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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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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그가 마을 뒷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는 바로 우리 시대였다”라고 썼다. “오월 광주의 죽음에서 시작”된 시대를 가장 폭넓게 대변한 노무현이 실패한 저항의 책임을 지고 “파멸을 선택함으로써, 적어도 비겁한 시대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자기를 던졌”다고, 김상봉은 썼다.

노회찬 의원이 서울 남산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했다는 속보를 들었을 때, 나는 멍한 상태로 김상봉의 저 글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끝났다면, 노회찬의 죽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열고자 했던 희망이 사라졌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1987년 완성되지 않은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도전이 좌절됐다면, 노회찬의 죽음으로 1997년 시작된 파괴적인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저항이 실패했다. 노회찬의 죽음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노무현의 선언에 진보적 정책을 내밀며 벼랑 끝에 서 있던 한 정치인의 의지마저 꺾였음을 의미한다. 그가 경제적 양극화에 저항하기 위해 비난을 무릅쓰고 강화했던 민주노동당 정책실은 사라졌고, 그 정책실을 이끌던 이들은 노회찬 생전에 곁을 떠났거나 노회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민주노동당 정책실이 만들었던 무상급식과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과 같은 빛나는 정책들은 다른 정치 세력에 의해 전유되거나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 과거가 되었다. 노회찬의 죽음으로 그 정책들도 죽었다.

돌이켜보면, 아직 오지 않은 시대가 잠시 얼굴을 내민 적이 있었다. 2004년 4월 15일 오후 6시, 광화문 앞 동아일보 빌딩 위 대형 TV에선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이 거셌지만,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선거 막판 판세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열린우리당이었다. 최소한 ‘과반인 150석 이상 확보가 확실하다’는 문구가 떴다. 하지만 그날 광화문에는 TV 화면 한구석에 조연들이 띄운 ‘한 조각 희망’을 보고 환호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진보정당 의회 입성. 민주노동당은 비례 투표에서 13%나 되는 지지를 받아 8석의 의석을 확보했고, 지역구 2석까지 모두 10석을 차지했다. 비례대표 끝자리에, 김종필을 밀어낸 노회찬이 있었다.

그날이 화려한 시대의 시작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그저 벚꽃처럼 잠시 피어올랐던 짧은 절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할 건, 짧은 절정일지언정 결코 거저 온 게 아니라는 점이다. 노회찬은 그 짧은 절정을 위해 오랫동안 흙을 다지고 물을 뿌려온 지난한 과정의 증인이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직선제를 쟁취한 기억은 뚜렷하지만, 민주화운동을 기폭제로 일어난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다는 기억은 우리에게 소거되어 있다. 노회찬은 이때 인천과 부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들을 묶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출범시켰지만, 1989년 인민노련 핵심 멤버들과 함께 검거돼 옥살이를 했다. 1992년 3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이 참패하면서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와 같은 핵심 인사들이 보수로 전향하고, 1992년 연말 치러진 대선에서 민중 후보 백기완이 참패하면서 진보정당 운동에 회의가 팽배했지만, 출소한 노회찬은 묵묵히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사무총장과 대표를 맡았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많은 진보 인사들이 ‘최초의 정권 교체’ 명분을 좇아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했지만, 그는 권영길 후보의 국민승리21에 남아 대선 득표율 1.2%를 딛고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권영길은 “1997년 대선에서 진보 후보였던 내가 예상보다 낮은 득표율로 모두들 실의에 빠졌을 때, 다시 진보정당 추진 운동을 일으켜 세운 이가 노회찬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실패할 때마다 아직 오지 않은 시대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이들이 한 움큼씩 빠져나갔지만, 노회찬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런 노회찬이 남산의 한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열고자 했던 희망을 노회찬마저 등졌다면 이제는 누구도 그 시대를 열 수 없게 된 것 아닐까 생각했다.

노회찬은 끝내 오지 않을 어떤 세상을 열기 위해 홀로 불가능과 싸웠다. 우리는 그에게 불가능과의 싸움을 위탁한 채, 무슨 일만 있으면 그를 비판하고, 그에게 책임을 물었으며, 그의 선택을 원망했다. “낡은 것은 죽었는데 새로운 것은 당도하지 않은” 상실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노회찬을 낡은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새로운 것을 하고 있다고 자위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하고 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노회찬이었다. 그는 새벽 버스를 타고 청소 노동 현장으로 가는 투명인간들에게 말을 건네 비로소 그들을 세상의 일원이자 정치적 동지로 불러냈고, 이제는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삼성 권력이 모두의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을 때부터 삼성과 싸웠으며, 대체복무제 없는 법안이 위헌적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오기 14년 전에 이미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 법안을 발의했다. 장애인과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과 성소수자, 해고 노동자들이 줄줄이 추모 논평으로 노회찬의 삶을 증명할 때, 그는 우리 앞에서 다시 새로워졌다. 그러나 그가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말과 자신의 몸을 비수처럼 던지고 나니, 새로운 것은 꺾이고,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열고자 했던 희망은 한 조각마저 다시 세울 수 없게 됐다.

진보 정치는 “암흑 속으로 돌진”한 상태다. 노회찬이 마지막까지 서 있던 세상은 기존의 체제에 대한 불신자들로 가득하다. 체제 불신자들은 정치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한 짬짜미로 돌아가고, 지식인과 언론 역시 그런 체제에 부역한다고 여긴다. 체제에 대한 불신은 불온한 에너지가 되어 체제를 전복하는 동력이 되어야 하건만, 그 동력을 끌어안아야 할 좌파는 지리멸렬하다. 그 에너지는 고스란히 극우의 것이 되었고, 체제 불신자들은 나보다 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해자가 되어 소수자를 혐오하고, 고통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들에게 좌파나 진보는 교육받은 엘리트의 것이고, 위선적 화법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기만 좋아하는 이들이 구축해놓은 말의 세계에 불과하다. 노회찬이 있다면, 이 체제 불신자들의 분노를 어떻게든 진보적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을 것이다.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고 부딪혔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죽음을 뒤로하고, 더 이상 책임 물을 대상도 없는 상태에서, 이제는 무슨 일만 있으면 그를 비판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고, 그의 선택을 원망하던 이들, 노회찬을 낡은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것을 하고 있다고 자위했던 이들이 나설 때 아닐까. “저항이란, 투쟁을 타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지금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도미야마 이치로의 문장은 노회찬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처럼 들린다.

그렇게 명령처럼 돌진한다, 체제 불신자들의 에너지 속으로.

*뉴스민에 게재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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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정유라 체포 보도 정말 문제였나 file [2]

  • 2017-01-04
  • 조회 수 68492

JTBC 기자가 덴마크에서 정유라를 추적하다 행적을 확인한 뒤 경찰에 신고하고 이 과정을 영상으로 취재해 보도한 사실을 두고 저널리즘 원칙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다. '보도하되 개입하지 않는다'는 저널리즘 고유의 원칙을 두고 JTBC가 경찰에 신고하든 보도를 하든 하나만 선택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건 박상현 메디아티 이사가 쓴 '경찰에 정유라를 신고한 JTBC 기자,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은 박상현 이사의 글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그 글을 계기 삼아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써...

세월호 인양과 온전한 애도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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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3일 새벽 3시45분. 전남 진도 맹골수도의 검은 물 위로 세월호 선체의 우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객실과 조타실이 있는 흰색 상부는 녹슬고 부식돼 검게 물들어 있었다. 화물칸이 있는 파란색 하부는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져 붉은 속내를 드러냈다. 배 이름은 지워지고 없었다. 선체의 형상이 점점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마음 한 켠에 묻어뒀던 기억도 또렷하게 소환됐다. 2014년 4월16일. 검은 바다 위에서 점점 기울어가던, 그렇게 304명의 비명을 집어삼키던, 저 배를 어찌 바로 세울 수 없나 절규하던, 그 세월호였다. 그 세월호였...

그러니까 "우리가 남이가" file

  • 2016-12-27
  • 조회 수 38786

나에겐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큰아버지’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두 가족이 친척보다 가깝게 지내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부르게 됐다. 큰아버지는 내게 삶의 지혜를 알려주고, 성찰적 삶에 대해 조언해주는 분이었다. 그 자신이 성실한 삶으로 모범이 됐다. 큰아버지가 며칠 전 할 말이 있다며 전화했다. 서울에 있는 유명 여론조사 전문업체 대표의 이름을 대며 “들어본 적 있느냐”고 했다. 같은 고향에 고등학교 동문인데, 이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서울이라는 큰물에서 크게 노는 사람인데 알아둬서 나쁠 것 없지 않겠냐...

'파산관재인' 문재인, 홍준표의 새빨간 폭로 file

  • 2017-04-05
  • 조회 수 27581

‘파산관재인’이라는 말이 있다. 파산한 기관이나 법인, 기업이나 개인의 채권을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역할을 주로 하는 사람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회사가 망했을 때 남은 돈을 찾아내서 이 회사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나눠주는 역할을 한다. 법원이 지정하는데, 주로 변호사가 선임된다. 2017년 3월28일.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문재인 전 더불이민주당 대표가 변호사 시절 세월호 실소유주인 세모의 파산관재인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 공적 자금이 들어간 유병언의 업체에 1153억원 채무 탕감...

그 당원들은 왜 심상정을 욕하나 file

  • 2017-04-27
  • 조회 수 20674

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다른 후보를 비판했다. 그러자 비판받은 후보의 지지자들이 욕설 섞인 항의전화를 걸어오고, 당 게시판에도 인신공격성 글이 폭주했다. 더 당혹스러운 일은 이 정당 내부에서 벌어졌다. 일부 당원들이 게시판에 탈당 선언을 했다. 정의당과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에게 벌어진 일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정의당은 통합진보당의 후신이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4월 총선 과정의 경선 파동을 통해 이정희 등 민족해방(NL) 계열 일부가 떨어져나가면서 유시민과 천호선 등으로 대변되는 국민참여계, 일부 남은 NL...

‘가짜뉴스’ 조작된 뉴스의 위협 file [1]

  • 2017-02-16
  • 조회 수 18951

‘가짜뉴스’는 거짓 정보나 유언비어가 담긴 조작된 뉴스를 말한다. 공신력 있는 언론사가 작성한 기사처럼 포장해 사실인 양 유통되기도 한다. 가짜뉴스가 주목받은 건 지난해 미국 대통령선거 때다. 도널드 트럼프에게 유리하고 힐러리 클린턴에게 불리한 가짜뉴스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통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발표했다’는 가짜뉴스는 페이스북에서 반응이 96만 건에 이르렀다. ‘클린턴 후보가 테러단체 ISIS에 무기를 판매했다’는 가짜뉴스는 79만 건의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가짜뉴스에 대한 반응 건수는 미국...

황교익 출연금지에 담긴 정치 혐오 file

  • 2017-01-24
  • 조회 수 17217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KBS 출연 금지를 당했다. 그는 최근 유력 대선 후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지하는 더불어포럼 공동대표를 맡았다. 출연이 예정됐던 프로그램은 KBS <아침마당> 목요특강이다. 주제는 ‘맛있는 식재료 고르는 요령’. <아침마당> 제작진은 ‘제작 가이드라인’을 언급했다. 여기에는 “선거기간 중 비정치 분야 취재를 하는 경우, 후보자 또는 캠프에서 공식 직책을 맡고 있거나 특정 정당·후보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사람을 인터뷰하거나 방송에 출연시키지 않도록 주의한다”고 적혀 있다. 가이드라인만 ...

사드 '보고 누락'이 아니라 '허위 보고'다 file

  • 201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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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장관 한민구에겐 네 번의 기회가 있었다. 5월14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에 참석했고, 17일엔 문 대통령의 국방부 초도순시에 배석했다. 26일엔 문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위원 점심 간담회가 있었고, 28일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점심을 먹었다. 하지만 한민구는 안보를 위해 자신들이 그렇게나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추가 반입 사실을 한 차례도 군 통수권자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의용 안보실장이 “이미 사드 4기가 들어왔다면서요”라고 묻자 “그런 게 있었...

태극기에게 박근혜란 무엇인가 file

  • 2017-03-07
  • 조회 수 13790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만만찮은 수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탄핵 각하”를 선언하고 “빨갱이를 죽이자”고 외친다. 진보 언론은 물론 보수 언론마저 국정 농단 파문에서 박근혜가 문제의 핵심임을 지적하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든 언론이 조작된 뉴스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광장은 종교적 맹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지난 삼일절 집회에서 광장을 메운 태극기 물결은 대체로 50대 이상 장년층이었다. 40대가 5명 중 1명, ...

경향신문 녹음 파일 보도로 JTBC와 손석희가 잃은 것 file [16]

  • 2015-04-17
  • 조회 수 13715

죽음을 앞둔 사람이 마지막으로 찾은 기자. 어떤 억울함에 대한 증명으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그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선택한 기자라면 평소에 그 기자는 취재원과 상당한 신뢰 관계를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억울함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을 인터뷰한 경향신문 이기수 기자는 그런 분이라고 한다. 경향신문은 훌륭한 기자를 두었고, 십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중요한 인터뷰를 했으며, 이를 잘 벼려서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50분 동안의 인터뷰 가운데 핵심적인 사안을 하나씩 꺼내 보...

박근혜 게이트, 붕괴된 믿음 체계와 분노 file

  • 2016-11-06
  • 조회 수 12078

수화기 너머에서 어머니는 내게 “정신이 멍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도 했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인 붕괴처럼 보였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믿음 체계가 한순간 와해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이의 동반 붕괴.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파문을 대하는 대부분 시민들의 반응은 내 어머니와 비슷한 것 같다. 내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40년 동안 메울 수 없었던 차이처럼, 박근혜를 지지했던 지지하지 않았던 말이다. 세대와 지역, 성별과 정치적 지향을 막론하고 ...

“아빠는 ‘옳은 일’ 했는데 왜 감옥에 갔을까요” file

  • 2017-09-25
  • 조회 수 8432

8년 싸운 해고자 아들의 눈으로 본 세상, 다큐 〈안녕 히어로〉 ‘산 자’이면서 ‘죽은 자’들의 구렁텅이에 함께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눈 한 번 질끈 감고 외면했다면 7년 동안 고통 없이 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그들에게 틈입되지 않는 이야기다. 2009년 쌍용자동차가 경영 악화를 이유로 2646명의 구조조정을 노동조합에 통보했을 때, 김정운은 구조조정 대상이 아니었다. ‘산 자’로 불렸다. 하지만 김정운은 ‘죽은 자’들과 함께 옥쇄파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해고 노동자가 되어 꼬박 7년 8개월 동안 거리에서 투쟁했다. 옥쇄...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file

  • 2016-12-09
  • 조회 수 8398

어찌 보면 익숙한 포즈다.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말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거나 결정하지 않으면서 가장 먼저 그 자리에서 탈출하는 모습.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 직후 재난구호의 최종 책임자임에도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을 해서 책임질 사람은 모두 엄벌토록 할 것”이라고 말하며 책임을 전가하고 붕괴하는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탈출했다. 이번에는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의 주범으로 지탄받는 상황에서 “저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서 결정을 회피했다. ...

20대 남성과 문재인, '젠더 갈등'이라는 맥거핀

  • 2019-02-02
  • 조회 수 8091

한국 사회에서 20대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늘 대상으로 존재한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때만 되면 20대를 한 덩어리로 묶어 ‘OO세대’로 호명하고 싶어 한다. 흥미로운 건 보수나 진보나 이런 욕망은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보수는 주로 20대를 한 덩어리로 묶어 ‘능력주의’나 ‘탈이념성’, ‘한국 사회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읽어내려고 애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나 글로벌 마인드를 갖추고 자라난 세대’라는 어떤 신문의 ‘G세대’ 담론이 대표적이다. 진보는 ‘삼포세대’나 ‘헬조선’ 담론과 같이 경제적 어려움 속에 불...

최저임금법 개정안은 ‘몫없는 자’들에 대한 기만이다 file

  • 2018-05-30
  • 조회 수 4383

국회가 결국 정기 상여금과 복리후생비를 최저임금에 산입하는 내용의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국회는 28일 본회의를 열고 매달 1회 이상 지급되는 정기 상여금과 식대·교통비·숙박비 등 복리후생비를 최저임금에 새로 산입하는 내용의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찬성 160, 반대 24, 기권 14표로 가결했다. 이에 따라 내년 1월부터 최저임금의 25%(올해 기준 월 39만3천원)를 초과하는 정기 상여금과 최저임금의 7%(월 11만원)를 넘는 복리후생비까지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포함된다. 이 비율은 매년 점차 줄어들어 2024년에는 정기 상...

‘갓물주의 하루’와 ‘우리끼리 싸움’ file

  • 2015-09-06
  • 조회 수 3534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 유령처럼 도는 글이 있다. 제목은 ‘갓물주의 하루’. ‘갓물주’는 ‘신(god)’과 ‘건물주’의 합성어다. 올해 1월 발간된 한 경제 잡지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다.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 마포구에 3채의 빌딩, 강남구와 제주도에 땅을 소유하고 있는 이 갓물주는 임대 수익으로 월 17억원을 번다. 아침 식사를 한 뒤 골프 레슨을 받고, 특급 호텔로 가서 사우나와 점심 식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와 건물 관리자에게 자산 관련 보고를 받고 휴식하는 게 그의 일과다. 주 1회 백화점에서 부인과 쇼핑을 하고, 분기별 1회 ...

후쿠오카와 한국의 '싱크홀' file [2]

  • 2016-11-28
  • 조회 수 3208

지난 8일 새벽 5시15분께. 일본 후쿠오카시 하카타역 앞 5차선 도로가 푹 꺼지듯 무너졌다. 폭 15m, 길이 20m, 깊이 15m에 달하는 거대한 싱크홀이었다. 새벽 시간이었지만 평일이었고, 이 일대가 후쿠오카에서 손꼽히는 번화가라는 점에서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자는 단 한 명 발생했다. 그것도 싱크홀로 전봇대가 쓰러지면서 발생한 정전 때문에 어둠 속에서 계단을 헛디딘 이가 발목을 삐끗해서 생긴 경상이었다. 그런데 이 사고를 두고 가장 화제가 된 건 사고 발생 일주일 만에 싱크홀을 완벽하게 복구한 일...

하나고와 사도, 소비자 정체성과 체념적 각자도생 file [6]

  • 2015-10-12
  • 조회 수 3199

딸이 하나고에 다닌다는 학부모가 전화를 걸어왔다. “한겨레 18년 독자인데 구독을 끊었다”고 했다. 입학 전형에서 남학생들의 성적을 올려서 남녀 성비를 고의로 맞춘 의혹을 공익 제보한 하나고 교사에게 학부모들이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쓴 다음날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 교사가 왜 공익 제보자인지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비리를 처음 제기했고 하나고도 이 사실을 인정했으니 단순 폭로자가 아닌 공익 제보자”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인데 왜 공익 제보자냐”라고 되물었다.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나...

"그 '일베 기자'를 잘라라"라는 말에 대하여 file [32]

  • 2015-04-03
  • 조회 수 2788

KBS 일베 수습기자의 정식 임용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파벨라에 박권일, 김민하가 관련 글을 썼다. 박권일은 ‘’일베기자‘ 관련 메모: 일베스럽지 않게 일베와 싸워야할 의무’에서 “우리는 ‘일베’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일베에서 쓴 글의 내용, 즉 ‘구체적 행위를 문제삼아야 한다”며 “여론을 업고 일베 기자를 싹둑 잘라내면 속은 시원할 테지만 그 잠깐의 속시원함 외에 남는 게 별로 없다.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사회적 차별발언의 범위를 논의해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민하는 ’KBS 일베 기자에 대한 ...

2016년 촛불, 그 미완성의 승리 file

  • 2016-12-25
  • 조회 수 2618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최대 232만명이 모이고, 심지어 횃불로 타올랐던 촛불은 잠시 소강상태다. 탄핵소추안 의결을 앞두고 주저하던 의회를 가결로 이끈 것은 오롯이 촛불과 촛불을 응원하는 시민의 힘이었다. 의회가 상황논리를 대며 망설일 때마다 시민들은 압도적 숫자로 의회를 압박했다. 촛불은 이제 헌법재판소에 맡겨둔 대통령에 대한 제도적 파면권이 어떻게 행사될지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권한이 오용될 경우, 제도적 파면권은 대통령이 아니라 헌재를 향할지도 모른다. 소강상태인 촛불이 언제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