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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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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성애자 남성이다. 43년 동안 살면서 나의 성 정체성이 무시나 배제의 동인이 된 적은 없다. 나의 성 정체성을 두고 누군가 특이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 적도 없고, 특정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네가 그걸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도 없으며, “왜 우리가 쟤네를 특별대우 해야 하느냐”는 말에서 ‘쟤네’의 자리에 서본 적도 없다. 그런 무경험은 그 자체로 특권이다. 특권의 존재는 내게 최소한 사회적 다수자임을 인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책임을 부여한다.

나는 말기신부전 투석환자다. 5년3개월째, 일주일에 세번 혈액투석을 받는다. 국가가 인정한 중증 장애인이다. 그런데 다소 어두운 피부색과 혈관이 굵게 불거져 나온 왼팔을 빼면 겉모습으로 별다른 차이를 알 수 없다. 그래선지 어떤 권리를 행사할 때, 나는 투석환자이자 중증 장애인인 나의 정체성을 굳이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인다. 한번은 투석 이튿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빈혈 증세 탓에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어떤 노인 승객에게 큰소리로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 상황에 놓일 때, 나는 정체성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 그 자체로 내가 사회적 소수자임을 직감한다.

“그 누구도 항상 사회적 다수자일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항상 소수자인 것은 아니다. 사람 모두는 소수인 측면과 다수인 측면을 다층적으로 쌓아나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간다. 자신을 늘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약자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을 늘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면에서는 강자일 수도 있음을 잊고, 다른 약자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숙명여대에 합격한 22살 성전환 여성 ㄱ씨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온갖 혐오에 부딪혀 입학 의지를 꺾었다. 저 글은 ㄱ씨가 입학을 포기한 날 자신의 온라인 일기장에 남긴 문장이다. 그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성소수자이지만, “전철역 계단 앞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을 때는 비장애인 다수자라고 말한다. 저 문장은 어떤 인간이든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뤄져 있지 않고,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는 명제를 증명한다. 인간은 다층적이면서 유동적인 존재다. 교차하는 정체성에 대한 성찰은 각자도생의 정글에서 탈피해 연대하는 인간으로서 진정한 주체를 찾아가는 도구다.

ㄱ씨를 두고 온갖 혐오표현을 쏟아낸 자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명제를 부정했다. 이들은 크게 두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왜 트랜스젠더가 우리의 이익과 권리를 빼앗느냐는 주장이다. “인간들이 비둘기가 되고 싶어 하는 현 상황에 ‘비둘기를 빼앗겼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는 숙명여대 비둘기학회의 성명, “왜 남녀공학이 아니라 굳이 여대에 입학하려고 하느냐”는 말에 그런 주장이 담겼다. 이 말들은 “남녀가 평등한 세상인데 왜 여대가 필요하냐”라거나 “여대의 존재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어떤 남성들의 언어와 닮았다. 자신을 각자도생으로 내몬 지배 체제가 아니라 소수자의 약한 고리를 분노 표출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언어는 급진(래디컬)이 아니라 일베적이다.

다른 하나는 안전을 위해 여성들만의 공간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ㄱ씨의 입학 반대를 두고 “혐오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저 여성들의 안전한 공간을 지키기를 원할 뿐”이라는 서울 6개 여대 21개 단체의 성명에 그런 주장이 담겼다. 이 말은 “나는 프랑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는가? 바로 난민”이라고 말하는 프랑스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의 언어와 닮았다. 특정한 소수자의 안전을 위해 또 다른 소수자를 위험한 존재로 만들어 배제하는 행위로 결집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언어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극우 포퓰리즘이다.

급진은 지배 체제의 익숙한 관념을 해체하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체제에 저항해 체제에 동화한 내부자들을 한껏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은 체제나 내부자들을 불편하게 하기보다 자신들 옆에서 체제의 익숙한 관념에 틈을 만들려던 또 다른 소수자의 급진적 상상력을 추방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것은 급진이 아니라 지배 선망에 불과하다. 그러니 차라리 이들을 ‘래디컬 페미니즘’보다 ‘르페니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한겨레>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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