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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

조회 수 2656 추천 수 0 2016.01.13 02:30:36


 정희진, ‘남성 페미니스트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8409.html

 

뒷북. 진작에 읽었으나 도무지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공감과 비판적 의견이 교차하는 글이라 내 의견을 적어보고 싶었다. 일단 이 글이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 가지 유형의 남성 페미니스트를 정리했기에 나도 기준에 맞춰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 상관없을 것이다.(각자 자신과 주변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유형으로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이들과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경우를 든다. 이 글의 주요 비판대상은 후자인 남성 페미니스트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천과 선언 중에서 선언에 방점이 찍힌 남성들이다.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실천하는 남성 페미니스트와 선언하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구별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면이 있으나, 현실적으로 그 구별 방식에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열거한 남성들의 특징이 딱히 페미니스트 남성의 유형인지는 의문이다.

결혼 제도가 국가의 복지 정책을 대신하고 있다며 비혼을 고수하는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예로 들기에는 걸리는 너무 많다. 비혼을 고수하는 남성이 똑같이 비혼을 고수하는 여성만나지는 않는다.  비혼을 고수하는 남성과 연애하다가 여성이 결혼을 원하는 경우, 여성에게 남성의 비혼주의 어떤 작용을 할까. 감정 착취, 희망 고문등등. 여성주의 실천과 무관하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많은 여성들과 인생 즐기며지내고 싶어 비혼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다. 글에서 비판하는 상대방의 자원(, 지식, 섹스, 보살핌…) 착취하고분업(‘양다리’) 하는 이면서 비혼을 실천하는 남성의 경우는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양다리만 하나? 문어다리, 오징어 다리로 상대의 동의 없는 멀티연애(속이기) 자유라고 주장하기도 하지)

“ 작은실천이지만 집에서 앉아서 소변을 보는 들도 가까이에서 알고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여성주의적 실천 무관한 나의 위생 위한 선택이라고 한다. 나랑 같이 사는 남자도 앉아서 소변 보는 남성이다. 그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하지만 정작 앉아서 소변 보는습관을 두고 여성주의적 실천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변기와 욕실을 깨끗이 쓰고 싶을 뿐이다. 내가 아는 다른 남성도 직접 청소를 하고 살다 보면 앉아서 소변을 필요 느낀다고 했다. 다만 서서소변을 보지 않으면 마치 남자의 자존심이라도 구겨지는 생각하는 사람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비판할 수는 있겠다.

이제 이 글에서 비판하는 불성실한 루저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로 포장하는 대해서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 “빈대 연대라고 주장하면서, 가부장제 연애 시장의틈새 파고든다.” 안에서 말이 뱅뱅 돌면서 정리하지 못한 언어가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15 전에 100만원 빌려간(갚지 않은)’ 인간에게 정확히 해당되는

하지만 이런 인간들이 딱히 자신을 페미니스트 정의하는 남자들에게서 벌어지는 일일까.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남자를 현실에서 뼈와 살이 있는 생명체로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페미니스트까지 필요도 없다. 이들은 소위 자유로운 영혼이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여성에게 벌이는 착취는 성실하고 전통적인남성들을 능가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로운 영혼들은 관계에 대한 무책임과 불성실함을 자유 포장하는데 선수들이다. 여성의 지성을 칭찬 줄도 알며 교양 있게 예술을 즐기고 정치적으로 약간의 진보적 위치를 가지면서 정치와 문화에서 트인사람 노릇을 한다. ‘너무자유로워서 여성의 계급 투쟁에는 관심 없지만 성해방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이들의 성해방의 개념은 나와 자유롭게 섹스하기에서 머물곤 한다. 성매매와 성관계도 구별하지 않고’,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자유롭게하려 하며, 성적 대상화를 종종 여성의 성해방으로 둔갑시킨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는 않지만 페미니스트라는 여성과 연애 해보고 싶어한다.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진보적 의식을 과시하기에 좋고 자기 내부에서는 페미니스트를 휘어잡았다는 정복감을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중에도 앉아서 소변 보는남자가 있을 있다. 그러니까 작은실천을 하는 남자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며 빈대 붙는 남자와의 구별은 애초에 의미가 없다. 군대도 다녀 오고 서서 소변을 보는 기혼 남성이지만 열심히 가사와 육아에 참여하는 남성도 있고, 비혼을 주장하며 가부장제에 편입되지 않으려 하지만 여자를 수도 있다.

지난 해 11월 미국의 유명한 포르노 배우 제임스 딘(James ‘Deen’)의 전 여자친구가 트위터를 통해 딘이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폭로를 했다. 평소에 제임스 딘이 페미니스트라는 이미지를 얻은 적이 있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남성 페미니스트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남자는 절대 믿지 말라는 말이 sns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딘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고 페미니스트처럼 들리는 발언을 2015 8엘르와의 인터뷰에서 한 적이 있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존중과 모든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받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제임스 딘과 같은 사례를 남성 페미니스트의 문제로 굳이 간주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이러한 사례를 악용한다. 강간범 중에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남자와 아닌 남자의 비율을 따져볼 필요까지 있을까. 성폭력은 보수나 진보, 계층과 연령을 떠나 전방위적으로 벌어진다.

하여튼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되기 쉽다’. 여성은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멀리 파키스탄에서 목숨까지 걸었던 여성을 끌어와 훈계하려 드는 남성들에게 시달리지만 남성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기본 도리만 지켜도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로 여겨준다.

, 남성 페미니스트의 모순을 비판하되 주의할 점이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모순이 보수적인 남성성을 유지하며 마초가 아닌 척도 안 하는 이들을 합리화시키지는 않는다. 자신의 성차별적 의식을 감추려고 하는 위선조차없는 사람이 남성 페미니스트의 모순을 비웃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아주 드물지만, 훌륭하게 실천하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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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Deen



댓글 '7'

소년의노래

2016.01.13 22:12:44

최근 이와 관련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마침 반갑네요. 

사실 페미니즘도 수많은 학문 중에 하나일 뿐인데 굳이 이 학문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데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생각도 들고 되레 그런 주저함이 '페미니즘마저 타자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또한 그 학문의 가치를 지향하지만 모순적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건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거든요. 대표적인 게 '나는 사회주의자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정작 현실은 자본주의의 삶의 법칙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는다던가 하는...그런데도 겉으로는 사회주의자이기를 주저하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그런 모순을 당당하게 고백하기도 하고요.

하기사 다른 학문의 경우 내가 그 가치를 지지한다고 표했을 때 거의 대부분 내가 처해 있는 곳이 '피해자'인데 반해,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했을 때 처하게 되는 곳은 '가해자'거든요. 그런 부분이 아마 쉽게 '나는 남성페미니스트다.'를 선언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요. 그래서 전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는 않지만(근데 이건 여성들도 마찬가지)일상에서 반페미니즘의 언어들을 마주칠 때마다 제가 배운 페미니즘의 언어로 꼬박꼬박 말대꾸는 하는 정도로 실천(?)하고 있기는 합니다.

근데 한편으로는 이런 것도 있어요. '여성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깨어 있는 인간인지를 어필하는 남성들'의 모순과 더불어 '겸손하게 여성주의의 가치를 지지하는 남성'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키며 살아가는 남성이 자신의 그러한 모습에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주지 않는 것에 끝내 실망감을 느끼는 유아기적인 욕망을 가지는 모순. 저도 그렇거든요. 만약 어떤 여성 페미니스트가 저와 대화하던 도중 '당신도 다른 남자들과 크게 다를 건 없군요.'라고 말한다면 되게 서운할 것 같거든요.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묵묵히 페미니즘의 가치를 지지하고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뭐가 어쩌고 어째?' 이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릴지도요. 뭐 그렇다고 '반페미니즘'이니 '하는 꼬라지'니 이런 드립은 절대 안 하겠지만...

왜 그런가?를 고민해봤어요. '왜 나는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 어떤 기대를 요구하고 실망을 거듭하는 유아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어떤 여학생들이 제 등 뒤에서 '야 저 사람 키 진짜 크다. 앞에 가서 얼굴 좀 봐봐'라며 제 앞으로 와서 제 얼굴을 확인하고는 '아이 씨'라며 실망했다는 투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처음으로 '여성'에게 '성적으로 대상화'를 당한 경험을 했는데 아마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일상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 순간에는 살짝 수치스러웠지만 그게 다더군요. 아주 솔직히, 눈꼽만큼의 마음의 상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 여학생들이 제 얼굴을 확인하고 '아이 씨'라고 하는 순간 제가 살짝 눈을 흘겼거든요. 그러자 여학생 3명이 살짝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뻘쭘해하더군요. 그렇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갈 길을 가는데 왠지 모르게 뿌듯한 거에요. '난 역시 착한 남성이야. 이렇게 여성들의 무례에도 아무렇지 않게 반응할 줄 알다니.' 아마 저에게는 '나에게는 저 여학생들을 위협하고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 힘을 행사하지 않고 참아내고 인내했다는 데서 오는 윤리적 우월감'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권력의 우위를 점한 자가 약자를 향해 발현되는 그 권력성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상대적 우월감이 자신이 당한 수치심을 끊임없이 상쇄해주는 것이죠.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거에요. 여성들이 내 삶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인식되는 하나의 존재'가 아닌 '내가 배려하고 지지해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로만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의 비판과 저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관음증 환자처럼 관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거요. 실은 페미니즘과는 별다른 연관도 없으면서, 지지한다고 딱히 득이 될 게 없는데도 '나는 페미니즘의 가치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남성들이 있는 건 이와 같은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전 '메르스 갤러리'를 포함한(최근에는 흑화했지만)수많은, 다소 과격하고 때로는 지나치다 싶은 여성주의 운동을 긍정적으로 봐요. 중요한 건 '두려움'이라고 보거든요. 여성이라는 존재가, 단지 내 앞에서 마음껏 저항하고 그러면서 남성적 세계의 드넓은 품 안에 안기기를 쉴 새 없이 반복하기만 하는 존재인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 삶을 위협할 수 있고 나의 세계를 일그러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두려움'이 있다면, 앞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하면서 뒤에서는 그들의 저항을 포르노처럼 관전하는 '위선적 마초주의'가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묵혀뒀다 풀어 놓아서 횡설수설했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이라영

2016.01.14 00:09:18

전혀 횡설수설하지 않았고요, 오히려 오래 생각한 흔적이 보이는 글을 솔직하게 풀어놓아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두려움'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고 많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꼭 다루고 싶은 주제고요.
그래서 더 반갑게 읽었어요.
제 식대로 말하자면, '지랄'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소년의노래

2016.01.14 02:49:02

http://blog.daum.net/jayuin666/876

'젊은 여자만을 탐닉하는 남성의 욕망'을 예리하게 짚어주신 이 글 덕분에 저는 제 욕망을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오버해보자면, 이 글을 읽고 난 뒤로 여성을 바라보는 저의 인식이 어느 정도 변했다고 해야할까요? '예쁜 여자 좀 좋아하면 어때? 인간의 당연한 본능인데?' 이런 나이브한 관념을 당연한 것이라 믿어왔던 저에게 '너의 그 욕망은 왜 항상 젊은 여자만을 향하느냐?'며 라영님께서 명징하게 언급해주시는 걸 보고 '아'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런 거요. 이런 게 필요한 게 아닐까 해요. 언어와의 긴장관계. 최근 '폐경'이라는 말을 '완경'이라는 말로 바꿔야한다는 글을 읽었는데 정말로 인상적이었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보다 더 많아졌으면 해요.

이라영

2016.01.14 08:02:50

헉... 까먹고 있던 글이네요.

뮤타

2016.01.23 22:42:34

일단 기본적으로 링크한 칼럼의 필자인 정희진 선생이 말하는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이들'과 '(선언적)남성 페미니스트'라는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지금의 젠더 불평등에 개입하고, 위협하지 않는 페미니즘은 그것이 일상적 실천을 담보하더라도 껍데기에 지나지 않고, 그냥 선언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이 젠더 불평등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면 그것이 더 페미니즘에 가깝다고 봅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교양으로 작동하는 페미니즘과 저항으로 작동하는 페미니즘은 전혀 별개의 것이죠. 특히 교양의 일부로 거래되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그저 교양의 한 부분으로 포섭할 뿐, 젠더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정희진 선생의 저 구분이 놀라울만큼 '교양으로써 페미니즘'을 타격하지 못하는, 혹은 심지어 그것을 어떻게든 우회하고 싶은 물타기 프레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데요.
그건 정선생이 '실은 안티페미니스트였다', 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사실 '교양'주의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기 때문이라는.... 사실 뭐 한쿡에서는 이마저도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교양으로 그것을 벌충한다는 건 망상이므로.... 페미니즘이 '이 구역의 미친X' 타이틀을 차지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1인....아니 2인인가요?

이라영

2016.01.26 07:36:56

구분이 모호하고, 저는 글에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구별이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선언하고 실천 안 하는 사람, 실천하고 선언 안 하는 사람, 실천 안 하지만 선언으로 공공의 영역에 담론을 만드는 영향을 끼치는 사람, 이걸 다 구별하기란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어서요.

껌종이

2016.08.24 18:00:12

진보주의자 혹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페미니즘에 대해 당사자인 여성보다 더 많이 알고있다고 자부하는 남성들이 가진 성해방의 개념을 '나와 자유롭게 섹스하기'라고 표현하신 게 참 와닿습니다.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떠드는 어떤 남자가 메갈리아를 비난하면서 '진정한', '올바른' 여성주의의 실천은 여성이 지갑에 콘돔을 가지고 다니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기함한 기억이 나네요. 더군다나 그 남자가 '잘못된' 여성주의자들을 계도하시려 인용한 '콘돔소지론'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여전히 죄악시하는 세태에 대해 비판한 권인숙 교수의 칼럼이었다는 것이 더욱 소름끼치는 일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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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진, ‘남성 페미니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8409.html   뒷북. 진작에 읽었으나 도무지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공감과 비판적 의견이 교차하는 글이라 내 의견을 적어보고 싶었다. 일단 이 글이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 두 가지 유형의 남성 페미니스트를 정리했기에 나도 그 기준에 맞춰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도 상관없을 것이다.(각자 자신과 제 주변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유형으로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이들과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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