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아이유의 ‘제제’를 향한 비판은 세 가지 갈래에서 폭력적이었다. 첫 번째 갈래는 “표현의 자유도 대중들의 공감하에 이뤄지는 것”이라는 출판사 동녘의 말이다. 표현의 자유는 대중의 즉자적인 여론재판이나 특정 시기에 일반화한 기분에 따라 승인 여부가 임의로 결정될 수 없다. 어떤 결기에 의해 자유를 박탈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자유의 영역이 아니다. 게다가 언제나 삐뚤어진 폭력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출판사는 ‘제제’라는 가상 캐릭터를 동원해 학대 피해 아동을 ‘순수하고도 가여워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폭력도 저질렀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 사회가 자주 피해자에게 ‘악독한 가해자와 대비되는 고결한 모습’을 요구하면서 사실은 피해자를 어떤 동떨어진 존재로 타자화해온 현상을 떠올릴 수 있다. 다양한 결의 환부를 가진 피해자를 어떻게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라진 채 피해자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자신의 고귀한 모습에만 시선을 고정한 결과다. 피해자는 순수하거나 고결한 모습을 가졌을 때만 지지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마지막 갈래는 수만명이 참여한 ‘음원 폐기’ 청원이다. 이 청원은 아이유의 ‘제제’ 일러스트나 ‘스물셋’ 뮤직비디오의 특정 장면을 해석의 여지없이 “명백한 소아성애 코드”로 규정한 뒤 나와 내 아이의 눈앞에서 아예 없앨 것을 강제하는 소비자적 요구였다. 아이유의 ‘제제’나 ‘스물셋’이 소아성애 코드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제대로 공론화하기도 전에 일단 배제라는 폭력적 수단을 선택했다.
정치적 주체로서의 발언은 대의 정치의 틀로 수렴되지 않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기업으로부터 거세당한 한국인들은 이제 소비자로 존재할 길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소비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약한 고리는 연예인이다. 연예인들은 정치인이나 기업과 달리 무언가를 요구하면 즉각 순응으로 반응한다. 아이유가 입장문에서 자신의 2차 창작물에 대한 해석을 설명하기보다 재빠른 사과에 중점을 둔 것도 이런 순응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 논란에서 아이유와 제제를 향한 비판에 반박하는 대항담론 역시 빈곤하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출판사 동녘의 폭력과 음원 폐기론자들의 폭력에 대항하는 담론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이라는 말의 지리한 반복이었다. 이 대항담론은 우선 아이유와 제제 논란을 둘러싼 담론 자체를 빈곤하게 만들었다. 소녀성을 상품화하는 메타포를 즐겨 써온 아이유와 기획사의 전략에 대한 의문이나 비판마저 ‘2차 창작물로서의 해석에 대한 자유 침해’로 규정하고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이 논란을 계기로 확장해갈 수 있었던 ‘한국의 아이돌 산업 전반이 소녀성 상품화에서 자유로운가’라는 질문도 함께 소거됐다. 이 질문이 소거되지 않았다면, 수많은 아이돌 기획사가 소녀성을 상품화했는데 왜 유독 아이유만 지탄받느냐는 질문도 자연스레 따라왔을 것이다. 이른바 ‘삼촌팬’들은 아이유가 직접 앨범 전곡을 프로듀싱하며 상품에서 벗어나 아티스트로서 한 발을 내디디는 순간 폭발했다. “상품이 어디서 아티스트 행세를 하냐”는 반발 말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절대론은 성채를 쌓고 논의를 확장하지 못했다. 심지어 “예술가는 예외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말은 돌려서 생각하면, 예술가를 정치와 담론 외부의 존재로 타자화하는 말이다. 이는 아이유라는 개인에 대한 비판과 삐뚤어진 아이돌 산업에 대한 비판, 아이유와 기획사가 만든 콘텐츠에 대한 비평과 아이유 개인에 대한 호오는 결이 다름에도 이런 비평이 싸잡아 ‘어린 여성 아티스트’에 대한 거부감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 절대론은 어느덧 “테러를 선동했다 해도 제재를 가할 수 없다”는 말로 확장되기도 하고, “예술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는 건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로 이어졌다.
문제는 2010년대의 세계에서 표현의 자유 절대론이 자유주의의 약한 고리라는 사실이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표현도 가능하다는 약한 고리를 뚫고 배타적 인종 혐오와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의 극우 이데올로기가 창궐하고 있다. 혐오에 기반한 테러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표현의 자유 절대론은 이런 현상에 공론화로 대항할 논리로 흠결이 많고, 혐오 표현과 혐오 행위 규제를 포괄하기도 어렵다. “전라도 혐오나 여성 혐오 발언도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면 견딜 수 없어 하며 폭발하거나 혹은 “그런 건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라고 정신 승리하는 진보를 두고 “위선적”이라고 이죽거리는 일베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이유의 새 앨범은 되레 음원 차트를 석권하고 있고, 출판사 동녘이 펴낸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판매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어쩌면 아이유와 제제 논란이 증상으로 드러낸 건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하는 폭력과 그 앞에 표현의 자유 절대론만 조자룡 헌칼 쓰듯 꺼내는 한국 진보의 초라한 현재, 그 두 가지 아닐까.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완해서 게재함
댓글 '9'
제가 미처 생각을 못한 부분이어서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저도 여성 커뮤니티나 여성분들의 페북에서 분노를 보았지만, 제 시선에서는 의미있는 비판의 지점을 찾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 문장을 쓴 건, 남성들만 분노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남성들의 분노에서 이중적 면모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별의 비중을 고려해 남성들의 분노만 유의미했다, 이런 생각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현상만 놓고 볼 때 말이죠.
평소에 '어린 여자'를 상품으로 즐기지도 않았던 '엄마' 혹은 '아줌마' 그도 아니면 '언니'는 어떤 부분에서 민감해졌을까요?
그 부분에 대해 더 들여다 보고 생각할 지점이 있어요.
제 눈에는 그들의 비판의 규모가 삼촌들의 비판의 규모보다 결코 작아 보이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파악도 안 되었는데) '삼촌의 분노'가 강조되면,
일단 '피해 아동을 성애화했다'라고 '알려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감정에 대해 간과할 우려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성애화가 맞느냐, 혹은 피해자를 성애화하면 안 되느냐, 혹은 가상인물에 왜 그러느냐,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말이죠.
또 하나는,
이 문제가 대중음악과 문학 사이를 오가며 벌어진 현상임을 감안할 때 '삼촌팬'이라는 '팬'의 집단의 폭발로 보면 오히려 문제가 축소된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우리가 가장 말하기 쉬운 현상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남성들의 분노만 보았다고는 저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바로 남성들의 분노, 그 이중성이 더 말하기 쉬운 요소는 아닌지, 그런 의구심이 드는 거죠.
지금 이 글이 아니라, 여러 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포함하여)
궁금해서 좀 말을 던져봤어요.
자야 할 시간이기에 그럼 저는 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