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2015년 3월15일. 갓 중학교에 입학한 13살 소녀가 집에서 뛰쳐나왔다. 종아리와 손에 멍이 들어 있었다. 친구가 이유를 물었다. 소녀는 “어제 부모한테 많이 맞았다”고 말했다. 소녀가 중학교에 등교한 건 겨우 8일. 의지할만한 관계가 생길 겨를이 없었다. 이튿날 소녀가 찾아간 사람은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교사였다. 소녀의 친구는 “딱히 갈 데가 없어서 찾아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교사는 다시 소녀의 부모를 선택했다. 폭력을 당해 집에서 뛰쳐나온 소녀를 달래 집으로 돌려보냈다.
3월17일. 소녀의 아버지는 오전 7시부터 5시간 동안 소녀를 때렸다. 빗자루와 빨래건조대 쇠봉으로 때렸다. 목사인 소녀의 아버지는 이 행위를 두고 “가족이 부둥켜안고 (가출에 대해) 울며 참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오후 7시, 소녀는 숨진 채 발견됐다. 부모는 숨진 딸을 이불로 덮고 향초와 방향제, 습기제거제를 놓아뒀다. 부패방지용 염화칼슘을 뿌렸다. “기도하면 아이가 살아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3월31일에는 딸이 가출했다고 경찰에 거짓 신고했다.
많은 이들이 목사 아버지의 ‘이중적 면모’에 분노했다. 소녀를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방치하고, 경찰에 태연히 가출 신고까지 한 점이 공분을 자아냈다. 현장 검증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람의 탈을 쓰고 부모가 어떻게 자식한테…”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아동 학대치사 혐의보다 살인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학교와 교육 당국의 장기결석 아동 관리 부실 문제도 제기됐다. 11개월 동안 결석한 소녀를 두고 학교는 “도벽이 있어 훈육중”이라거나 “가출했다”는 아버지의 말만 믿고 ‘출석 독려문’만 세 차례 보냈다. 한 번도 아이가 유기된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학교는 교육청에 소녀의 장기결석을 통보하는 법적 의무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사회적 비난은 소녀가 숨진 이후의 대응에 집중됐다. 아버지의 폭행에도 분노했지만, 무엇보다 부모가 시신을 11개월 동안 방치하며 옆방에서 생활했다는 사실, 거짓으로 가출 신고를 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이 더 많이 쏟아졌다. 학교와 교육 당국에 대한 비판도 그랬다. 장기결석 아동 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문제만 지적됐다. 누구도 소녀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왜 그렇게 죽임을 당했어야 했는지 묻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 사회가 이 가족을 재빨리 ‘비정상’의 영역으로 배제한 뒤 그 비정상성을 사태 판단의 우선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 가족이 재혼 가정이고, 엄마가 계모이기 때문에 세 자매 양육을 부담스러워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사람들은 이 보도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왜 폭력이 일어났는지 알겠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2014년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의 통계를 보면, 아동학대 가해자 가운데 81.8%는 친부모다. 지난 10년 동안 신고된 아동학대 사건 피해자의 가족 형태를 보면, 친부모 가족인 경우가 평균 30%, 친부모가족 이외의 형태인 경우가 평균 63%여서, 친부모 가족보다 그 외의 가족 형태에서 폭력 발생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10년 동안의 추이를 보면, 친부모 가족에서 발생하는 아동학대가 10년 사이 2.7배 증가했다. 친부모가족 외 가족은 1.3배 증가에 그쳤다. 게다가 아동 학대는 재혼 가정(9%)보다 초혼 가정에서 발생하는 비율(38.5%)이 훨씬 높다. 최근 뉴스로 쏟아지는 아동학대 사망사건도 대부분 친부모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다. 재혼 가족이라는 가족 형태가 아동학대와 폭력 발생을 설명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게다가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과정에도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작동했다. 소녀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가족 외부의 도피 공간을 애타게 찾았지만, 이 외부자(초등학교 담임교사)는 소녀를 다시 가족에게 돌려 보냈다. 이건 비단 이 교사의 잘못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공간이다. 양육이 오롯이 부모의 몫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사회가 함께 양육한다는 윤리와 이를 뒷받침할 제도가 공유되어 있다면, 그 교사 역시 가족의 폭력 속에 소녀를 돌려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부모니까…’라는 인식 속에 사회적 책임을 방임한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가족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이미 외부 사회 이상으로 잔혹하게 해체되고 파편화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드라마에선 삼대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일상처럼 그려지고, 언론은 부모가 아이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사건을 두고 아동 살해 사건이 아니라 ‘동반 자살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래도 여전히 폭력 부모에게 손가락질만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완해서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