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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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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을 보고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 동안 잘 몰랐다는 생각에 빨리 알아서 스스로 이 민망함을 지우자는 조급함도 있었다. 책을 찾아 보니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쓴 옥중수기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가 쓴 평전 <가네코 후미코>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저자가 박열과 후미코 두 사람을 함께 다룬 책이 있었는데 이는 영화 개봉과 비슷한 시점에 출간되었다. 평전과 함께 옥중수기를 읽으려고 보니 옥중수기가 무려 세 종류였다. 이 중 두 종류는 영화보다 한참 전인 2012년 출간되었다. 어떤 책을 고를까 살펴 보다가 나는 제목이 더 마음에 드는 쪽을 선택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책을 다 읽고 보니 이 제목이 역시 가장 잘 어울린다. “나도 결코 내가 꼬여 있지 않다고도, 뒤틀려 있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겠다. 사실 나는 꼬여 있었다. 또한 뒤틀려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비뚤어지게 했는지.”(158)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통해 현재를 설명한다. 주말에 후딱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의 삶이 너무 가혹하여 짧은 문장 사이에서 긴 호흡이 필요했다.

가네코의 어머니는 억척 어멈은 아니라 계속 남자를 찾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1900년대에 여자가 혼자 자식 기르며 생활하기 어려우니 남자를 계속 찾고, 주변에서도 남자를 계속 소개한다. 그러나 나아지는 것은 전혀없다. 이 남자들은 식모와 유모가 필요해서 재혼을 하거나 후처를 찾을 뿐이다. 자신의 처제와 바람나서 자식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네코 어머니가 만난 남성들은 하나같이 무책임하고 무능력에 불성실하기 짝이 없다. 술과 노름은 기본이고 폭력적이다. 가네코의 아버지는 가부장의 권위는 가지려 하지만 자식을 끝까지 호적에 올리지도 않아 가네코와 그의 동생은 모두 무적자였다. 법적으로 이 세상에 없는 사람. 한국과 비슷한 점, 바로 가문과 체면, 조상을 중시 여기는 일본에서 1900년대 무적자란 천하고도 천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이로 인해 가네코는 온갖 멸시와 구박을 받는다. 가네코는 결국 외조부의 호적에 막냇딸로 오르고, 남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모가 자신의 사생아로 호적에 올린다. 가네코는 어머니 쪽의 성이다.

가네코는 자신이 학대받은 경험을 기록하며 가장 대표적이며 가장 잔혹한 구박의 기록은 아니다. 나는 일부러 그것은 쓰지 않았다.”(158)라고 한다. ““그것은 당신의 성격이 꼬이고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할머니가 아무리 냉혹하다 해도 설마 그 정도일 리는 없어.”라는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158)이라고 한다. 그럴 리 없어, 그런 사람 못 봤어, 너가 너무 지나친 거 아냐?....... 이처럼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가네코가 조선에서 고모와 할머니 집에서 보낸 7년은 혹독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처음에는 가네코를 가난에서 구제해서 교육도 받게 할 것처럼 데려갔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툭하면 가두고, 내쫓고, 굶기고, 온갖 일을 부려먹고, 구타했다. 학대와 배고픔 속에서 가네코가 자신과 동일시한 대상은 마당에서 떨고 있는 개나 일본인에게 핍박받는 조선인이었다. 그의 조선 생활 중 따뜻한 말로 밥이라도 한 끼 챙겨주려 한 사람은 조선인 아줌마였다. 밥 먹었냐는 말 한마디에 가네코는 울음이 터진다. 부모를 비롯하여 핏줄,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 내에서 제대로 돌봄받지 못한 그가 민족이나 국가를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오자 가네코의 아버지는 자신의 처남이자 가네코의 외삼촌이 상속받을 재산을 노려 가네코를 외삼촌과 혼인시킬 계획까지 세운다. 외삼촌 또한 처녀와 살기 위해 자신의 조카를 아내(라는 이름의 식모)로 만들려 한다. 두 남자 사이의 조약은 가네코가 또래 남성과 연애를 하면서 깨졌고, 아버지는 가네코에게 화냥년이라 욕을 퍼부으며 구타한다.

가네코가 아버지를 벗어나 도쿄에 와서 연애한 남자들은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그를 노리개삼았다. 임신 따위 걱정 안 하는 일본인 남자친구, 같이 살자더니 조선으로 튀어버린 조선 유학생.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노리개였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335) 가네코는 도쿄에서 식모살이, 노점 등을 거치며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치지만 끼니를 때우기도 버겁다. 수많은 상처를 안고 나 자신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 이것은 하쓰요 상을 알게 되면서 하쓰요 상이 내게 읽게 해준 책들의 감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하쓰요 상 그 자신의 성격이나 일상생활에 자극을 받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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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코가 자기 인생에 단 한명의 여성이라 말한 니야마 하쓰요는 그의 지적 성장에서 중요한 영향을 준 친구다. “<노동자 세이로프>를 감격에 겨워 나에게 권한 것도 하쓰요 상이었다. <죽음의 전야>를 빌려준 것도 하쓰요 상이었다. 베르그손이나 스펜서나 헤겔 등의 사상 일반을, 혹은 적어도 이름이라도 알게 해준 사람이 하쓰요 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나의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하쓰요 상이 갖고 있던 니힐리스틱한 사상가들의 사상이었다.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331) 니야마 하쓰요는 결핵으로 후미코가 이 수기를 쓸 때 옥중에서 이미 죽었다. (영화 <박열>에서 폐병 환자로 나오는 여성이다)

짧은 생을 꼼꼼히 기록한 그의 수기는 한 개인의 인생이며 조선과 일본의 미시사다. 그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경험한 장날의 풍경이나 철도 건설로 인해 변화하는 사람들의 일상, 당시 교육제도 등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일본의 시골에 머물던 시절을 기록하며 '도시가 어떻게 시골을 착취하는지'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시각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체면에 억눌린 사람들의 모습에 몸서리쳤다. 무책임한 이들의 체면 타령.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는 그런 사회에서 나 개인에 대한 존엄함을 잃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분투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조국을 버리고 사랑하는 남자와 뜻을 함께한 여자로 가네코를 소개하는 방식은 성차별적이다. 조국을 버리고 남자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와 뜻이 맞는 남자를 만난 것이다. 게다가박열의 연인은 그의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다. ‘ ~의 여자라는 시각에 갇혀서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아주 편협하게 그릴 수 있으며 대부분 여성의 삶이 이러한 편협한 틀에서 기록된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한 개인을 떠나 20세기 초에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성장한 여성의 기록이 그 자체로 너무도 귀하다.


댓글 '3'

2017.10.17 09:02:05

이런 걸 보면 결국 여자에게 국가는 없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침112

2017.11.07 09:29:2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018.05.30 02:35:32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여성 또한 ~의 연인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역사가 기록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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