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파산관재인’이라는 말이 있다. 파산한 기관이나 법인, 기업이나 개인의 채권을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역할을 주로 하는 사람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회사가 망했을 때 남은 돈을 찾아내서 이 회사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나눠주는 역할을 한다. 법원이 지정하는데, 주로 변호사가 선임된다.
2017년 3월28일.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문재인 전 더불이민주당 대표가 변호사 시절 세월호 실소유주인 세모의 파산관재인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 공적 자금이 들어간 유병언의 업체에 1153억원 채무 탕감을 해줬다. 그래서 유병언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가 파면되고 세월호가 인양되면서 다시 나오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을 문재인 전 대표에게 돌려보려는 의도다.
자유한국당도 호응했다. 김성원 대변인이 29일 공식 논평을 내고 홍 지사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알고 보니 문 전 대표가 온 국민을 비통에 빠뜨린 세월호 사건의 숨은 주역”이라는 주장도 더했다.
1994년 12월. 신세계그룹은 한일투자금융을 사들여 신세계종합금융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신세계종금은 3년 뒤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면서 파산했다. 법원은 변호사 문재인을 파산관재인으로 지정했다. 파산관재인 문재인은 2002년 1월 유병언 세모 회장 등을 상대로 대여금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통해 신세계종금이 세모 쪽에 빌려준 돈을 받으면, 파산관재인 문재인은 신세계종금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에게 이 돈을 나눠줄 수 있게 된다. 법원은 2002년 10월 “유병언 회장 등이 신세계종금에 약 44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이 있고 2달 뒤 정치인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문재인 변호사는 곧 청와대 민정수석이 된다.
홍준표와 자유한국당은 틀렸다. 문재인은 세모가 아니라 오히려 세모에 돈을 빌려준 신세계종금의 파산관재인이었다. 게다가 세모의 채무 1153억원을 탕감해준 건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법원이었다. 홍준표 도지사는 곧 “착오”라고 해명했지만, 자유한국당은 되레 “그래도 문제”라고 뻗댔다.
2015년 7월20일.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에서 유병언의 미국 재산환수가 이뤄지지 않은 건 문재인 전 대표 때문이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신세계종금 파산관재인 문재인이 법원의 승소 판결을 받고도 유병언의 미국 재산 환수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문재인이 승소 석달 뒤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사회자 장성민은 방송에서 “세월호 침몰 관련, 유병언 사건이 그 난리를 칠 때 문재인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이 단 한 마디도 유병언의 부패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혹시 어디 있을까”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시민들의 분노가 정부를 향하자, 정확하게 1주일이 지난 시점부터 조선일보는 유병언과 세모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당시 문재인 전 대표와 야당이 이 프레임에 동조할 이유가 없다. 방송은 굳이 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넉달 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장성민의 시사탱크’에 주의 조처를 내렸다.
다시 2017년 3월28일. 장성민은 ‘시사탱크’에서 말했던 의혹을 다시 동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고, 미디어워치는 3월31일 “문재인이 유병언 관련 회사의 파산관재인을 맡았다”는 홍준표의 틀린 주장을 또 기사로 쓰며 동영상을 홍보했다.
무한반복이다. 누군가는 사실과 다른 폭로를 하고, 다른 누군가는 틀린 사실을 바로잡는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폭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복된다. 결국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 폭로는 마침내 사실이 된다. 모두가 사실과 관계없이 말의 의도를 의심하고, 저 말을 한 사람이 그 말로 어떤 이익을 얻을까 주목한다. 언론과 지식인도 이 무한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듣고 싶은 말은 팩트와 정론이 되고, 듣기 싫은 말은 기계적 중립이라거나 정치적 의도가 담겼다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기도 한다. 작은 실수는 거대한 음모로 변질되고, 정작 글이 가리키는 지향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공간에 정치적 지향은 설 자리가 없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상대를 짓밟고 올라서는 승리자만이 ‘사실’을 장악한다. 이런 정치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한겨레 21 기고를 보완해서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