은 독일과 한국 혹은 다른 민주주의적 비서구 국가들 사이에선? 서구적 가치와 비서구적 가치의 도식은 서로 다른 사회들을 분석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난 어떤 대가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중요하다는 네 정치적 신념은 동의하겠는데, 문화적인 것을 이렇게 도식화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너무 취약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서구 문명”의 핵심 가치 아니었나? 

그리고 이런 식으로 동양-서양을 재현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집합적인, 탈유럽중심적인, 더 나아가 탈인간주의적인 정치와 조직화의 방식을 상상하는데 해롭기까지 해. “아시아적” 코로나 방역에 대한 무조건 적인 칭찬 만큼이나 말이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들”에서 발견하는 것은 사실 “자유주의적”이지도 않아. 나는 이게 유럽 리버럴이 처한 또 하나의 딜레마라고 생각해. 요즘 “서구적 가치”라는 말 너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종교마냥. 

‪나는 그런 점에서 유럽인들이 좀 더 20세기에 비 서구 지역들에서 더 급진적으로 (그리고 엄청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한 통치성, 생명권력 그리고 훈육적 국가의 유럽적 기원에 대해 다시금 자기 자신의 것으로서 진지하게 마주해야 한다고 봐. 몇몇 비-서구 사회들은 이제 내 용어로 말하면 비-서구적인게 아니라 초-근대적 혹은 초-서구적 사회가 되었어. “우리”가 국제주의적이고 세계시민주의적 입장의 좌파라면(그래, 이게 내 정치적 입장이다), 소위 서구적 가치들의 패키지에 계속해서 점착되어서 다른 문화들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가치절하하기보다는 “우리”의 공통적인 근대성 안에서, 아니 그 공통적 근대성의 ‘균열’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봐. ‬‬
‪‬‬

M: 하지만 그럼 너는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가 마스크를 쓰는 문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 그게 집단주의 공동체 문화의 표현이 아니라면 말야. 왜 이런 문화가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공통적일까?‬

나는 당사자로서의 너의 경험이 갖는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진 않아. 그리고 오늘날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초-개인주의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네 분석에도 동의해. 자본주의는 거대한 개체화의 도구니까. 문화란 항상 여러 다양한(‪heterogenous)‬ 요소들이 섞인 어떤 거지.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정말 잘 몰라서 너한테 묻는 건데, 아시아의 공동체주의적 사회들이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은 틀린거야? 중국, 한국, 베트남 혹은 일본에서 개인과 공동체 간의 전통적인 관계란 그럼 뭐야? 서양의 기독교적 중세적 관계와 짝을 이루는 동양적인 것 말이야. 그리고 “아시아적 가치”같은 개념은 유럽인들이 아니라 싱가포르의 리콴유 같은 아시아인들 스스로가 서구적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해서 만든 것이지 않았어? ‬


김강: 아시아의 몇몇 지식인들이나 리콴유나 박정희같은 “독재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사회적 가치로는 사망했던 유교를 20세기 중반에 다시 소환해서 아시아인들의 문화적 오리지널리티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 한편으로는 바깥을 향해 반서구중심적, 반제국주의적 반응으로 나온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건 내부를 향해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고 그들의 권위주의적 노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했어. 

이들과 달리 역시나 지도자급 정치인 레벨에서 이 유교적 정체성의 기능이 그저 이 지역의 민주화에 대항해 전통적 요소 몇 가지를 도구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나중에 노벨상을 받은 대통령이 된 정치인 김대중이었어. “Foreign Affairs”지에서 벌어진 리콴유김대중 사이의 논쟁은 지금 봐도 읽을만 해. 나는 이런 식의 아시아인들 스스로의 동아시아 유교문화 정체성에 대한 주장들이 그저 뒤집힌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민족주의의 예라고 생각해. ‬‬

‪그리고 – 네가 진짜 진짜 놀랄지 모르겠는데 – 적어도 한국 교육 시스템에선 “유교 윤리”라던가 “유교 사회문화” 이런 과목이 없어. 심지어 박정희 때에도 그랬어. 고전적인 유교 교양은 이미 오래 전에 한국 사회에서 사라졌고. 내가 처음으로 유학자들의 경전을 읽은 건 대학의 아주 작은 수업에서였어. 다른 나라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한국 사람들은 솔직히 유럽사람들이 유대교-기독교 전통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적은 정도로나 유교를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21세기에는, 아 물론 중국 정부가 예전에 싱가폴이나 한국 독재자들이 유교의 이름으로 했던 걸 지금 하고 있긴 한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더 지배적인 건 신자유주의적 정체성이나 민주주의적 정체성이야. ‬‬

M: 하지만 분명 아시아적인 권위주의란 것이 실존하고 있고, 거기에는 역사적 이유와 요소들이 있지 않나? 예를 들면 근대 이전의 서구사회 역시 권위주의 사회였고, 근대적 통치성에도 네 말대로 권위주의적 요소들이 있어. 그것들은 기독교에서 온 것, 봉건적 구조에서 온 것, 근대 안에서 만들어 진 것,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즘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 내 생각에는 네가 오히려 동아시아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서구 근대성의 틀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유교의 영향을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김강: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나는 비서구 사회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전통적 사회가 외부로부터, 그러니까 서구의 식민주의 권력 혹은 서구적 근대성에 의해서 단절되었었다는 점을 다른 무엇보다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봐. 근대 이후로 어떤 전통으로부터의 성공적인 내재적 발전이란 대부분의 경우에 어렵거나 혹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지. 그래서 비-서구의 근대성이란 항상 키메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현대 아시아 국가들은 동양적이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서양적일 수도 없어. 지금 많은 사회들은 더 이상 19세기나 혹은 20세기에도 유지된 만큼 전근대적이고, 가난하고, 관습적이지 않아. 그 대신 “근대화되어야 한다”, “세계 시장에 통합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근대성의 명령어들을 통해서 어떤면에서는 서구 근대보다 더 근대적으로, 그러니까 초-서구적, 초-근대적으로 된 거지. 서구 근대성의 어떤 요소들은 더 과장되게 받아들이고, 어떤 요소들은 무시되고  그러면서. 


M: 그래도 어떤 아시아의 내재적인 요소는 있을 거 아니야. 말하자면, 좋아, 그렇게 수입된 권위주의가 왜 유독 강하게 꽃을 폈을까? 그러니까 마오쩌둥의 권위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성공했을까? 


김강: 네가 마오를 굳이 입에 올리다니 넘 반갑네. 마오쩌둥이 중국 유교의 가장 큰 적이었던 건 알고 있지? 모든 전통 유교적 가치들과 제도들을 “사회주의”(마르크스는 어느나라 사람?)의 이름으로 파괴한 건 바로 그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이었다고. 

어쩌면 누군가는 권위주의의 성공을 아시아에선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에 완수되어야 했던 근대화, 자유화, 자본주의화를 이유로 들 수도 있겠지. 또 세계 시장 속에서 경쟁관계를 탐색하는 정치경제학적 설명도 있을 수 있을 거고. 

그리고 애초에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국가들에서 “서구 근대성”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개인주의라는 가치의 패키지였을까? 홍콩 사람들이 중국 반환 전에는 언론자유와 집회시위, 선거의 자유를 막 누렸던가? 어느 곳 보다도 식민지에서 서구의 전면감시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았어? 그리고 오늘날의 ‘서구적 가치’라는 개인주의가 과연 서구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가치일까? 히잡을 쓴 이민배경의 여성이 백인들이 누리는 만큼의 개인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해? 정치적 권리를 갖지 않은 채로 노동인구로서 서구에서 살아가는 어마어마한 수의 이민자들에게도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가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일 수 있을까? 


M: 네가 마지막에 말한 게 분명 서구의 문제점인 건 사실이야. 불평등이 존재하지. 하지만 난 여전히 이 개인적 자유가 모든 이들에게 확장되는 것이 서구적 해법일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너의 논의에서는 너무 많은 길이 로마로 통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시아를 유교로 환원하는 것도 그렇지만 서구적 근대화로 환원하는 것도 부적절하지 않아? 다양한 요소들과, 역사적 우연들이 있겠지. 아시아적인 것의 특징이 분명히 서구와 다르게 존재하지 않나? ‬
‪‬‬

김강: 나는 모든 것을 서구근대성으로 환원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야. 아시아 및 모든 비서구의 권위주의적 근대화와 서구 사회의 연루 관계, 혹은 공범관계를 좀 더 분명히 하려고 하는 것이지. 오늘날의 세계자본주의적 공통점을 ‘문명간의 갈등’ 혹은 ‘차이’보다 정치적으로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
당연히 모든 지역들과 문명권들이 근대 이전에는 관습적이고, 전근대적 형태의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 중 어떤 것들은 여전히 이런 저런 방식으로 현재에도 작동하고 있을 것이고. 그건 맞아. 하지만 근대화, 식민화 그리고 세계화 이후의 모든 것들은 인류의 아주 구체적인 역사적 단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야. 서구중심주의에서 자유로운 어떤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문화의 발전은 지난 수세기 동안, 그리고 지금도 불가능한 어떤 것이야. 그래서 너무 많은 것들을 서로 다른 정체성과 문화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너무 약하고, 정치적으로 무쓸모하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생각해. 새뮤얼 헌팅턴과 네오콘을 보라고!! 

M: 그럼, 이를테면 마스크 쓰는 문화 같은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너는 아직 이건 설명하지 못하고 있어. ‬

김강: 그래 좋아. 우리는 “집단주의 문화” 말고도 충분히 여러가지 설명을 내놓을 수 있어. 첫째, 우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어디서나 쓰는 게 상대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스크를 쓰는 게 그렇게 일반적으로 공유되거나 강요되는 문화가 아니었어. 내 생각에 2000년대 초반의 SARS 전염사태 이후에야 확실히 전염병에 대한 요즘 식의 공포가 커진 것 같아. ‬
둘째, 많은 유럽과 북미의 공장들이 중국, 아시아, 태국 같은 아시아 국가들로 제조업 공장들을 이전하는 바람에 이 동아시아 전체 지역이 공기 질이 여전히 매우 나빠. 유럽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지. 이미 이번 판데믹 이전에도 스모그나 미세먼지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건 이 아시아 각국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어. ‬
‬셋째, 중국, 한국, 베트남 등에는 마스크를 생산하는 공장들이 꽤 많아. 부분적으로는 위에 말했듯 제조업이 여기에 몰려있기도 하니까. 생산된 마스크는 계속 팔려야 하는 것이고. 그런 시장 요소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넷째, 내 주장과 관련해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일텐데, 이 지역에서는 항상 더 근대적이 되라는, 더 시민윤리를 갖추라는, 더 서구적이 되라는 그래서 더 위생적이 되라는 사회적 압력이 근대화 시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있어. (서구인들은 이 점을 정말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더라.) 정작 마스크를 쓰는 건 전혀 유럽이나 서구 문화가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마스크는 근대화됨, 위생적임을 상징하는 게 되었을 수도 있어. 이런 게 비서구, 구식민지 국가들에 있는 식민주의적 유산 같은 거지. 혹은 내가 말한 초-서구성 같은 것. 다섯째, 여섯째… “집단주의 문화” 보다 훨씬 더 개연성 있는 설명들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거야. 

문화를 어떤 것들의 ‘원인’이나 ‘배경’으로 바라보는 문화환원주의적 접근은 항상 매력적이고 쉽지. 하지만 이 공통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을 생각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한국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마스크 쓰는 이유에 대해서 공동체주의적 행동이라고 즐겨 설명할 지도 몰라. 그게 더 문명적이고 성숙하게 들리니까.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유교의 경우 만큼이나 환원주의적인 설명 같다. 감시의 테크놀로지들을 아시아 사람들이 폭넓게 수용하는 데에도 권위주의 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긴 설명이 가능할 거야. 하지만 나는 철학도이지 이 분야의 전문가들인 문화연구자나 인류학자, 사회학자가 아니니까 여기서 줄일게. 

‪나는 우리 시대의 생명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가치”에 기반하거나 “문화”에 기반한 선명하고 쉬운 클리셰들보다는 훨씬 모호하고, 모든 방향에 비판적인 접근법들이 필요하다고 봐. 그런 클리셰들은 근본에서는 결국 유럽중심주의로 귀결되는 것이었어. ‬‬

‬M: 오케이. 이제 밤이 늦었다. 재밌는 대화 고마워. 다음에 만나면 더 많이 이야기해보자고. 허그로 인사하지는 못하겠지만... 


김강: 그래. 나도 이 늦은 시간까지 너랑 오랜만에 토론같은 토론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 담에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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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전면감시사회, 유럽중심주의에 관한 어떤 논쟁 [긴 버전] file

  •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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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수 356

■이 글은 지난 5월 27일 <피렌체의 식탁>을 통해 축약해서 공개한 글의 원래 버전입니다.  최근 나는 <피렌체의 식탁>으로부터 코로나와 유럽사회에 대한 또 하나의 기사를 청탁받고 관련 기사들을정리할 겸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있었다. 보통은 따로 코멘트를 달지 않기 때문에 마치 자료실처럼 기사가 쌓이고 있었는데 5월 초에 공유한 칼럼 <How Germany Is A COVID Failure> 에 뒤늦게 인류학 전공자인 독일인 친구 M이 상당히 분개한 어조로 댓글을 달았다. 원 기사는 스리랑카의 언론인 Indi Samarajiva이 영어로 쓴 칼럼으로 이 거...

다시,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 file

  • 김강
  • 2020-04-16
  • 조회 수 1728

이 글은 아래의 글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에 대한 한승동 메디치 미디어 기획주간의 반론 "코로나19 팬데믹, 서방 패권 소멸의 분기점"에 대한 재반론을 겸하여 쓴 글입니다.  지난 7일 <피렌체의 식탁>을 통해 번역, 공개한 에세이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 (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가 이 정도로 관심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 독일어권 독자들에게 이 글을 공개한 매체인 Merkur부터가 대중적인 잡지가 아니라 소수의 인문계 지식인들을 독자로 하는 매체였기 때문...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 [피렌체의 식탁] file

  • 김강
  • 2020-04-16
  • 조회 수 177

이 글은 필자가 독일의 문화비평지 Merkur의 블로그에 기고한  글 "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을 한국어로 수정, 번역하여 <피렌체의 식탁>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번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남한이 서구사회의 상당한 주목과 칭찬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즈 같은 보수 경제지 뿐만 아니라 리버럴 미디어인 뉴욕 타임즈나 BBC, 좌파 신문인 디 타게스차이퉁(die taz) 등이 앞다투어 Covid-19 대규모 감염 사태를 다루는 소위 한국식 대책을 우리시대 위기대응의 교과서...

스카이캐슬 조(파)국씨의 계급투쟁 file

  •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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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캐슬의 조(파)국씨 가문이 해온 일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별다른 불법행위는 찾을 수 없는 민중에 대한 범죄행위”다. 법과 규칙의 논리를 넘어 ‘계급’을 이 파국 속에서 발견할 때에야 정부여당과 그 주변의 리버럴 엘리트들은 이 “범죄행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아주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런 형태의 ‘파국’과 ‘분노’야 말로 리버럴 엘리트들이 가장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파)국 가문이 부와 학력을 세습하는 동안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은 불공정했고, 결과는 부정의...

[서평] 민중이 사라진 시대,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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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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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이상철 외 공저, 분도출판사 펴냄, 2018년 작년 한 해 이런 저런 경로로 등단한 신인 소설가들 중 가장 큰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의 장류진(張琉珍) 작가였다. 창비에서 온라인으로 그의 소설을 공개하자마자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들 상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난 그의 단편은 (웹상에서의 평가에 따르면) 하이퍼-리얼리즘 자본주의 비판 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짧은 분량 안에서도 판교 테크노벨리의 IT기업 및 재벌 대기업의 사내문화와 직장갑질...

목적지가 고작 청와대인가 fil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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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좌파들이 지금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차벽을 넘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 갈아치우는 게 가장 큰 목적인 것마냥. 자본주의의 지배를 끝장은 못내더라도 적어도 의문에 붙이자고 좌파하는 거지 민주당으로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지금까지 좌파했나.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100만명이 나왔는데, 거기 1/10 채우자고 우리가 좌파하는 건가. 이 판은 좌파의 판이 아니지 않은가. 퇴진도, 탄핵도, 하야도 좌파가 주도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재벌들이 줄줄이 엮여 있는, 국민연금과 삼성이...

‘책 안 읽는 남자들’ 담론과 내일의 극우정치 fil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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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시장에서 2030 남성이 사라졌다지금은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몇 주 전 문재인과 민주당은 꽤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이 위기를 촉발했다. <빙하는 움직인다>(창비),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이다. 새누리당은 이 책을 근거로, 참여 정부가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앞서 북한에 의견을 구했고, 그에 따라 기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을 정조준했다. 내게 이 논쟁 자체는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몇 주 지나서 전혀 생뚱맞은 맥락에서 이 책이 언급...

정치는 신학을 떨쳐낼 수 있을까 - 마크 릴라, «사산된 신» 서평 (200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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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하셨습니다." fil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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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어떤 문명이 미개함을 몰아내자는 캠페인으로 건설된 바 있을까. 있다. 오직 식민지들에서만 그것이 가능했다. 그것을 건설이라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미개를 타파하고 문명을 갈망하는 목소리들에 (문명인 다운) 주체적인 자의식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문명 캠페인은 두 개의 타자화 형식, 즉 1. "미개"라는 타자를 설정하고 공격하는 것, 2. 스스로 "외국"이라는 대타자(오직 구미의 선진국들만이 이 "외국"이 될 수 있다)의 대상이 되는 것 속에서 이뤄진다. 그 속에서 문명을 갈망할 수록 주체는 더욱 더...

[번역] 좌파 버전의 무의미한 그렉싯 담론에 반대함_토마스 자이버트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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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그리스 치프라스 수상과 차카탈로스 재무장관이 국민투표에서 채권단 안이 부결된 뒤에 이와 비슷한 긴축안을 재출함으로써 각국 좌파들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칼럼은 독일 좌파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리자 정부의 신 협상안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리스 정부의 신 협상안은 정치적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독일 정부가 이끄는 현재 유럽질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무엇보다 정치적 행위자로서 좌파진영의 무능이야말로 이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유럽 및 그...

독일 급진좌파운동 약사(略史) fil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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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운동의 학생 지도자 루디 두취케 6, 70년대의 독일 급진좌파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비교적 익숙하다. 50년대의 보수적인 “총리 민주주의”의 시기를 거쳐 대연정 및 사회민주주의의 황금기에 접어든 독일(서독)에서도 반전운동과 반권위주의로 특징지워지는 68혁명의 기운이 불어왔다. 이 시기의 서독의 의회정치는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 그리고 소수파 자유당 단 3당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교회(가톨릭과 독일개신교)나 노동조합,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이들 정당을 통해 대의되는 조합주의적 사회형태를 띄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