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 주체'라는 말이 '욕'의 용도로 나를 향해 발화되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제껏 써온 글들, 앞으로 쓸 글들 모두 "말하고자 하는 하위 주체"의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을. 그 몸부림을 기록하고 축적하고자 한다.
극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영화를 보고 잡글을 쓴다. 틈 나는 대로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춘다.
어제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어느 아파트 단지가 있는 관할 보건소와 그 아파트 관리실에 단체로 민원이 빗발쳤다. "메르스 의심 환자가 있으니 조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민원들은 하나같이 그 아파트의 몇 동 몇 호에 사는 가족을 지목하고 있었다. 메르스 확진 판정이 나온 병원에 근무하는 이와 그의 가족이었다. 그렇게, 그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이와 그 가족은 “메르스 의심 환자”로 찍혀 신고 대상이자 조치 요구의 대상이 되었다. 지인은 그 민원을 직접 받은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실제 얘기다.
국가 방역 체계가 뚫렸고 믿을 만한 정보와 대처가 축적되지 못한 현재, 확진 환자가 거쳐간 병원에서 일하는 이가 잠재적 보균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그 당연함에 대한 결과로, 운 나쁘게 병에 걸린 환자,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는 가족, 그리고 그 자신이 병에 걸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에서 병과 싸우면서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의료진, 그리고 그 의료진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그렇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가해자로 분류된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조치’를 요구한다. 그런데 “어떤 조치”를, “누구”에게?
트위터에서 이문재 선생의 글이 십자포화를 받고 있길래 찾아보았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122142525&code=990100&med_id=khan 몇몇 부분이 눈에 걸린다. 그럼에도 트위터상의 일관된 조롱과 비아냥 분위기 역시 눈에 걸린다. 그 글이 일으키는 이 대단위 거부감의 정체가 뭘까, '인문학적 성찰'을 조금 해봤다.
솔직히 한국의 남성들은 너무 손을 안 씻는다. 화장실에 다녀와 손을 씻는 버릇이 없던 어느 남성에게서 “여자는 씻어야 되지만 남자는 (털면 되니까) 안 씻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경악했던 기억도 난다. (한국에서 문명인-남자가 되는 길은 너무도 쉽지 않은가? 손을 잘 씻으면 된다!) 불안과 공포가 사회 전체에 만연한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원래 당연했고 이 국면에서 더욱 권장되어야 하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가 지나치게 부여되는 것이 참 '한가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일까. 무기력한 좌절과 불안과 공포가 심해지는 가운데, 우리는 이에 대한 책임을 이제 불특정한 타인 - 개인들에게 물으려 하는 유혹에 점점 굴복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병에 걸린 이들은 전방위적 가해자로, 환자의 가족과 의료진들을 잠재적인 가해자로 여기며 이들을 모두 '걸어다니는 세균 폭탄'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으로부터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얻기 싫고 그들에게 내가 입은/입을지도 모를 손해의 책임을 묻고 전가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너무 많은 이들에게 범위도 너무 넓게, '자가 격리'란 이름의 가택 연금이란 처벌을 너무 배려 없이 요구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 불특정한 타인을 최대한 '물화'(내지 비인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문재 선생의 글에서 읽은 것은 그런 것들에 대한 우려였고, 그런 종류의 공포와 불안이었다. 우리는 이미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는 확진 환자를 향해서, 35번 의사 환자를 향해서 그런 비난을 쏟아낸 바 있다.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 '전염병'인 경우 이는 어느 정도 필요하고, 합리적이며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상황은 또한 우리가 역사에서 봐왔던 어떤 광기의 국면들의 '전조'와 익숙하게 겹치기도 한다.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인정되면서도, 어느 정도 또 경계와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사이에서 어떻게 선을 그을 것인가,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비판의 대상으로 둘 것인가. 또한 무엇을 경계해야 할 것인가. 이 합의선을 토론과 논쟁을 통해 도출해내는 게 지금의 과제일 것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각자도생을 권유하는 상황에 대한 정치적 의미조차 짚을 겨를을 내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고작 독감’이라고 격하하는 이 병이 이렇게나 통제되지 못한 채 퍼져나가고 사망자를 낼 것이라고, 우리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우리 시스템이 이렇게 허약할 것이라고, 시스템의 얼개는 있어도 그 시스템을 이렇게까지 버려두고 활용 못 하고 대처 못 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던가. 모두가 당황과 패닉에 빠져 있는 국면인 것은 당연하다. 스페인 독감이 휩쓴 1918년 도 아니고…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대신, 잠재적 가해자와 보균자를 ‘색출하고 격리’하는 데에만 전력을 쏟고 있는 건 아닌가? 오히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야근 거부 파업을 일으켜야 하는 게 아닐까? 면역력이 약해 걸리는 질병이라면, 면역력이 떨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충분한 휴식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몸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하루 병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영영 회사에서 잘리고 생계가 막막해질지 모르는 우리는 차마 야근 거부를 조직화하지 못한다. 대신 같은 이유로 중국으로 출장 간 이를 맹렬하게 비난한다.
시스템이 어떤 병과 폐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때, 믿을 만한 정보와 대처에 의해서가 아닌 그저 입막음과 강압으로 공포와 불안을 제어하려 할 때, 그래서 그 안의 개개인들이 그저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와 불안감에 잠식될 때, 우리는 그 책임을 질 ‘대상’을 찾는다. 그리고 이미 거센 비난에 직면한 상황에서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하는 시스템과 이 시스템에 복무하는 책임자들은,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는 '입'들은, 이 '대상 찾기' 놀이를 힘 없는 개인으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누군가는 병을 염려하고 누군가는 이 병이 가져올 공포와 불안을 염려한다. 누군가는 만약 병에 걸릴 경우 내가 당하게 될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라 내가 책임지고 있는 가족의 생사와 생계를 생각하며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또한 누군가는 책임의 대상이 힘 없는 개인, 환자, 환자의 가족을 향할까 우려한다. 또한 누군가는, 어떤 계기로 과거에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그리고 여러 번 반복됐던 사회적 사건들을 떠올리며 그 사건이 또 다시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내가 트위터에서 ‘예민함’이라고 지칭한 것은 마지막 종류의 불안과 공포이다. 그것이 그저 노파심의 발로라 하더라도,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어떤 사건들의 전조를 느끼고 그때 우리가 저질렀던 실수들을 상기시키는 것, 그리하여 혹여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어떤 사건들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은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의 사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를 표현하는 글이 다소 성길지라도, 그 글에 동원된 알레고리들이 상투적이라며 그저 비평적 차원의 비난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이 우려에 귀를 기울이고 경계를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글이 지시하고 우려하는 바를 함께 우려하는 이들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그런 ‘비평적 차원의 비난’이야말로 '한가하'다.
개인적으로, ‘강박적으로’라는 단어까지 동원하여 그 글이 손을 씻는 행위를 언급할 때, 나는 그저 통상보다 좀 더 신경 써서 손을 씻는 정도의, 당연한 에티켓으로서 권장되는 말 그대로의 손 씻는 행위보다, 영화 <숨바꼭질>에서 손현주가 손을 씻는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그 장면은 손현주의 어떤 강박과 불안을 상투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문재 선생의 글에서 지칭되는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행위’ 역시, 한편으로는 이 국면에서 중요한 예방책이자 평소에도 권장될 만한 말 그대로의 손을 씻는 행위 자체뿐 아니라, 그러한 공포와 불안의 표현으로서의 일련의 ‘강박적이고 히스테리컬한 반응과 행위들을 함께 가리키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일군의 독자들은 후자의 의미를 애써 지우고 전자의 의미만을 취한다. 이 편향이 이상한가, 이 편향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이상한가?
시인이 글에서 보여준 '한가한 예민함'이, 공포와 좌절을 오히려 부추기는 말보다 차라리 더 윤리적일 수도 있다. 한국의 일반적인 후진 경향을 탓하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구별짓기를 통해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언행에서 우리가 캐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런 보균자가, 가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쟤는 가해자일 수 있다!”라면, 나는 이 또한 병 못지 않게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한다. 역사에서 그나마 교훈을 건져오며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며 주저하고 있는 우리의 무의식을, "해도 돼, 해도 돼!"라고 선동하며 죄책감을 없애고 마음껏 타자를 탓하도록 유도하는 일련의 발언들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한다. 이문재 선생의 글이 주는 거부감에는, 그 글이 ‘개인 차원의 타자 간 적대’(박권일의 표현을 빌어 썼다)의 다른 끝에서 개인 차원의 귀찮음과 불만과 억울함(일견 떼쓰기로 보이기도 한다)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한가해 보이는 예민함'에 대한 평가절하와 함께, 어쩌면 마녀사냥의 달콤한 유혹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