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최대 232만명이 모이고, 심지어 횃불로 타올랐던 촛불은 잠시 소강상태다. 탄핵소추안 의결을 앞두고 주저하던 의회를 가결로 이끈 것은 오롯이 촛불과 촛불을 응원하는 시민의 힘이었다. 의회가 상황논리를 대며 망설일 때마다 시민들은 압도적 숫자로 의회를 압박했다. 촛불은 이제 헌법재판소에 맡겨둔 대통령에 대한 제도적 파면권이 어떻게 행사될지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권한이 오용될 경우, 제도적 파면권은 대통령이 아니라 헌재를 향할지도 모른다.
소강상태인 촛불이 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다는 까닭은 2016년 촛불이 낳은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단계적 승리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촛불은 2002년부터 사회의 분노가 응집될 때마다 가끔 타올랐지만, 한 번도 제도적 승리의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 권력은 잠시 움츠렸다 여전히 구태의연한 모습을 이어갔고, 촛불은 변치 않는 권력에 지쳐 곧 잦아 들었다. 이후에 찾아온 건 냉소였다. 불신이 커졌고 혐오가 창궐했다. 불신은 시스템과 지성을 향했고, 혐오는 여성이나 동성애자, 이주 노동자나 탈북자 같은 성적·사회적 소수자를 대상으로 삼았다. 불신과 혐오가 정치 전반으로 확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의 촛불은 탄생 14년 만에 처음으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뒀다. 분노는 소진되지 않은 채 유증기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다. 이 단계적 승리를 소멸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유증기는 폭발하고 말 것이다.
2016년 촛불은 두 가지 특징을 보였다. 먼저 분산형 발언망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촛불이 일어난 전국 어디에서든 자유발언대가 열렸다. 특히 백만명 이상이 모인 광화문광장에선 자유발언대가 산발적인 장소에서 열렸다. 자유발언대는 하나의 중앙을 형성하지 않았다. 어떤 공간이든 들어줄 사람들이 있으면, 그곳이 무대가 됐든 거리가 됐든 자유발언대가 열렸다. 그것은 나와 나의 친구들이 중심이 되어 n개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SNS라는 공간처럼, 발언자를 중심으로 소리가 닿는 범위 속 청중들을 묶어 n개의 발언망을 형성했다. SNS가 없었던 2008년 촛불과 다른 모습이다.
2016년의 촛불은 1인 방송을 광장에서 재현하기도 했다. n개의 발언망에서 모두가 한 명의 주체로 발언대에 섰다. 신분도, 성별도, 계급도, 학력도 발언권에 관여할 수 없었다. 한 철학자는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발언대에 서려 했다가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무대에 선 발언자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느낀 정부와 사회의 문제에 대해 발언했고, 자주 박수를 받았으며, 때로는 소수자를 멸시하는 비유를 쓰다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것은 1인 방송을 통해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자주 말풍선이나 좋아요를 받으며, 때로는 말의 내용에 따라 가혹한 비판을 받기도 하는 모습과 유사했다. 말은 그렇게 SNS와 1인 방송의 형식을 빌어 현실 속 광장을 유기체처럼 떠돌았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최근 몇년 동안 말의 정치가 소거된 세상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말을 불신했다. 말은 자주 위선으로 규정됐다. 지식인과 언론의 말은 내용보다 의도를 의심받았다. 이런 사회에서 말로 하나의 온전한 문장조차 구성해서 전달하지 못하는 이가 최고 권력자가 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하지만 그 절차 이후 4년 동안 벌어진 상황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참혹했다. 그 최고 권력자가 낳은 참혹한 상황이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복원하는 계기가 된 건 어찌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2016년의 촛불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이것은 촛불이 어떤 대단한 봉기와 즉자적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촛불시위가 매일 일어날 수도 없다. 혁명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단계적 승리가 권력자를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고 노동과 사회문화 속 일상의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일상의 싸움에서 소소한 승리를 확산할 수 있다면, 언젠가 혁명은 불현듯 우리 곁에 와 있을지 모른다. 삶은 그렇게 진보한다.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완해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