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CBS 인터뷰 : '경공모' 회원들 "드루킹 실검 1위...드디어 예언 실현됐다"
최순실을 무당이라고 욕하던 자들 중에도 무당들은 넘쳐났다. 하긴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 중 상당수가 환빠 , 황빠, 김어준빠이기도 하다. 여긴 아직 샤먼사회다. 인지적 불안, 실체적 사실 사이의 공백을 못견뎌 금세 오컬트나 음모론, 절대자(신, 사제, 대통령)에게 기대려는 이 집단적 습성을 고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일 게다.
이 습성은 이른바 종교적 심성, 누멘적인 것, 이런 것과는 다른 것이다. 뛰어난 신학자는 탁월한 회의주의자였다. 또한 내면의 불안과 치열하게 격투했던 이들이었다. 충실한 신앙인들도 대체로 그러하다. 정작 종교를 얄팍하게 냉소하던 이들일수록,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며 어처구니없는 음모론의 포로가 되기 일쑤다. 중세를 암흑기로 묘사하며 근대화를 역설하는 이들, "미개하다"를 입에 달고 다니는 자유주의자들이 대체로 이 부류에 많이 포진한다. 이들은 '안아키' 같은 집단을 비난하지만, 사실 이들이 세계를 보는 관점은 '안아키'나 '드루킹'과 거의 차이가 없다.
언젠가 내가 칼럼([세상 읽기] 앎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쓴 바 있듯 오늘의 문제는 ‘계몽되지 못한 자’가 아니라 ‘계몽되지 않으려는 자’(“어디 진보언론 따위가 날 가르치려들어?”), ‘계몽 이후의 백치들’이다. 그들은 절대악과 싸우는 타격감을 즐기는 자들이지 정의와 공정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가지면 자신의 알량한 기득권들, 이를테면 남성 젠더권력이나 고학력 수도권 중간계급의 아비투스 같은 것들을 아프게 성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찰하면 자신을 더이상 '피해자-소비자'로만 내세울 수 없게 되므로, 그들은 김어준 같은 '사제'가 정해준 프레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되니까.' 그 프레임 속에서는 나보다 더한 괴물들을 알리바이 삼아 얼마든지 정의로울 수 있으니까. 지식과 자의식만 비대해진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이런 모습이다.
탈주술화 시대를 거쳐서, 이런 재주술화한 주체들이 공론장을 점령해 버렸다. 물론 이것은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 말이 절대적 당위를 의미하진 않는다. 진리에 대한 무관심에 기반하는 민주주의 너머에는 진리를 향한 열정에 기반하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민주주의는 회의하고 머뭇거리면서도 끝내 '최종해결'에 대한 욕망에 굴복하지 않는 집단지성의 실천이다.