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윤리적 창작

조회 수 737 추천 수 0 2015.11.13 06:53:51


 1001844.jpg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 Honoré Fragonard (1732~1806), <La Gimblette (침대 위에서 강아지와 노는 소녀)>, 1770년 경

가슴을 드러내고 아랫도리를 벗은 소녀의 성기를 강아지의 꼬리로 가리고 있다.

그 점 때문에 당시에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서스펜스의 대가히치콕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영화화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원작이 있는 2차 창작물의 경우 본래 그 원작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가 여간 쉽지 않다. ‘성스러운 텍스트는 더욱 그렇다. 영화 <노아>는 성경을 왜곡하고 반기독교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대중은 하나가 아니며 대중의 공감이 창작의 지표가 되어선 곤란하다. 표현의 자유는 대중의 공감 하에 이뤄지는영역이 아니다. 대중의 공감 여부와 관계 없이 제도적 검열과 탄압에서 창작을 지키기 위한 개념이다.

 

올 초에 팝 가수 시아는 엘라스틱 하트의 뮤직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KWZGAExj-es) 에서 13세 무용가 매디 지글러를 성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비판 때문에 사과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글러가 늑대 소녀를 연기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가수 아이유의 새 음반을 두고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과 비슷하게 소아성애를 운운했다. 아이유도 비판이 일자 직접 사과했다. 음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윤리적 심판 앞에서 사과하지 않고 버티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가수가 직접 사과까지 한 아이유의 제제는 새롭지 않고 내게는 흥미롭지도 않은 노래다. 나의 편협한기준으로는 딱히 재해석이라고 할만한 해석도 없다. 빈곤과 학대를 보며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쓰다가, 이러면 안 되지? 라는 자기검열이 시작된다. “예술에도 금기가 존재해야한다거나 음원을 폐기하자며 서명 운동을 하는 황당한 모습 앞에서 일단 표현의 자유를 강조해야 한다. 작품의 미학적 논의는 윤리 앞에 꽉 막혀 버렸다. 창작품을 두고 윤리의 언어가 앞서 나가면 작품의 미적 평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말하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우리는 표현의 개념과 범주를 논하거나 창작품의 완성도와 발상에 대해 평하고 감상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대신 그 표현을 지키느냐 버리느냐를 선택할 기로에 놓인다. 창작과 비평이 함께 망해가는 길이다.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오래 생각을 숙성시킬 필요가 있건만, 과격한 반응 때문에 뻔한 말만 반복해야 한다. 여러 관점의 비평이 아니라 지지와 반대라는 양 진영으로 나뉘어야 하는 상황이 언제나 불편하다. 제도적 규제와 비판적 의견을 혼동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비판 받지 않을 권리가 아니듯이, 비판할 자유가 작품을 폐기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니다.

 

결국 어떤 창작품을 이 사회에서 삭제하고 말겠다는 의지는 단지 그 작품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수많은 담론들을 함께 묶어 폐기처분 하겠다는 무서운 발상이다. ‘창작의 고통을 운운하는 작가가 남의 창작에 대해서는 쉽게 폐기를 외치는 모습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각종 말도 안 되는상상을 얼마나 그럴 듯 하게 잘만들었는지에 대해 논해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연결시키면서 음악은 어디로 가고 범죄를 옹호하느냐 마느냐가 되었다. 1984년 세르쥬 갱스부르가 당시 13세인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와 부른 <레몬 인세스트>가 근친상간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 음악 때문에 근친상간이 늘어났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라진 홍대 근처의 실험예술극장 씨어터제로가 건물주의 퇴거 명령으로 2004년에 처음 폐관 위기를 맞았을 때 씨어터제로를 살리기 위한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한 연극인의 말을 늘 되새긴다. “문화가 풍성해지려면 누드(퇴폐)도 있어야 하고, 카페(담론)도 있어야 하며, 클래식(순수예술)도 있어야 한다”. 함부로 폐기를 말하지 말길. 풍성하게 비판하고 싶다. 창작자는 쉽게 사과하지 말고.

 

2015. 11. 12 한겨레


댓글 '1'

2017.10.30 18:06:31

이라영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윤리적문제로 작품을 폐기해야한다는 것은 너무 나간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유의 꾸준한 아동성적대상화 컨셉은 비판받을만 한것 같습니다.

좋은날,너랑나 시절은 나이많은 삼촌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컨셉이었고
제제가 수록된 앨범 스물셋은 뮤비자체에 영화 로리타의장면과 성적인 은유들이 나옵니다.

제제사건은 아이유의 이런 꾸준한 아동성적대상화에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 쌓여서 터진것으로 보고
저는 음원폐기운동에 동의하진 못하지만
어쨌든 아동성적대상화에 대한 비판이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여성의 장소 file [2]

  • 2016-02-08
  • 조회 수 3387

루이즈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1911~2010), <여성-집 Femme Maison> 연작, 1946~47년   며칠 전 간단한 다과를 준비할 일이 있어서 스타벅스에서 케이터링 서비스로 커피를 구매했다. 나는 그런 서비스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커피를 내려서 보온병에 담아 갈까(보온병이 없네), 인스턴스 커피를 사서 뜨거운 물에 각자 타먹게 할까(인스턴스 커피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냥 주스만 마실까(커피를 찾으면 어떡하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타벅스에 가면 보온이 되는 큰 통에 담아준단다. 오, 그런 좋은 서비스가! 양도...

남성 페미니스트 file [7]

  • 2016-01-13
  • 조회 수 2656

 정희진, ‘남성 페미니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8409.html   뒷북. 진작에 읽었으나 도무지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공감과 비판적 의견이 교차하는 글이라 내 의견을 적어보고 싶었다. 일단 이 글이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 두 가지 유형의 남성 페미니스트를 정리했기에 나도 그 기준에 맞춰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도 상관없을 것이다.(각자 자신과 제 주변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유형으로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이들과 “자신...

여자의 말 file [4]

  • 2015-12-06
  • 조회 수 1543

  Thomas Gainsborough(1727~1788), <Conversation in a park>, 1746~7년 경 레이놀즈와 함께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화가인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작품이다. 그림 속의 커플은 작가 게인즈버러와 그의 부인 마가렛이며 결혼 기념으로 남긴 그림이다. 당시로서는 풍경과 인물이 함께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졌다는 면에서 새로운 장르 개척이나 다름 없었다. 귀족들의 사적인 일상을 우아하게 보여주는 그의 그림들은 상류층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공원에서의 대화>는 내가 가끔 들여다 보며 홀로 웃는 그림 중 하나다. ‘대화’하는 부부의 모...

윤리적 창작 file [1]

  • 2015-11-13
  • 조회 수 737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 Honoré Fragonard (1732~1806), <La Gimblette (침대 위에서 강아지와 노는 소녀)>, 1770년 경 가슴을 드러내고 아랫도리를 벗은 소녀의 성기를 강아지의 꼬리로 가리고 있다. 그 점 때문에 당시에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서스펜스의 대가’ 히치콕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영화화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원작이 있는 2차 창작물의 경우 본래 그 원작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가 여간 쉽지 않다. ‘성스러운 텍스트’는 더욱 그렇다. 영화 <노아>는 성경을 왜곡하고 ...

<베어, 더 뮤지컬> : 변태, 걸레, 못난이 file

  • 2015-08-26
  • 조회 수 1724

  <베어, 더 뮤지컬>은 처음부터 “우리 중에 변태 있어~”라며 시작한다. ‘파격적 소재’라고 하지만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15년 전 초연했던 작품으로 이제 미국에서는 동성결혼 합법화까지 되었기에 그 파격의 농도는 과거와 다르게 읽힌다. 늘 논란이 동반되기는 하지만, ‘안방’ 극장에서도 작가 김수현이 2010년 동성애를 다룬 적이 있으니 뮤지컬의 소재로 딱히 ‘파격적’이라는 수사까지는 필요 없어 보인다. 단지 동성애를 다룬다는 사실만으로 소재의 신선함을 앞장세우기에 이미 대중문화는 훨씬 앞서있다. 이야기의 얼개는 간단하다...

죽음을 돌보기 file [2]

  • 2015-08-10
  • 조회 수 1641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죽음도 선택할 수 없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안락사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 일까. 다만 무조건 ‘살아있음’이 ‘생명존중’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사방에서 자꾸만 백세시대라고 하는데 참으로 염려스러운 백세시대다. 돈 없고 나이 많고 병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을까.   영국인 호스피스전문 간호사가 안락사를 선택했다. (관련기사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702930.html) 죽음과 죽음에 가까운 사...

‘순수’에 저항하기 : <솔로강아지> 전량 폐기를 보며 file

  • 2015-05-27
  • 조회 수 2155

격월간지 <민들레> 6월호에 실리는 글입니다. <민들레>의 허락 하에 이 곳에도 글을 올립니다.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체리를 든 소년 (Gamin aux Cerises)>, 1858년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표정이 잘 어울리는 배우 이나영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등장하는 한 카드광고. 같은 광고의 유해진 편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라고 한다. 가만히 있기, 긍정적인 태도, 바로 이 시대가 원하는 인...

징계 받은 키스 file [2]

  • 2015-04-24
  • 조회 수 2687

“욕망을 이성애적인 것으로 만들면 ‘여자’와 ‘남자’의 표면적 특질로 이해되는 ‘여성성’과 ‘남성성’ 간의 분명하고 불균형적인 대립이 생산되어야 하고 또 제도화되어야 한다.”   - 주디스 버틀러 / 조현준 역,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년, 116쪽 Camille Félix Bellanger (1853-1923), <Abel>, (1874-1875)   현실 세계의 폭력보다 가상 세계의 연애에 더 당혹감과 분노를 드러내는 경우는 흔하다. 옆집의 가정폭력보다 드라마 속의 ‘불륜’을 더욱 막장으로 바라본다. 또한 영화 속의 ‘야한 장면’을 볼 수 있는 나이와 실제 성관계...

술 마시는 여자

  • 2015-03-31
  • 조회 수 1168

<여자 술꾼>, Pieter de Hooche(1629~1684) 아무런 긴장감 없이 늘어뜨린 왼팔, 편하게 죽 뻗은 다리, 발그레한 볼에 미소를 띤 여자의 얼굴을 보니 벌써 여러 잔 걸친 모양이다. 다음 잔을 위해 옆에서 남자가 술을 따르고 있고 옆에는 나이 든 하녀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창 밖이 훤하다. 여자는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그 무서운 낮술을 마시는 중이다. 바닥에 잠들어있는 강아지에게도 어쩌면 술을 줬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17세기 네덜란드 작가 피에터 드 후흐의 <여자 술꾼>은 순간을 즐...

여성을 연기하기 [1]

  • 2015-03-27
  • 조회 수 1374

 지난 주말 파리 근교에서 ‘국제여성영화제’가 있었다. 해마다 이 즈음이면 열리고 올해로 37번째다. 여성이 제작하고, 감독하고, 여성에 대한 주제로 가득한 이런 영화제를 보면서 왜 ‘남성영화제’는 없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여성부는 있는데 남성부는 없으니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여학생회, 여직원 휴게실, 여성할당제처럼 ‘여성’의 이름으로 호출되는 자리가 많다는 건 ‘특혜’가 아니라, 그만큼 일상에서 여성의 자리가 협소하다는 뜻이다. “헐리우드에서 여자로 사는 건 힘들다”는 리즈 위더스푼의 말대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