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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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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한겨레>가 연재한 기획 시리즈 ‘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은 청년 기획이지만 청년 기획이 아니다. 이 기획은 평소 언론을 통해 서울 4년제 대학생, 특히 ‘스카이’(SKY) 대학생의 목소리가 과잉대표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한국의 청년이 100명뿐이라고 가정하고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지역과 성비, 학력과 학벌 등을 고려해 분류해봤더니, 서울 4년제 대학생은 16명, 스카이 대학생은 단 2명에 불과했다. 이에 평소 과소대표됐던 84명의 비서울 대학생과 전문대생, 고졸자 등을 전국에서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두 가지 인상적인 목소리가 포착됐다.

이들은 ‘조국 사태’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불공정함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대체로 분노하지 않았다. “분노해봤자 바뀌는 게 없다”는, 체념에 기반한 냉소였다. 이들은 또 사회경제적 성공보다는 건강이나 경제적 안정, 가족 등을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는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사회의 지원 체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가족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각자도생과 자력구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청년들만의 일이 아니다. 사회가 청년이라는 세대보다 배제된 ‘84%’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한국 정치는 이번에도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모두 벗어던지지 못한 채 2010년대를 마감한다. 지난 27일 국회를 통과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소선거구-단순다수대표제’로 대표되는 양당제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데 그쳤다. 비례대표는 한 석도 늘리지 못했고, 연동형 비례대표 적용 의석에는 거대 양당을 보호하기 위한 ‘캡’까지 씌웠다. 석패율제 도입이 좌절되는 과정에선 일부 수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정당 배반 투표가 없으면 자유한국당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노골화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결과를 통해 한국 정치가 던진 메시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은 여전히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선거법 개정에도 단순다수 표를 얻은 정치인만이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 체제는 꿈쩍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거법을 바꾸면서 보호해야 할 대상을 소수 정당이 아니라 거대 양당으로 두는 소극까지 연출했다. 다른 하나는,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에서 파생된 정치적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민주세력과 진보 정치가 여전히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의 안티테제로 존재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보수 정치가 여전히 박근혜의 무능을 반복하며 그의 정치적 유산을 양도받겠다는 이들로 가득한데도, 그들과 공생하는 정치 체계를 혁파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정의당 등 진보정당은 선거법의 제도적 변화에만 매몰돼 개정 이후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제를 전면화하는 데 실패했다.

박근혜 탄핵 촛불 때 광장 안팎을 지배한 목소리는 무너진 나라를 정상국가로 복원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복원을 넘어 한국 정치를 근원적으로 뒤집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분명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 집중 폐해, 사회경제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지역 기반 거대 양당 중심 의회 정치를 바꿀 때라는 목소리였다. 1987년 만들어진 헌법을 바꾸자는 말까지 나온 까닭이다. 3년이 지난 지금, 그 목소리들은 모두 파묻혔다.

‘정치의 본질은 합의가 아니라 불일치’라고 말한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적 불일치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가치를 놓고 대결하는 말하는 인간 사이의 토론이 아니다. 정치적 불일치는 말하는 자와 말하지 못하는 자에 관한 갈등이며, 고통의 목소리로서 들려야 하는 자와 정의에 관한 논증으로 들려야 하는 자에 관한 갈등”(<말과 활> 9호)이라고 말했다. 정치는 정치세력 간의 이해관계를 두고 다투는 갈등이나 타협이 아니라, ‘몫 없는 자들의 몫’과 ‘셈해지지 않는 것들을 셈하는 것’을 전면화하는 것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이들의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이들의 고통을 가시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언제까지 “나중에”만 외치며 몫 없는 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치를 반복할 것인가.

*<한겨레>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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