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대통령은 집권 3년 내내 하나의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권력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일이다. 모든 말은 그 목적에 의해서만 발화한다. 그 목적에 대한 거역 혹은 의구심은 곧 배제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 모습을 새누리당의 4.13 총선 공천 결과에서 똑똑하게 목도하고 있다. 단 한 번이라도 대통령을 불편하게 했던 이들은 모조리 내침을 당하고 있다.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소속 정당이나 주변 정치인들의 그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도 대통령의 권력 재확인 작업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대통령의 말은 자주 주술 관계가 연결되지 않는다. 엉뚱한 형용어를 쓸 때가 많다. 문장은 불분명한 대명사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 세상이 쓰지 않은 개념어를 쓴다. 대통령이 쓰는 어떤 말의 개념은 대통령만 안다. 이런 말은 언어가 아니라 망상이다. 자신이 했던 말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면 거리낌없이 말을 뒤집기도 한다. 하지만 말이 정교하게 벼려져 있는지 여부는 대통령의 권력 작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되레 말이 정교하게 벼려져 있지 않음에도 대통령의 권력이 끄떡없이 작동된다는 점에서, 그 권력의 공고함이 새삼 재확인된다. 권력이란 비물질이 이런 방식을 통해 하나의 물질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이 인식은 배제에 대한 공포를 매개로 작동한다. 여기서 공포란 대통령을 거역한 사람에게 대통령의 권력을 빌릴 수 있는 권력을 빼앗는 것에서 시작한다. 권력같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직을 잃거나 밥그릇을 빼앗기는 물리적 조처를 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식 안에서 물질화한 공포는 시선 앞에 명징하다.
물론 이런 정도의 공포에 꿈쩍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대체로 애초부터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권력을 빼앗기는 것도, 밥그릇을 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역시 종국에는 공포와 직면한다. 이들이 일방향의 사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 어떤 정책이나 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대통령은 그 문제점에 대해 숙고해서 문제점을 최소화하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더욱 강화된 정책이나 제도를 들고 나온다. 이렇게 되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처음엔 분노했다가 나중엔 '내가 괜히 문제를 제기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 아닌가' 자책하게 된다. 사람들은 무기력해지면서 침묵하고, 침묵은 다시 무력감으로 환원된다. 정치는 위축되며, 통치만 강화한다. 나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고 되레 악화하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만큼 커다란 공포가 또 있을까.
스피노자는 정치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동력으로 공포에 주목했다. 정치는 '대중이 권력에 대해 가지는 공포'와 '권력이 대중에 대해 가지는 공포'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대중과 권력자는 공포를 완화하기 위해 정치를 찾으면서 서로 길항한다. 민주주의는 대중이 권력에 대해 가지는 공포와 권력이 대중에 대해 가지는 공포가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마침내 찾아올 수 있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언제나 과정의 산물이다. 민주주의가 근원적으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까닭이다. 대중의 공포와 권력의 공포가 끊임없이 길항하면서 매순간 갈등하는 관계가 바로 정치다.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에게는 권력이 대중에 대해 가지는 공포 같은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2016년의 한국 사회는 대중이 권력에 대해 가지는 공포 하나만 일방향으로 존재한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다. 이런 환경에서 공포는 길항할 대상을 잃고 억압으로 현실화한다. 억압은 여러가지 부수 효과를 낳는다. 문제는 억압된 것은 결코 억눌린 채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억압된 것은 종국엔 모습을 바꾸어 되돌아온다. 대통령의 3년이 파생한 공포에 의해 억압됐던 모든 것은 각자도생과 자력구제라는 이름으로 변환해 귀환했다. 누구든 이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자기만은 살아남길 원한다. 각자도생과 자력구제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비판하고 회의하는 지성보다 정보수집과 문제해결에 뛰어난 지식 능력자가 되어 스스로의 인격 자본을 고도화하는 길을 택한다. 이런 이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은 주변을 짓밟는 것이다. 이때 짓밟는 대상은 사회적 소수자다. 칼럼니스트 박권일은 이에 대해 '강자 선망'이라고 개념화했다. 그는 "‘강자 선망’은 강자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이면서 동시에 약자와 자신의 분리다. 과거 종부세 부과 대상도 아닌 서민들이 종부세에 반대했던 해프닝의 근저에도 이런 심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가기 : [야! 한국사회] 타락한 능력주의)
우리는 최근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의 노골적인 동성애 혐오 발언에서 '강자 선망'과 생존을 위한 혐오의 자본화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박영선 의원은 명징한 혐오 발언을 해놓고도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소수 약자들을 자극해 야당을 상처주기 위한 의도적인 흡집내기"라고 반박했다. 한쪽에선 강자에 편승하고 다른 한쪽에선 피해를 가장한다.
박영선 의원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격 자본을 고도화하는 길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도 방법은 있다. '피해자 되기'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성이 가장 강력한 이는 대통령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더 크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가 말하는 그 '극한의 고통'이란, 어머니와 아버지의 잇단 죽음과 그로 인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순식간에 빼앗기고 수중에 6억원만 '달랑' 쥐게 됐던 그때의 경험이다. 대통령이 앞장 서니 '피해자 되기'는 전염병처럼 번졌다. 많은 이들이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으니 상황 판단력을 잃었다. 내가 제일 억울한 것 같아 피해자성을 극대화한다. 결국 염치라는 걸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처지로 전락한다.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나를 겹겹이 보호해줄 최선의 자본이 된다. 우리는 모두가 피해를 호소하면서 아우성대는, 그래서 염치가 사라진 사회에 살고 있다.
대중이 이런 사회에서 정치인들의 필리버스터를 보고 열광했던 것은 오랜만에 가치가 담긴 말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치가 담긴 말은 대중에게 유통되어 결국엔 권력이 대중에 대해 가지는 공포를 파생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다. 그 말과 말 속에 담긴 가치에 정치 복원의 열쇠가 담겨 있다. 끊임없이 비판하고, 끊임없이 회의해야 하는 까닭이다. 총선 선거 정치보다 우선 복원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이 발화의 정치인 것이다.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완해서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