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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이가"

조회 수 38804 추천 수 0 2016.12.27 10: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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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큰아버지’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두 가족이 친척보다 가깝게 지내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부르게 됐다. 큰아버지는 내게 삶의 지혜를 알려주고, 성찰적 삶에 대해 조언해주는 분이었다. 그 자신이 성실한 삶으로 모범이 됐다. 큰아버지가 며칠 전 할 말이 있다며 전화했다. 서울에 있는 유명 여론조사 전문업체 대표의 이름을 대며 “들어본 적 있느냐”고 했다. 같은 고향에 고등학교 동문인데, 이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서울이라는 큰물에서 크게 노는 사람인데 알아둬서 나쁠 것 없지 않겠냐.”

2016년 12월22일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 제5차 청문회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사진 몇 장을 공개했다. 등장인물은 3명. 1명은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새누리당 간사를 맡아 박근혜 변호인 노릇을 하는 이완영 의원이다. 이 의원은 최근 최순실 태블릿PC와 관련해 청문회에서 위증을 교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다른 1명은 최순실의 법률 대리인을 맡은 이경재 변호사다. 이 변호사는 JTBC 보도에 나온 태블릿PC가 최순실의 것이 아니라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또 다른 1명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가족 기업인 정강에서 집사로 활동하는 이정국 전무다. 사진에는 이들이 함께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연결 고리가 없을 것 같은 이들을 묶어준 건 다름 아닌 경북 고령 향우회였다.

지역의 끈뿐일까. 이완영 의원과 함께 위증 모의 혐의를 받는 정동춘 K스포츠재단 이사장도 이 의원과 엮여 있다. 둘은 대구 대륜고 선후배 사이다. 사례는 더 있다. 우병우 전 수석의 장모 김장자 삼남개발 회장은 이화여대 여성 최고지도자과정 ‘알프스’의 총동문회장을 맡으면서 정치권 인맥을 쌓았다. 이화여대에 1억원을 기부했고 최경희 총장과 인연을 맺었다. 김장자 회장은 2주에 한 번 최순실이 골프장에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가 즐겁게 맞는 사이다.

이 관계 네트워크는 김장자 회장이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이화여대에 특혜 입학시키는 데 기여하고, 입학시험 몇 달 전 최순실이 김장자 회장의 사위 우병우 전 검사를 권력의 핵심이라는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들여보낸 것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여 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으로 한국 사회의 치부가 여럿 드러났지만, 이 장면들은 압도적 상징성을 지닌다.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지역, 학교 등 ‘관계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권력을 추종하는 집단적 행태를 통해 발생한다.

이것은 곧 한국 사회에서 공기처럼 보편화한 명제인 “힘있는 자들은 힘으로 먹고사는” 권력 지배 이데올로기로 구현된다. “알아둬서 나쁠 것 없는” 관계 네트워크 사람들끼리 서로 소개하고, 권력의 지위를 이어받으며, 이익을 독점적으로 부풀린다. 권력은 점점 특권화하고, 지배적 지위는 세습되며, 몫 없는 자들은 배제된다. 심지어 사익을 추구하는 일에 권력의 지위를 이용해 공적·제도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다 어떤 이는 사익을 추구하는 자신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도취 증세까지 보인다.

관계 네트워크가 횡행하는 사회에선 권력을 탈취하고 권력자를 교체해도 몫 없는 자들이 배제되는 권력 지배 이데올로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우선해야 할 건 관계 네트워크를 복원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하는 집단적 실천이다. 지역과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관계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찾아내 그 기능을 정지시키는 사회적 물결. 새로운 질서는 그 집단적 실천과 사회적 물결 너머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것 아닐까.

*한겨레21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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