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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지옥의 연대는 가능한가 [상]

조회 수 4761 추천 수 0 2015.09.08 10:07:15
지옥의 연대는 가능한가 [상]
<경향신문> ‘헬조선’ 커버스토리에 부쳐


<경향신문> 박은하 기자의 ‘헬조선’ 기획은 흥미로운 기사였습니다. 저는 이번 기사와 같은 웹 담론분석에 관심도 많고 기본적으로 무척 우호적인 편이예요. 제 자신이 웹 담론에 관한 논의를 예전부터 해오기도 했구요(몇 해 전 반이주노동자 온라인 커뮤니티의 극우 담론을 분석한 글을 공저로 출간한 적 있습니다. <우파의 불만>이라는 제목입니다). 

기사에서 인용된 ‘의미망 분석’에도 최근 들어 관심이 커졌습니다. 2014년 11월경 어느 모임에서 일베를 주제로 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논문을 읽고 코멘트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가 계기였어요. 논문 저자는 김학준 씨라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막 출간된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라는 책의 저자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책에 실린 제 글도 일베에 대한 분석이었는데 한 해 전에 월간지 <나, 들>에 연재하던 원고를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김학준 씨 논문, 재미있었어요. 분석 툴부터가 신선했을 뿐 아니라 내용 또한 날카롭고 역동적이었습니다. 아주 핵심적인 부분에서 일베 담론에 관한 저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어서 솔직히 깜짝 놀랐어요. (물론 저는 직관과 관찰, 사적인 인터뷰 따위에 대충 의존했지만 김학준씨는 프로그램을 돌리고 연구기준에 따라 인터뷰를 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노력”의 차이...) 출발과 도구는 달랐지만, 그리고 태도랄까 감수성 면에서 제가 김학준 씨보다 좀 더 일베에 적대적이긴 했지만, 일베를 괴물화하거나 혹은 과잉이념화하는 통상적 비판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의의 결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구구절절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박은하 기자나, 김학준 씨, 저 같은 사람들은 나이도, 경험도, 감수성도, 서로 하는 일도 다르지만, 큰 틀에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을 강조해두고 싶어서예요. 저는 제 글쓰기가 저널리즘과 문화연구(cultural study)의 경계에 걸쳐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뭐라 부르든 상관없겠죠. 중요한 건 박 기자의 이번 기획과 비슷한 시도들, 요컨대 ‘지금, 여기’의 현상을 날렵하게 낚아채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논의의 장을 여는 작업들이 더 많이 나올 필요가 있단 겁니다. 이 글은 기사비평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다그치는 질문이고, 앞으로 제가 해나갈 담론분석 작업의 준비입니다.

자, 시작해 보십시다.

얼마나 새로운 현상인가

예전에 일베 담론을 분석하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일베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글쟁이들의 나쁜 습성, 지금 자신이 다루는 문제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인양 오버를 떨어대는 습성에서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예술가가 아니라 저널리스트이고, 철학과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훈련을 조금은 받은 사람이기에 가급적 레토릭에 기대지 않고 대상에 대해 기술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런 태도는 요즘처럼 웹 담론이 일반화된 시대에 더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여론의 쏠림현상이 극심할 뿐 아니라(집단극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물론 학계에도 논란이 있습니다만), 이슈에 따라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반응의 온도차가 극과 극인 경우도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사건들은 대부분 온라인과 오프라인 할 것 없이 화제가 됩니다. 하지만 온라인에선 폭탄이 떨어진 듯 아수라장인데 오프라인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사건들이 제법 있지요. 

초기부터 일베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만, 본격적으로 일베에 대한 글을 매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광주항쟁 희생자를 대상으로 한 사실왜곡과 모욕이 극단화하면서, 일베는 온라인 한쪽 구석의 여러 막장스런 놀이터에 머물지 않고 ‘현존하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일베를 드나들기 시작한 날부터 분석하기 시작한 날까지의 시간은 곧, 담론분석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가늠해본 기간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분석을 결심하게 만든 점은, 극우성향 커뮤니티로서의 특이성입니다. 한국의 온라인에 극우‧인종주의 경향의 반다문화 커뮤니티가 대형화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저는 이미 이들 커뮤니티에 대한 담론분석을 책으로 출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이들과 상당히 다른 질감과 감수성을 지닌 극우 커뮤니티가 출현한 것이죠. 이용자의 연령대도 상당히 젊어보였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일베에 관한 작업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새로운 현상인가라는 질문. 저널리스트 입장에서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까놓고 말해 뉴스가치가 얼마나 있는가라는 질문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저술가, 기자, 매체 입장에서는 본질적인 물음입니다. 이번 커버스토리와 관련해선 이런 질문이 되겠죠. 헬조선이라는 유행어는 사회구성원(여기서는 주로 청년세대)의 사회인식에 질적‧양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신호인가? 여러 가지 판단과 대답이 가능하겠습니다만 만약 저에게 묻는다면 “특집이나 기획으로 삼기엔 좀 약하다”고 답하겠습니다


[1]불지옥.jpg


헬조선은 헬(지옥)과 조선을 합성한 말입니다. 박 기자의 기사에서 인용된 것처럼 “왕조 같은 권위를 지닌 자가 군림하고, 개인은 노예로 사는 삶을 택하는” 사회를 가리키죠. 2009년에 처음 만들어진 말이라고 하지만, 최근 들어 크게 유행했습니다.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 고단한 사회를 촌철살인 드러내는 말인 것은 분명합니다. 기사에 인용된 인터뷰이의 발언들, 박은하 기자의 정리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동어반복적이라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새로운 현상을 보여주었다기보다는 이미 인지되고 이런저런 형태로 알려지기도 했던 현상을 유행어를 계기로 재정리하는 느낌입니다. “헬조선의 시대적 의미는 사회의 붕괴를 인식한 것”이라는 전문가 코멘트가 나옵니다만, 이 주장을 레토릭의 차원이 아니라 실증적인 차원에서 증명하거나 방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사회의 붕괴’ 상황으로 봐야 하는가라는 의문부터 해서, 헬조선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는 그런 인식이 없었는가라는 질문들도 나올 수 있겠죠. 

이런 난점은 남한테 지적하기 이전에 저에게도 ‘벽’입니다. 매번 골치 아픈데,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더군요. 유행어는 물론 대중의 사회인식을 시사하는 중요한 지표입니다만 사회운동이나 집단행동 같은 실천행위보다는 현저히 약한 지표입니다. 따라서 (쓰는 사람 입장에선 절대 쉽지 않겠지만) 사태를 특권화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새로운 유행어가 나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새로운 인식이 나왔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헬조선’ 유행어 이전에도 ‘노력해도 안되는 사회’를 냉소하는 청년들의 담론은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자기계발에 실패한 청년들의 담론이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입니다. “자기계발서가 시키는 대로 미친 듯이 노력했는데, 안될 놈은 안되더라” 같은 인식이 널리 공유되기 시작한 것이죠. 2009년 전기 사회학대회에는 <자기계발로부터의 도피?>라는 논문도 발표된 적도 있지요. 자기계발에 실패하고 절망한 주체, 우울과 냉소를 내면화한 주체를 전면에 내세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하는 주체들의 상당수가 실은 몇 년 전만 해도 피로회복제 광고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이었죠. <88만원 세대>를 쓰고 전국을 돌며 강연을 다닐 때 가는 곳마다 대학생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난 장래 CEO가 되거나 대기업에 입사할텐데 왜 우리에게 이런 우울한 세대명을 붙였나?”“선생님은 사회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시는 것 같다 그렇게 사시면 안된다” (실제 워딩입니다..) 물론 이들은 ‘일부’입니다. 당시에도 한국사회를 ‘지옥’으로 인식하던 대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강연장에 찾아왔습니다. 반면 그들과 달리 자신의 미래를 한없이 낙관하고 긍정하던 이들 또한 적지 않게 있었던 겁니다. 

헬조선 담론의 시대적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청년세대 내부의 인식이 동질적이라 전제할 게 아니라, 세대 내부에 존재하던 인식의 격차가 어떻게 수렴했는지 혹은 세대 내 주류담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헬조선’ 담론은 ‘담론적 사고(accident)’가 아니라 여러 겹의 맥락을 가진 ‘담론적 사건(affair)’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 정도로 파고들다보면, 이미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유사한 인식을 드러내는 여러 단어들을 시계열적으로 경합시키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담론분석에 무슨 교과과정이나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일단 소재와 주제가 확정된 이후의 분석은 크게 3단계로 진행됩니다(물론 이건 도식적인 구분일 뿐입니다). 1단계 개념과 단어의 적절한 추출, 2단계 사태의 기술(description), 3단계 분석적 재구성. 제가 보기에 이번 ‘헬조선’ 기사는 2단계를 충분히 진행하지 못한 채로 너무 서둘러 마무리되었습니다. 분석적 재구성까지 가지 못했음에도 (기자가 원하는) 전문가의 해석이 덧붙여져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청년세대를 대변해야한다는 윤리적 욕망이 담론을 철저히 해명하겠다는 지적 욕망을 누르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옥의 연대는 가능한가' [하]편을 이어서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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