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죽음도 선택할 수 없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안락사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 일까. 다만 무조건 ‘살아있음’이 ‘생명존중’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사방에서 자꾸만 백세시대라고 하는데 참으로 염려스러운 백세시대다. 돈 없고 나이 많고 병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을까.
영국인 호스피스전문 간호사가 안락사를 선택했다. (관련기사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702930.html)
죽음과 죽음에 가까운 사람을 곁에서 늘 지켜보는 일을 했기에 늙고 병드는 고통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5년 전 ‘행복전도사’라던 최윤희 작가가 남편과 동반자살했다. 그는 700가지 고통에 시달렸다고 유서에 남겼다. 그 고통과 함께 살아야 행복일까, 그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행복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지만 고통을 겪는 당사자의 입장은 물론이고, 그를 돌보는 사람의 고통도 대체로 끔찍하다. (내 가족 중에도 있다) 영화 <아무르>처럼 결국 돌보던 배우자를 제 손으로 죽이는 사건은 현실에서 뉴스로 간혹 접한다. 병 든 자의 고통, 돌보는 자의 힘겨움, 나아가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은 무거운 마음이 생명을 끝내는 결론으로 향하게 한다. 2013년 제 10회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 수상작인 <소풍>은 바로 ‘짐’이 되기 싫은 노인의 최후 선택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마른 잎처럼 시들어가는 내 새끼”의 고통을 덜기 위해 늙은 어머니는 이 세상의 소풍을 마친다. 병 든 며느리,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니 어머니를 환자로 꾸며 복지 혜택을 보려는 아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세상을 선악 구도나 보수와 진보의 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내 몸이 아직도 창창하다네. 100살은 넘게 살거라고 그러시대. 100살? 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 않아.”
<우리부모님>, 펠레 포르셰드, 강미란 역, 우리나비, 2014년
복지가 가장 잘 된 나라 중 하나인 스웨덴에는 재택요양 서비스가 제도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그래픽 노블 <우리부모님>은 실제 재택요양 서비스에 종사했던 작가 펠레 포르셰드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인들의 삶을 그렸다. 막연히 생각하는 ‘복지천국 북유럽’의 이미지에서 조금 더 현실을 들여다보면, 늘어나는 노인 인구에 비해 점점 줄어드는 재정적 지원, 서비스의 민영화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들이 있다. 이 작품은 복지선진국이라는 스웨덴의 노인 돌봄 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한다. 짧은 시간에 여러 명의 노인을 돌보다 보면 발생하는 문제들, 돌봄노동자의 고충, 노인의 가족과 도우미 사이의 갈등, 현실과 미디어 사이의 불일치, 가족이 없는 노인의 고독함 등이 아주 담담하게 8편의 이야기에 담겼다.
이 작품 중에서 가장 짧은 ‘점심식사’편은 현실의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도우미는 자신이 돌보는 할머니에게 ‘그저께’ 먹던 만두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데워준다. 만두 때문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할머니는 곧장 먹은 것을 다 토한다. 그때 옆에 틀어놓은 TV에서는 스웨덴의 복지가 얼마나 훌륭한지 방송되고 있다. 할머니는 계속 토하고, 도우미는 7분 후에 시작될 다음 서비스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한다. 할머니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려면 적어도 20분은 걸릴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시간에 쫓기는 노동자인 도우미는 제 시간에 떠난다. 결국 할머니는 구토물이 묻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저녁에 올 도우미를 기다려야 했다.
환자, 도우미, 환자의 가족,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들의 입장이 다각도로 펼쳐지면서 독자들에게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게 만든다. 점심식사를 제때 하지 못한 도우미는 피부병이 심한 할아버지를 욕조에 둔 채 가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돌보던 환자의 죽음을 두고 도우미와 자식들이 서로를 탓한다. 실은 그래서 이 작품의 뒤끝이 그리 말끔하지 않다. 스웨덴의 ‘훌륭한’ 노인복지 제도를 강조하지도 않고, 딱히 명확하게 어떤 대상을 비판하지도 않는다. 여러 관점으로 노인과 그 주변을 살펴보다 보면 궁극에 ‘죽음’ 그 자체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죽음에 가까운 사람을 돌본다는 것이 어떤 관계맺기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8편의 이야기 중 ‘장례식’ 편이 있다. 한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가는 가족들은 망자가 된 가족 때문에 슬프다기보다 ‘슬픈 상황’에 맞게 행동하려 애쓴다. 그들은 가족의 죽음에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다. 차 안에서 흥겨운 음악을 틀었다가 상황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음악을 끈다거나, 좀 더 슬펐으면 좋겠는데 딱히 슬프지 않아 스스로 아쉬워한다. 이때 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나타난 이는 바로 도우미였다. 할아버지를 돌봤던 도우미는 고인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슬퍼하고 유족을 위로하지만 정작 평소에 가까이 지내지 않았던 자식들은 하나의 ‘행사’를 치를 뿐이다. 고인의 유품을 하나도 갖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식들은 죽은 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이었다.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애도를 상실한 관계의 공허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블랙&화이트'를 보면 또 다른 시각이 등장한다. 마지막 장은 죽어가는 사람의 시각에서 끝난다. 나는 이 장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두 번 읽었고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했다. 내게 ‘죽어가는 사람’의 시각이 낯설었던 것이다. 바로 ‘장례식’에서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시각이고 죽기 전 그의 인생이 흑백으로 드문드문 지나간다. 우리는 왜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애정이 없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장례식’ 편에서 “당신 자신하고만 가깝게” 지냈던 아버지의 삶을 발견한다.
모든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수명은 늘었어도 고통과 늙음은 삶에서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늙는다는 것, 늙은 인간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그리고 죽음,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에 대한 고민을 한 보따리 안고 나면 책이 끝난다. 자신하고만 가깝게 지냈던 노인은 마지막 가는 길을 새 도우미가 아니라 익숙한 도우미와 함께 하려 하고 두 자식의 이름을 부른다. 죽어가는 순간 놓지 않으려 한 것은 결국 ‘관계’다.
수명이 길어졌다는 건,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시대임을 뜻할지도 모른다. 늙음은 대부분 병을 동반한다. ‘개인적으로’ 수명이 늘지 않았거늘 돌봄은 여전히 개인의 부양 의무에 의지한다. 복지시설이 갖추어진 나라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한국은 복지라는 제도보다 ‘효’라는 개인적 도리에 더 무게가 실려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의 노후는 더욱 암담하다. 앞으로 내 부모와 나의 마지막 공간이 어디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살던 곳에서 죽고, 함께 살던 사람의 곁에서 죽을 수 있다면 더없이 감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