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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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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KBS 출연 금지를 당했다. 그는 최근 유력 대선 후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지하는 더불어포럼 공동대표를 맡았다. 출연이 예정됐던 프로그램은 KBS <아침마당> 목요특강이다. 주제는 ‘맛있는 식재료 고르는 요령’. <아침마당> 제작진은 ‘제작 가이드라인’을 언급했다. 여기에는 “선거기간 중 비정치 분야 취재를 하는 경우, 후보자 또는 캠프에서 공식 직책을 맡고 있거나 특정 정당·후보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사람을 인터뷰하거나 방송에 출연시키지 않도록 주의한다”고 적혀 있다.

가이드라인만 보면 KBS가 기준 없이 황교익씨를 내친 건 아니다. 하지만 누리꾼들은 황교익씨 폭로 뒤 이틀 동안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황교익’을 올리며 함께 반발했다. 이유는 기준 유무가 아니라 추락한 KBS의 신뢰도에 있다.

KBS는 공영방송임에도 박근혜 정권의 시녀로 충실하게 복무했다.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에게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해 압력을 가한 통화 내용이 폭로되고, 길환영 전 KBS 사장도 박근혜 대통령 비판 기사를 줄이라고 한 사실이 드러났다. 고대영 현 사장도 KBS 구성원들을 상대로 한 경영 평가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을 만큼 정치적 편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KBS가 공영방송에 걸맞은 보도를 이어왔다면 황교익 출연 금지도 파장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비단 KBS만이 아니다. 비정치 분야에까지 특정 후보나 정당 지지자를 배제하는 KBS의 제작 가이드라인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치 혐오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누구나 정당에 가입할 자유가 있고, 특정 후보를 지지할 자유가 있다. 그 선택 때문에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황교익씨가 문재인을 지지하든 반기문을 지지하든 심상정을 지지하든, ‘맛있는 식재료를 고르는 요령’을 소개하는 정체성과 정치인을 지지하는 정체성은 그의 내부에서 분리된 채 공존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조처와 가이드라인에는 <아침마당> 목요특강 시청자를 정치적으로 우매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포함됐다. 시청자가 황교익씨의 두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휘둘릴 것이라 생각하는 엘리트적 시선이다.

만약 황교익씨가 출연하려던 프로그램이 정치·시사 프로그램이라면 공정성을 따져볼 필요는 있다. 구독자가 구독료를 내고 구독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신문과 달리 공영방송은 공중파를 통해 각 가정에 일괄 전달되는 공공재다. 그렇다고 해서 출연 금지라는 배제적 수단을 선택해야 할지는 별개 문제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황교익을 출연시켰다면, 반기문을 지지하는 인물과 심상정을 지지하는 인물을 함께 출연시켜 비슷한 분량의 발언권을 보장하면 된다. 공영방송은 재미와 시청률에 매몰되기보다 정치·사회 이슈를 시민들과 좀더 공유할 의무가 있다. 정치와 사회 이슈는 그야말로 공적 사안이다.

이번 일로 알 수 있는 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치 배제 아비투스다. 사람들은 일상적 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린다. 특정 정치 성향을 드러내면 그 사람의 모든 의견에 낙인 찍고 불이익을 안긴다. 이런 사회에서 정치는 일상화하지 못하고 한정적 조건에서만 거론할 수 있는 선택적 문제로 축소된다. 소수의 목소리가 억압되고 권력자의 목소리가 지배적 언설로 고착화할 가능성이 크다. 입국 일주일 된 반기문이 연일 해프닝성 논란을 일으키는 이유도 결국 그가 무슨 정치를 할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아닐까.

*한겨레21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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