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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관습, 인식의 재구성을 위하여.

부천문화재단에서 일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글을 씁니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 관련 주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나는 몰랐다

조회 수 4044 추천 수 0 2016.10.28 1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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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게 하는 신사>, The Irritating Gentleman,  Berthold Woltze, 1874


벌써 십 수년 전이다. 나와 업무상 메일만 1년 가량 주고받다가 어떤 행사 자리에서 서로 얼굴을 보게 된 한 시인이 있다. 나를 만난 그날, 그 시인은 나의 선배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젊은 여자를 봤더니 가슴이 너무 뛰어서 집에 가는 길에 약 사먹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까. 그 선배가 내게 직접 면전에서 전해줬기 때문이다. 히히 웃으면서, “집에 가는 길에 약 사먹었대라고 내게 친절히 전해줬다. 많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이러한 징후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나는 알아챈징후를 누군가는 몰랐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시인은 몇 년 후 전화와 메일로 나를 괴롭혔다. 만나달라고. 기억하는 입장은 대체로 말을 소화시키지 못한 사람이다. 말이 몸에 남아있는 사람들.

성범죄를 비롯하여 성차별적 사건이 벌어졌을 때 관련 인물이나 주변에서 나는 몰랐다는 말, 어느 정도 진실일 수 있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설사 가족이라도 모든 문제를 다 알 수 없으니까. 그러나 바로 그 모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왜 모르는가, 왜 몰라도 되었는가, 왜 듣지 못했는가, 왜 보지 못했는가, 생각해야 한다. 평소에 여성 앞에서 온갖 아는 척을 하지만 정작 여성이 일상적으로 입는 피해에 대해서는 너무도 깔끔하게 모른다’. 그렇게 모르고도 그토록 많은 말을 하며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이 바로 권력이다.

모르는사람들이 말을 너무 많이 한다. 나는 이렇게 모르는사람들에게 질리고 질려서 갖은 환멸과 지겨움의 순간을 수도 없이 겪어왔는데, 그 와중에도 감정적인 여자라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수많은 그들이 모르는 동안 내가 알아온 세계에 대해. 비열한 폭력이 순수한 사내의 욕정으로 둔갑하여 여자의 인권보다 더 관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사회에 대해.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존중하지 않음을 이성적인 남성의 태도로 포장하는 그 대단한 착각에 대해. ‘객관적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정작 자신의 꼴을 볼 줄 모르고 언제나 판관의 자리로 기어 올라가는 그 고질적 태도에 대해.

백번 양보해서 이제라도알면 다행이다. 몰랐던 세계를 알려고 하는 사람과 여전히 몰라도 아는 척 하려는 사람 사이에는 전혀 다른 미래가 존재한다. 이제라도 알게 되는 사람은 몰랐던과거는 있을지라도 알게 되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모름의 현재진행 상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른 세계를 알 수 없다.

트럼프가 지난 3TV토론에서 나보다 더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한 말도 진심일 수 있다. 여성을 존중한다는 그는 몇 분 후에 힐러리를 향해 추잡한 여자such a nasty woman”라는 말을 뱉어서 또 하나의 유행어를 만들어버렸다. 그는 2차 토론에서도 힐러리가 발언하는 동안 힐러리 주변을 맴돌며 거슬리는 행동을 했다. 이에 대해 Vox에서 고의성은 없어 보인다는 분석이 나왔는데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는 그저 살던대로 했을 뿐이고 그 동안 살아오면서 감히그에게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그는 뭐가 문제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몰라도 되니까. 정치만 하지 않았다면 들키지 않고 잘 살았을테니까. 과거의 젠틀맨이 왜 이제는 성추행범취급을 받는지 억울해 하며 아마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원통해 할지도.

모름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단지 지식이 없는 상태와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상태. 알기를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물론 정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아가 누군가의 앎을 묵살한다. 오늘의 모름은 수많은 묵살을 딛고 만들어진 결과다. 각각 다른 사건이지만, 일상의 성범죄부터 현재 정치권의 수많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는 '나는 몰랐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갑자기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갔는지 온통 몰랐다는 사람 투성이다. 몰랐던 당신은 그 동안 어떤 말을 해왔는가. 생각하길 바란다. 몰랐던 당신이 그 동안 묵살했던 많은 말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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