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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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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겨레>가 연재한 기획 시리즈 ‘조국, 그 이후’의 두 번째 기사 ‘다시 문제는 불평등이다’는 ‘조국 사태’를 계기로 불평등을 보는 관점이 바뀌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최상위 1%를 대상으로 나머지 99%가 연대해 분노를 표출해온 ‘1% 대 99%’ 담론이 ‘20% 대 80%’ 담론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와 정치철학자 매슈 스튜어트의 <부당세습>에 담긴 생각을 빌린 ‘20 대 80’ 담론은 정의와 공정을 거론하며 하위 80%와 함께 최상위 1%를 비판하던 상위 20%가 실은 불평등한 세상을 만든 공범이라는 점을 고발한다. 재벌 기업의 경영권을 자식에게 상속하며 성벽을 쌓아 올리는 최상위 1%와 달리 상위 20%는 하위 80%와 공존하는 삶을 사는 듯하면서도 학벌에 기반한 인적 관계, 문화적 취향이나 석·박사 학위 등과 같은 문화자본, 금융시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어떻게든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있다.

상위 20%는 우월적 지위를 대물림하면서도 불평등한 세상을 만든 책임을 피해왔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능력주의는 ‘능력이 우월할수록 더 많은 몫을 가지고 능력이 열등할수록 더 적은 몫을 가지는 것이 당연시되며, 능력이 열등한 이가 능력이 우월한 이와 같은 몫을 가진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저해하는 비효율이자 부정의한 사태로 강하게 비난받는’(박권일, ‘한국 능력주의의 형성과 그 비판’, 2017) 이데올로기다. 대학 본교와 분교가 통합하면 ‘열등한 분교생들이 학벌을 세탁하게 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자 ‘무기충’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며, 수능 평균 3등급의 성적으로 연세대 의대에 합격한 학생을 두고 “3등급에게는 수술 안 받겠다”고 비아냥대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능력주의가 한국 사회 전 계층에 내면화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종과 성적 지향, 출신 지역과 장애 등의 정체성을 두고 차별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는 상위 20%의 모습도 이들의 면책에 한몫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에 앞장선다는 것은 차별 문제 따위엔 관심 없는 최상위 1%나 그런 차별이 없으면 곧 사회가 붕괴할 것처럼 봉기하는 보수 기득권과 자신을 확연히 구별 지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하위 80%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유용하다. 그렇다고 해서 상위 20%가 차별 없는 사회를 원하는 건 아니다. 이들은 그런 사회에서 성장과 발전의 동력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상위 20%는 똑똑함과 근면 성실함, 전문성과 시험 등급 등으로 사람을 차등 대우하는 것은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정당한 차별이라고 말한다. 누구보다 앞장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이들이 사람을 차별하는 비민주적 행태에 정당성을 주장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위 20%에게 불평등한 세상을 만든 책임을 묻기 위해선 능력주의에 기반한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 담론을 꺼낼 필요가 있다. 패배하더라도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결과의 평등을 위한 단초가 된다. 2017년 별세한 경제학자 앤서니 앳킨슨은 저서 <불평등을 넘어>에서 결과의 평등을 위한 15가지 해결책을 제안했다. 앳킨슨은 기본소득과 함께 모두에게 1만파운드(한화 1517만여원) 상당의 ‘기본 자본’을 보장할 것, 개인 소득세의 누진율을 높이고 누진적인 재산세 등의 보유세를 도입하며 상속세는 평생에 걸쳐 누진적으로 과세할 것, 상당한 금액의 ‘자녀 수당’을 지급하되 여기에도 누진적으로 세금을 물릴 것 등을 주장했다. 게다가 정부가 기술 진보의 주도권을 쥐고 생산성 증가 속도에 구애받지 않은 채 공공부문의 고용을 계속 유지하라는 제안도 함께 했다.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를 두고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말한, 상위 20%임이 분명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곱씹어 삼켜야 할 제안 아닐까.

*<한겨레>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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