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격월간지 <민들레> 6월호에 실리는 글입니다.

<민들레>의 허락 하에 이 곳에도 글을 올립니다.


Boy_with_Cherries_Edouard_Manet.jpg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체리를 든 소년 (Gamin aux Cerises)>, 1858년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표정이 잘 어울리는 배우 이나영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등장하는 한 카드광고. 같은 광고의 유해진 편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라고 한다. 가만히 있기, 긍정적인 태도, 바로 이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은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기에 대해 여전히 생각 중이다. 생각하는 인간은 움직이는 인간이다. 신체적 움직임과 사상의 움직임은 ‘운동(movement, 運動)’이라는 같은 단어를 쓴다. 그렇기에 생각하는 인간은 운동하는 인간이며 생각하기와 실천하기는 분리되지 않는다. 움직임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는 자, 곧 생각하는 인간은 반드시 저항한다.


1 누가 생각하는가


관념의 전복, 체제의 변화가 두려운 이들은 생각하는 인간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억압한다. 권력자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예술행위를 재판하여 벌금을 물리고, 정해진 답을 벗어난 출판물을 금지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의 표현은 규범이 되지만 누군가의 표현은 말대꾸, 싸가지 없음, 하극상이다. 툭하면 ‘군기’를 잡고, 특히 나이주의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한국사회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개념은 이미 표현의 권력관계를 규정한다. ‘윗사람’과 토론은 불가능하며 ‘아랫사람’은 그저 말을 들어야 한다. 규범을 만드는 사람과 규범을 지키는 사람은 이렇게 나뉘어져 있다.


현실에서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 있지 않다. 게다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고 어디부터 폭력이 되는가. 이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어와 목적어다. ‘누가’ 표현하는가. ‘무엇을’ 표현하는가. 특히 표현하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표현하는 자의 위치며, 표현의 주체가 표현의 맥락을 완성한다. ‘누가’라는 주어를 괄호 속에 감춘 채 외치는 표현의 자유는 종종 오만한 힘의 과시가 되기 십상이다. 대북삐라 살포는 표현의 자유지만 트위터로 ‘우리민족끼리’를 리트윗한 박정근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정작 자기검열이 필요한 이들은 과도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폭력 행위 : 약자 조롱과 혐오)을 하고 있으며, 표현을 제한받는 이들은 과하게 자기검열에 시달린다. 검열하는 자와 검열당하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자.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와 타인을 심판하는 자가 나눠진 이 규범은 전혀 정의롭지 않다. 이성애의 표현을 동성애자가 심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무엇이 검열 당하는가보다 누가 검열하는가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검열의 대상이 되지 않는 표현에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의 침묵을 담보로 얻을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특정 표현의 독주가 될 뿐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


끔찍한 여성혐오를 배설한 개그맨은 여전히 건재하며 그는 사과조차 개그의 소재거리로 삼아 2차, 3차의 조롱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매체의 파급력으로 따져도 비교가 안 되는데 여성혐오를 뱉어낸 방송은 살아남아도 엄마에 대한 잔인한 표현을 담은 동시집은 전량 폐기되어야 했다.

  

images.jpg



2 어린 인간의 표현할 권리


이 편파적 시스템 속에서 한 초등학생의 시를 두고 ‘잔혹동시’라며 어른들이 유난을 떨고 있다. 일단 ‘잔혹동시’라는 낙인은 시의 세계를 협소하게 가둔다. 한 쪽에서는 시인의 천재성을 운운하지만 이 또한 적절치 않아 보인다. 천재성 유무는 출판의 자유와 무관하다. 시의 문학성과 시인의 천재성은 비판의 영역인데, 현재 ‘잔혹동시’는 문학적 비판 이전에 출판의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천재성이 있는지, 부모의 욕심이 과한지, 또 시에 작품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할 생각도 없거니와 나는 천재를 감별할 능력이 없다. 이 글에서는 ‘어린’ 인간의 시(생각, 표현)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문제적 시선을 다루고 싶다.


10세의 작가가 쓴 동시집 <솔로강아지>가 ‘패륜’이라는 비판까지 들으며 여론에 오르내리자 출판사는 결국 책을 전량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동시를 두고 ‘사탄’까지 운운한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한 ‘부모’들의 생각이 궁금하여 관련 커뮤니티를 탐색하다가 실로 잔혹함이 무엇인지 보고 말았다. 허세, 애어른, 천재성은 개뿔, 작위적, 정신 상담이 필요해...... 모두가 ‘잔혹한’ 인간평론가가 되어 있었다. 시 한 편으로 작자의 10년 인생과 부모와의 관계, 가정환경까지 모두 꿰고 있는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인터넷 속의 가상세계를 빠져 나왔다. ‘시’가 아니라 가십만 난무한 참혹한 결과를 빚었다. 10세 소녀의 무서운 시가 ‘표현의 자유를 넘었다’고 비난을 듣는다면, 이 어린이를 향한 어른들의 무시무시한 공격은 정당한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어른들은 어린 인간을 지적하기만 바쁘다.


인터넷을 통해 시집 <솔로강아지>에 있는 여러 편의 시를 살펴보았다. 꽤 여러 번 엄마에 대한 작자의 시각이 등장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학원 가기 싫은 날, 솔로강아지, 엄마 등) 엄마에 대한 애정을 표하기는커녕 적개심과 두려움을 드러낸다. 작가는 “시는 시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시가 시일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시를 비롯하여 예술 작품이 현실의 도덕교과서는 아니라고 여긴다. 예술은 미와 선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추와 악을 다룰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추와 선악의 개념을 지속적으로 전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름답고 재미있는 예술도 있겠지만 불편한 질문을 꺼내드는 작품도 있기 마련이다. 예술이 아름다움과 유희, 치유를 향한다는 착각은 꽤 견고하다. 그래서 흉하고 더럽고 악하고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표현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예술은 독자를 기분 좋게 만들 의무가 없다.


문제가 된 ‘학원 가기 싫은 날’은 전통적 ‘효’사상에 반하는 표현이며 폭력적인 묘사 때문에 ‘아이답지 않다’는 반응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아이다움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모두가 거쳐 온 세계지만 쉽게 망각 속으로 사라진 세계가 아이의 세계다. 전쟁도 놀이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의 ‘동심’ 속에는 이미 인간세계의 각종 폭력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또한 아이와 엄마의 관계는 그리 평면적이지 않다.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보호자이며 영원한 내 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장 강력하게 구속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엄마”라는 초등학생의 시는 솔직하다. 아이 입장에서 엄마는 규범을 만드는 사람이기에 가장 커다란 저항의 대상이지만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띤다. 효, 형제애, 가족애, 모성애 등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작동하는 일관된 가치라면 그토록 온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강조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3 순수한 마음


모성애에 대한 신화만큼 동심도 어른의 시각으로 발명된 세계다. 어른은 아이에게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를 요구한다. 아이는 어른의 철저한 타자다. 미성년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미(未)’성년일수는 있으나 ‘미(未)’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성인만이 인간 취급을 받는다. 미성년자는 덜 된 인간이고 노인은 너무 낡은 인간이다. 성인 인간을 기준으로 미성년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타자화한다면 노인은 낡고 더러워서 오염된 존재다. 그래서 ‘늙은 여자’는 동화 속에서 주로 마녀로 등장하며 ‘순수’와는 거리가 멀다. 동심을 걱정한다면 오히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수동적 여성상, ‘계모’의 틀을 빌린 여성혐오 등에 대해 인식함이 우선이 아닐까. 어른들은 아이에게 차별적 문법을 고스란히 전달하여 혐오를 배우도록 한다.


순수한 마음이란 강요받지 않은 본래의 마음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순수라는 명목으로 아이의 마음과 역할을 강요한다. 철저한 타자여야 할 아이가 간혹 어른과 별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이면 ‘애늙은이’라고 한다. 우리 관념 속의 순수에는 정답이 있다. 순수는 선함, 깨끗함, 경험 없음, 약함, 순종적인 성격을 띤다. 이는 젊은 여성과 아이에게서 주로 보고자하는 환상이다.


아이와 여성은 보호의 대상일 때 아이답고 여성답다. 보호의 대상이란 다른 말로 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남자 어른을 제외한 인간을 ‘아녀자(아이+여자)’로 아울러 부르듯이 여성은 남자 인간의 타자이며, 어린이는 어른 인간의 타자로서 이들은 ‘나머지 인간’에 속한다. 흔히 결혼해야 어른이라고 하거나 자식을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주장하는 습관도 ‘어린 인간’이라는 타자가 있어야 어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순수의 상징이며 감성의 주체, 비문명의 이미지를 위해 여성은 자연에 비유되며 어린 인간은 자라나는 새싹으로 파릇파릇 생기가 넘쳐야 한다. 특히 ‘소녀’는 여성과 어린 인간이라는 이중의 타자화 속에서 무균질 순수덩어리, 오염되지 않은 청정구역의 판타지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니 환상을 깨는 소녀의 거친 폭력성과 예상을 빗나가는 자기주장은 어른들을 ‘멘붕’으로 이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글이 있다. ‘낯모르는 누이들에게’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은 “소녀들의 대화치고는 너무 거칠고 야한” 이야기를 우연히 제과점에서 들은 스님이 소녀들에게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위해 쓴 글이다. 이 글을 쓴 시점이 1971년이라는 사실이 내 눈에 들어왔다. 10대들의 거친 말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지만 언제나 ‘요즘 애들은’ 더욱 문제아가 된다. 게다가 거칠기로 따지자면 소년의 입과 주먹이 더욱 심각하겠으나 어찌된 노릇인지 법정은 소녀에게만 연설을 한다. “소녀라는 말은 순결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슬기로운 본질을 가꾸는 인생의 앳된 시절을 뜻한다.”며 “우리 춘향이나 심청이한테 배워야 할 거다”라고 한다. 춘향은 정조를 지킨 열녀, 혹은 신분상승에 성공한 여성이며 심청은 목숨을 건 효녀, 혹은 한량 아버지 봉양이 지겨워 자살을 택한 딸이다. 아마도 배우라는 점은 열녀와 효녀의 모습일 테다. 이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소녀다움이며 여성다움이다. 어린 여자일수록 더더욱 남성 어른의 환상에 봉사하기 위해 ‘~다움’을 연기해야 한다.


올해 2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제국의 위안부>의 판매금지 결정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여지가 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란의 배경에는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제한된 정체성이 있다. 조금이라도 ‘자발적’ 성질이 있다면 완벽한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순식간에 ‘더러운 매춘부’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한다. 단발머리 위안부 소녀상이 상징하듯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상상력은 제한되어 있다. 그렇기에 위안부 피해 여성을 ‘순수한 소녀’가 겪은 고통으로만 바라보려는 통념과 다르게 분석한 <제국의 위안부>는 이 사회가 허락할 수 없는 저술이다. 피해자들이 소녀이든, 아줌마든, 설사 돈벌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했든, 제국주의 하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발생한 위안부 제도는 이미 그 자체로 착취이며 폭력이다.


순수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그 순수한 대상의 목소리를 삭제하는 강력한 명목으로 작용한다. 어린 인간을 순수의 결정체로 추켜세우지만 정작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미성년자의 표현을 무시하는 습관은 일상에 만연하다. ‘소녀의 일기장 같은’이라는 상투적인 수사가 그렇다. 유치한 감정과잉의 글을 비하하기 위해 종종 죄 없는 소녀의 일기장을 끌어온다. 하지만 고전이 되어버린 일기장, <안네의 일기>가 바로 소녀의 일기장이다. 게다가 안네의 일기조차 안네 아버지에 의해 성적 호기심이나 바르지 못한 표현, 곧 ‘거칠고 야한’ 내용은 걸러진 채 출판되었다. 미성년자의 생각을 직접 그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불쾌한 예술이 살아남길 원한다. ‘폐기’라는 금지가 금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비판할 기회의 상실, 곧 생각할 자유의 박탈이다. 표현의 잔인함보다 그 표현을 하는 사람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학벌차별은 인종차별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기 그지없다. 이 차별에서 살아남으려고 모두 발버둥치는 중이며, 뒤처짐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 한국 사회를 온통 뒤덮고 있는 ‘시대정신’이다. 햇빛을 보지 못해 비타민D 부족이 심각할 정도로 한국의 소아청소년은 학업에 치여 산다. 어른이 보고 싶은 동심이 아니라, 어른이 들어야 할 어린 인간의 목소리가 더 필요하다. 환상에 빠진 동심이 아닌 실재의 동심은 바로 그 목소리에 있다. 슬프게도, 이번 사건은 결국 목소리 낼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목소리 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들 외에는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표현의 비뚤어진 구조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여성의 장소 file [2]

  • 2016-02-08
  • 조회 수 3387

루이즈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1911~2010), <여성-집 Femme Maison> 연작, 1946~47년   며칠 전 간단한 다과를 준비할 일이 있어서 스타벅스에서 케이터링 서비스로 커피를 구매했다. 나는 그런 서비스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커피를 내려서 보온병에 담아 갈까(보온병이 없네), 인스턴스 커피를 사서 뜨거운 물에 각자 타먹게 할까(인스턴스 커피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냥 주스만 마실까(커피를 찾으면 어떡하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타벅스에 가면 보온이 되는 큰 통에 담아준단다. 오, 그런 좋은 서비스가! 양도...

남성 페미니스트 file [7]

  • 2016-01-13
  • 조회 수 2656

 정희진, ‘남성 페미니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8409.html   뒷북. 진작에 읽었으나 도무지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공감과 비판적 의견이 교차하는 글이라 내 의견을 적어보고 싶었다. 일단 이 글이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 두 가지 유형의 남성 페미니스트를 정리했기에 나도 그 기준에 맞춰 ‘나와 지인들의 경험을 종합해’도 상관없을 것이다.(각자 자신과 제 주변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유형으로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이들과 “자신...

여자의 말 file [4]

  • 2015-12-06
  • 조회 수 1543

  Thomas Gainsborough(1727~1788), <Conversation in a park>, 1746~7년 경 레이놀즈와 함께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화가인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작품이다. 그림 속의 커플은 작가 게인즈버러와 그의 부인 마가렛이며 결혼 기념으로 남긴 그림이다. 당시로서는 풍경과 인물이 함께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졌다는 면에서 새로운 장르 개척이나 다름 없었다. 귀족들의 사적인 일상을 우아하게 보여주는 그의 그림들은 상류층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공원에서의 대화>는 내가 가끔 들여다 보며 홀로 웃는 그림 중 하나다. ‘대화’하는 부부의 모...

윤리적 창작 file [1]

  • 2015-11-13
  • 조회 수 737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 Honoré Fragonard (1732~1806), <La Gimblette (침대 위에서 강아지와 노는 소녀)>, 1770년 경 가슴을 드러내고 아랫도리를 벗은 소녀의 성기를 강아지의 꼬리로 가리고 있다. 그 점 때문에 당시에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서스펜스의 대가’ 히치콕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영화화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원작이 있는 2차 창작물의 경우 본래 그 원작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가 여간 쉽지 않다. ‘성스러운 텍스트’는 더욱 그렇다. 영화 <노아>는 성경을 왜곡하고 ...

<베어, 더 뮤지컬> : 변태, 걸레, 못난이 file

  • 2015-08-26
  • 조회 수 1724

  <베어, 더 뮤지컬>은 처음부터 “우리 중에 변태 있어~”라며 시작한다. ‘파격적 소재’라고 하지만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15년 전 초연했던 작품으로 이제 미국에서는 동성결혼 합법화까지 되었기에 그 파격의 농도는 과거와 다르게 읽힌다. 늘 논란이 동반되기는 하지만, ‘안방’ 극장에서도 작가 김수현이 2010년 동성애를 다룬 적이 있으니 뮤지컬의 소재로 딱히 ‘파격적’이라는 수사까지는 필요 없어 보인다. 단지 동성애를 다룬다는 사실만으로 소재의 신선함을 앞장세우기에 이미 대중문화는 훨씬 앞서있다. 이야기의 얼개는 간단하다...

죽음을 돌보기 file [2]

  • 2015-08-10
  • 조회 수 1641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죽음도 선택할 수 없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안락사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 일까. 다만 무조건 ‘살아있음’이 ‘생명존중’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사방에서 자꾸만 백세시대라고 하는데 참으로 염려스러운 백세시대다. 돈 없고 나이 많고 병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을까.   영국인 호스피스전문 간호사가 안락사를 선택했다. (관련기사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702930.html) 죽음과 죽음에 가까운 사...

‘순수’에 저항하기 : <솔로강아지> 전량 폐기를 보며 file

  • 2015-05-27
  • 조회 수 2155

격월간지 <민들레> 6월호에 실리는 글입니다. <민들레>의 허락 하에 이 곳에도 글을 올립니다.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체리를 든 소년 (Gamin aux Cerises)>, 1858년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표정이 잘 어울리는 배우 이나영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등장하는 한 카드광고. 같은 광고의 유해진 편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라고 한다. 가만히 있기, 긍정적인 태도, 바로 이 시대가 원하는 인...

징계 받은 키스 file [2]

  • 2015-04-24
  • 조회 수 2687

“욕망을 이성애적인 것으로 만들면 ‘여자’와 ‘남자’의 표면적 특질로 이해되는 ‘여성성’과 ‘남성성’ 간의 분명하고 불균형적인 대립이 생산되어야 하고 또 제도화되어야 한다.”   - 주디스 버틀러 / 조현준 역,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년, 116쪽 Camille Félix Bellanger (1853-1923), <Abel>, (1874-1875)   현실 세계의 폭력보다 가상 세계의 연애에 더 당혹감과 분노를 드러내는 경우는 흔하다. 옆집의 가정폭력보다 드라마 속의 ‘불륜’을 더욱 막장으로 바라본다. 또한 영화 속의 ‘야한 장면’을 볼 수 있는 나이와 실제 성관계...

술 마시는 여자

  • 2015-03-31
  • 조회 수 1168

<여자 술꾼>, Pieter de Hooche(1629~1684) 아무런 긴장감 없이 늘어뜨린 왼팔, 편하게 죽 뻗은 다리, 발그레한 볼에 미소를 띤 여자의 얼굴을 보니 벌써 여러 잔 걸친 모양이다. 다음 잔을 위해 옆에서 남자가 술을 따르고 있고 옆에는 나이 든 하녀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창 밖이 훤하다. 여자는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그 무서운 낮술을 마시는 중이다. 바닥에 잠들어있는 강아지에게도 어쩌면 술을 줬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17세기 네덜란드 작가 피에터 드 후흐의 <여자 술꾼>은 순간을 즐...

여성을 연기하기 [1]

  • 2015-03-27
  • 조회 수 1374

 지난 주말 파리 근교에서 ‘국제여성영화제’가 있었다. 해마다 이 즈음이면 열리고 올해로 37번째다. 여성이 제작하고, 감독하고, 여성에 대한 주제로 가득한 이런 영화제를 보면서 왜 ‘남성영화제’는 없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여성부는 있는데 남성부는 없으니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여학생회, 여직원 휴게실, 여성할당제처럼 ‘여성’의 이름으로 호출되는 자리가 많다는 건 ‘특혜’가 아니라, 그만큼 일상에서 여성의 자리가 협소하다는 뜻이다. “헐리우드에서 여자로 사는 건 힘들다”는 리즈 위더스푼의 말대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