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사실은 파편적으로 다가온다. 파편적 사실들을 잇는 맥락은 어떤 충격과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식되곤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전세계를 강타한 ‘트럼프 쇼크’는 저학력 백인층이 파편적 사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 그 파편적 사실의 단초를 던진 사람은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이다.
디턴은 지난 20년 동안 전세계 대부분 선진국에서 중년층(45~54살)의 사망률이 감소했으나 미국 백인 중년층의 사망률만 인구 10만 명당 연간 370명에서 415명으로 가파르게 올라갔다고 밝혔다. 이 죽음은 자살과 약물중독 등 ‘절망의 죽음’이 대부분이었다.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서도 45~54살 저학력·저소득층 백인 남성 10만 명당 연간 사망자 수는 415명이었다. 히스패닉계의 262명을 앞선 수치다. 저학력 백인들(67.5살)은 대학을 나온 백인들(80.4살)에 견줘 13년이나 수명이 짧다. 여성도 저학력 백인(73.5살)은 대학을 나온 백인(83.9살)보다 10년이나 적게 산다. 특히 소도시와 농촌 지역 거주 40대 백인 여성의 사망률이 2000년 이후 14년 만에 30%나 상승했다.
백인들에게 ‘아메리칸드림’은 상실된 지 오래다. 김창환 미국 캔자스대학 교수의 설명을 보면, 지난해 여름 <애틀랜틱 매거진> 조사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은 각각 43%, 36%가 ‘아메리칸드림이 가능하다’고 응답했지만, 백인은 단지 19%만 그렇다고 답했다.
결론적으로 저학력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백인들이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퓨리서치가 발표한 2016년과 2012년 미국 대선 출구조사 결과 비교를 보면, 저학력층은 이번 선거에서 52%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44%에 그쳤다. 이는 1980년 출구조사 이후 최대 격차다. 2012년에는 저학력층 51%가 버락 오바마를 선택했다. 특히 저학력 백인들의 트럼프 지지는 67%로 역시 28%에 불과한 클린턴에 견줘, 1980년 출구조사 이후 최대 격차를 기록했다.
이 결과는 무엇을 말할까. 무엇보다 힐러리는 기성 정치를 대변하는 낡음의 이미지가 강했다. 힐러리는 1990년대 우경화한 민주당 정부의 핵심이었다. 자유무역협정은 세계화를 낳았고, 미국의 제조공장들은 폐허가 됐다. 양극화가 심각해졌다. 공교롭게도 미국 백인들의 사망률이 높아지며 신음한 시기도 20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기성 정치와 낡음이라는 이미지는 힐러리라는 탁월한 여성을 충분히 가리고 말았다.
반면 트럼프는 기성 정치 문법을 파괴하는 새로움의 상징이 됐다. 그는 사회복지 지출과 대외무역 정책, 외국 군사 개입 등에서 공화당이 전통적으로 내세우던 정책을 거부했다. 공화당의 것인지 민주당의 것인지 모르게 되어버린 세계화 역시 “그로 인해 수백만 명의 미국 노동자들이 가난과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새로움은 기성 정치와 금융자본의 결탁, 양극화 해결에는 애쓰지 않으면서 정치적 올바름만 내세우는 어떤 정치의 ‘위선’에 대한 거부감과 만나 정치적 바람을 일으켰다. 그가 성차별주의자이고 인종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만 내세우는 어떤 정치의 ‘위선’에 대한 거부감은 사실 한국 사회의 2000년대 이후를 지배해온 정서다. 그런 탈정치적 서사에서 ‘안철수 현상’이 일어났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으며, ‘일베’가 탄생했고, 여성혐오 현상이 일어났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누군가의 파편적 비명들을 마침내 인식하게 하는 또 다른 충격이 다가올지 모를 일이다.
*한겨레21에 게재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