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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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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누더기가 된 채 제정된 걸 두고 분노만 하지 말고 현장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자체가 원래부터 효능감이 적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현장에서 대안을 찾는 것, 중요하다. 그런데 그건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굳이 어떤 것이 더 우선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병행해서 논의해봐야할 문제다. 무엇을 하지 말고 저것에 집중하자는 차원의 문제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또 다른 병행 쟁점 중 하나는 정부의 적극 행정이다. 노동부는 201812월 김용균씨 사망사고 이후 사회적 여론이 들끓자 20197월부터 안전보건공단과 함께 매일순찰(패트롤) 점검반을 운영해 추락 등으로 산재 사망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건설업계부터 소규모 건설 현장까지 꼼꼼히 점검했다. 감독 대상도 늘렸다. 이 결과 2019년 한해 산재사고 사망자 수는 정부가 관련 통계를 작성한 1999년 이후 가장 큰 폭인 11.9%(116)가 줄어 처음으로 800명대에 들어섰다.

그런데 노동부는 이런 '특별' 점검을 일상화하지 않았다. 산재 예방을 위해 산업안전감독관 수를 늘리고 이들의 권한과 책무를 강화하는 등의 조처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일까. 아직 발표가 나오진 않았지만, 노동부에서마저 지난해 산재사망 사고가 다시 소폭 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단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만으로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정부가 '특별' 점검을 일상화할 수 있도록 계속 사회적으로 압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매일 최소 5.6명이 죽어나가는 현실을 제어할 수 없다. 정부라는 조직은 그런 '선의'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는 특별법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누적된 현실적 한계 속에서 쥐어짜듯 튀어나온 것이고, 누더기가 된 법에 사람들이 그렇게나 분노한 것이다.

효능감이 적을 것이라고? 법 적용을 해보지 않은 이상 누구도 그런 예측을 쉽게 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116일부터 시행된 개정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범죄의 양형기준 설정 범위를 늘리고, 형량도 높인 수정안을 전체회의에서 의결했다. 사업주의 안전·보건 조처 의무 위반으로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 최대 징역 106개월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됐는데, 산안법의 이 양형 기준은 1년 뒤 시행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도 참고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결과가 그냥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시민들이 산재에 애끓어 하고, 분노한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법은 대체로 가진 자를 위해 움직이지만, 그래도 사회적 여론을 외면한 채 그들만의 리그로만 운영되지는 않는다. 어떤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분노할 수 있을 때까지 분노해야, 법이 이만큼이라도 꿈틀한다. 이런데도 분노하지 말고 냉정해지자는 말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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