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진보 시사 주간지 <시사인>이 곤욕을 치렀다. 최근 잇따라 메갈리아와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한 분석 기사를 내놓으면서다. 대체로 남성 사용자들이 많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시사인> 절독 운동이 벌어졌다. 심지어 <시사인>이 2년 전 표지로 썼던 태극기와 욱일기를 합성한 이미지가 편집국에 걸려 있는 장면이 포착된 걸 두고 ‘매국 잡지의 증거’라고 비판받는 황당한 사건까지 생겼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이 그렇듯, 이번 사건도 대체로 자신이 가진 견해에 따라 적으로 삼은 상대에게 온갖 부정적 요소를 덧붙여서 총체적 악마로 규정하고 선을 긋는 현상이 일어났다. 한쪽에선 메갈리아나 워마드같은, 최근에 생긴 페미니즘 커뮤니티와 이를 옹호하는 듯 보이는 언론은 대화조차 할 필요 없는 악마가 됐다. 다른 한쪽에선 여성들을 혐오하거나 혹은 메갈리아를 페미니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 남성들, 나아가 성인지성이 조금이라도 부족해 보이는 남성은 모두 벌레, 즉 ‘한남충’이라고 부른다.
역사가 기록된 이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의 중심이 되거나 사회가 여성 친화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훨씬 더 다양한 영역에서 더 많은 착취를 당해왔다.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사회를 조금씩 바꿔오긴 했지만, 남성 중심 사회는 아직 전복된 적이 없다.
그런데 한국 남성들이 최근 등장한 메갈리아나 워마드 등을 유독 경계하고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는 건 왜일까. 그 답의 일면은 일베에 대응하던 진보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보는 일베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넷상의 혐오 표현에 대처하면서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이들을 무조건 악마화하고 배제하는 전략을 택했다. 일베가 어떻게 이 사회에 등장하게 됐는지 그 맥락과 실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혐오가 발생하는 구조를 살피자는 지적은 진보 안에서조차 조롱받았다. 혐오는 맥락과 실체 따위를 살피고 이에 따른 비판이나 처벌 방법을 논의할 겨를도 없이 일단 내 눈앞에서 배격해야 하는 어떤 ‘더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일베에도 ‘일베충’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나는 메갈리아가 일베와는 다른 맥락에 의해 발생한 페미니즘 저항의 과격하지만 급진적이진 않은 하나의 흐름(물론 그 안에는 저항보다 단순 유희를 중심에 둔 흐름도 있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대체로 한쪽에선 남성이 감히 페미니즘을 평가하느냐는 지적을 받았고, 다른 한쪽에선 메갈리아와 워마드도 똑같이 혐오 표현을 쓰고 있는데 왜 일베와 다른 잣대로 특별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며 그 ‘이중성’을 지적당한다. 이런 상황이니 일베가 됐든 메갈리아가 됐든 맥락과 실체와 관계없이 적이냐 아군이냐 손가락질만 앙상하게 남게 됐다.
이런 현상은 진보가 가진 어떤 구조적 문제점에서 기인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정상성 이데올로기가 지배해오고 있다. 정상성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다수가 정상성으로 규정하고 있는 도덕률에서 이탈한 예외적 인간을 빠르게 배제하고 타자화한다. 다수의 도덕률에 의문을 품은 이들은 ‘빨갱이’가 되거나 ‘진지충’이 되고, 그렇게 예외적 인간을 내몬 이들은 그들을 내몰았다는 사실 자체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으로 정상성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피해자는 진보 세력이었다. 한국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었던 이들은 재빨리 권력의 폭력에 지배당하는 희생자가 된다. 희생자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희생 그 자체로 저항을 미학화하면서 자연스레 진보의 지향에 위치지어졌다.
이 피해가 유구하게 이어져 오며 확대됐고, 한국의 진보 운동은 승리의 경험에 목말라 가며 위축하고 있다. 그 결과 진보는 운동의 목적을 변혁을 위한 연대에서 찾기보다 자족적 인정투쟁을 위한 배제의 수단 찾기에 매몰되고 있다. 그 수단에 가장 적합한 것은 “나는 절대선”이라는 선민의식, 그리고 한국의 진보에 수십 년 동안 피해를 줬던 정상성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해서 그대로 타자를 배제하는 모습으로 답습하는 방법이다. 일베와 메갈리아를 둘러싸고 또 다른 가해와 예외적 인간들은 그렇게 양산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갈등은 혐오와 페미니즘 담론으로 들어서기 전의 어떤 영역에서 서로 손가락질하며 다투고만 있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은 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 혐오와 페미니즘 담론으로 들어서기 전의 어떤 영역에서 서로 다투고 있는 갈등을 혐오와 페미니즘 담론으로 끌어오는 일, 그게 지금 당면한 첫 번째 과제다. 심지어 페미니즘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혐오가 점점 세를 확산하고 있는 건 한국만이 아닌 세계적 현상이다. 그러니 혐오의 원인을 찾는 구조적 사고, 혐오와 표현의 자유는 양립할 수 있느냐는 질문, 혐오를 규제할 제도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담론, 저항은 어떻게 윤리적이어야 하느냐는 성찰에서 출발점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혐오를 추려낸 분노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완해서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